보통 만화가가 아니다. 김보통

 

직장을 그만두고 빈둥거리다가 책상 위 노트에 눈이 갔다. 그림을 그리다 보면 시간 가는 줄 몰랐고, 트위터에 몇 장 올린 그림에 “못 그리는데 희한하게 예쁘다”는 멘션이 달렸다. ‘트친’이었던 만화가 최규석의 지나가는 말이 씨가 되어 웹툰 <아만자>를 연재하게 됐다. 1년간의 연재를 마치자 ‘오늘의 우리만화상’이 덥석 품에 와 안겼다. 세상 참 쉽게 산다 싶다. 항상 그림으로 얼굴을 가리고 촬영에 임하는 그의 진짜 눈을 보고 싶었다.

 

여행을 가더라도 앞일을 모르는 게 더 재밌잖아요.

 

놀아라! 정신 차리고

 

먼저 축하부터 드릴게요. 첫 작품 <아만자>가 <송곳>, <치즈인더트랩> 등 쟁쟁한 작품들과 함께 ‘2014 오늘의 우리만화상’을 수상했어요.

원고하고 있는데 갑자기 전화가 와서 상금 받을 계좌를 부르래요. 식상한 말이지만, 전 정말 생각지도 못하고 있었거든요. 상 주신 이유를 지금도 모르겠어요. 소재가 독특해서? 심지어 저희 어머니도 그러셨어요. “아니, 왜? 왜 너한테 상을 줬대니?”

 

보통 작가가 아니라는 걸 눈치챈 거죠. 필명이 ‘평범하게 살아도 괜찮다’는 의미라면서요?

아, 그게…. 처음에는 그랬어요. 우리나라엔 성공의 기준이 정해져 있고, 그 기준에 따라 매겨진 순위에서 상위 몇 퍼센트 안에 들지 못하면 낙오자, 패배자라고 얘기하잖아요. 그게 너무 싫어서 ‘보통’이라는 이름을 붙였어요. 근데 사람들이 욕을 하더라고요. “니가 무슨 보통이냐? 넌 특별하면서 왜 보통인 척하냐?” 그걸 보면서 우리가 서로에게 이 정도로 날이 서 있구나, 싶었어요. 그 뒤로는 굳이 의미를 얘기하지 않고 그냥 지었습니다, 그래요.

 

아버지께서도 ‘평범하게 살아라’라는 말씀을 많이 하셨다는데, 그게 작가님한테 영향을 끼친 것 아닐까요?

무의식중에 남아 있긴 하겠죠. 근데 아버지가 말한 ‘평범’과 제가 생각하는 ‘보통’은 조금 달라요. 아버지는 제가 인문계 고등학교를 나와 서울에서 4년제 대학을 다니고 안정적인 직장에 들어가 결혼하고 애 낳고 늙어 죽는, 튀지 않는 삶을 살기를 원하신 거예요. 근데 그게 쉽나요? 그 평범한 삶이란 게 사실은 죽을힘을 다해 온 인생을 갈아 넣어야만 달성할 수 있는 거잖아요. 전 굳이 안정적인 직장을 다니지 않더라도 행복하게 살 수 있고, 그런 의미의 ‘보통’을 원해요. 제가 지금 얼마 받는지 알면 ‘니가 무슨 보통이냐. 김특별로 이름 바꿔’ 이런 말 안 하실 텐데….(웃음)

 

일반 회사에 다니다가 그만두고 만화가가 되셨어요. 평범한 삶을 뒤로하고 뛰쳐나온다는 게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텐데요.

1년 뒤, 10년 뒤, 20년 뒤의 내 모습이 다 그려지는 거예요. 미래의 내 모습이 이미 결정되어 있고, 그 과정을 무엇으로 채울지도 뻔하고. 특히 아버지가 암으로 돌아가시는 걸 보면서 두려웠어요. 아, 나도 아버지처럼 열심히 평범하게 살면 나중에 병상에 누워서 ‘재밌게 살걸’ 후회하며 죽겠구나 싶었거든요.

 

사람들은 보통 미래의 자기 모습이 그려지지 않으면 불안해하지 않나요?

저는 모르는 게 더 좋아요. 사람마다 가치관은 다른 거니까. 여행을 가더라도 앞일을 모르는 게 더 재밌잖아요. 패키지 여행이 편하다는 사람도 있겠지만, 전 자유 여행이 더 좋아요.

 

웹툰 <아만자>의 주인공 박동명은 ‘암 환자’. 한창 꽃피워야 할 나이 스물여섯이지만, 병상에 누워 하루가 다르게 시들어간다. 그러나 이 만화는 우울한 이야기가 아니다. 박동명은 꿈속에서 광활한 숲을 만나고, 점점 사막으로 변해가는 그곳에서 귀여운 친구들과 함께 사막의 왕을 찾아 나선다. 동화 같은 이야기에 마음이 자꾸만 흔들리는 건 우리 마음도 그 숲 속에 있기 때문이다.

 

출처: 웹툰 <아만자> 64화

 

예전에 엄마가 좀 아프셨던 적이 있어서 단행본을 선물할까 했는데, 좋아하실지 아니면 괜히 아팠던 기억이 떠오를지 헷갈리더라고요.

저도 가장 신경 썼던 게 암 환자나 그 가족들에게 상처가 되는 내용을 그리지 말자는 거였어요. 다행히 연재 중에 암 투병 중이신 분들한테 메일을 받았어요. 암 환자들이 몸 아픈 것 외에도 정신적인 문제, 즉 외롭고 슬프고 남들에게 이해받지 못하는 고립감까지 느낀다는 걸 설명해줘서 고맙다고요. 암 환자들이 겪는 불안감과 공포는 사실 가족도 이해 못 하거든요. 그때 내가 조금이라도 도움이 됐구나, 마음을 놓았죠.

 

얘기를 듣다 보니 <아만자> 속 장면들이 떠올라요. “꽃이 슬픈 건 져서가 아니라 지는 걸 아무도 모르기 때문”이라는 대사도 있잖아요.

그리면서 ‘내가 얘였으면 어땠을까’라는 생각을 정말 많이 했어요. 내가 이렇게 젊은 나이에 꽃망울도 피워보지 못하고 줄기가 잘려 말라 죽게 된다면 어땠을까. 1년 동안 같이 시들어가는 느낌으로 연재를 하니까 후반에는 몸이 너무 안 좋았어요. 매일 끼니처럼 약 먹고, 이틀 내내 누워 있고. 어떤 분들은 <아만자>를 실제 암 환자가 그린 투병기로 알고 계시던데, 그런 말 들으면 뿌듯하고 감사하죠.

 

주인공은 아프기 전의 일상을 그리워해요. 맥주 마시면서 야구 보는 것처럼. 작가님의 일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순간은 언제인가요?

소파나 바닥에 드러누워 과자 집어 먹으면서 만화책 보는 거죠. 그걸 못 하면 제일 괴로울 것 같아요. 저희 아버지도 그랬지만, 환자 대부분이 말기가 되면 집에 가자고 하세요. 아파도 좋고, 죽어도 좋으니까 제발 집에 한 번만 가자고. 한순간이라도 좋으니까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갈망이 큰 거죠. 그런 감정을 최대한 보여주고 싶었어요.

 

암이라는 소재가 무겁다 보니, 재밌게 전달하기 위해 많이 고민하셨을 것 같아요.

일단 파스텔 톤으로 밝게 그렸어요. 숲(꿈)과 병실(현실)을 오가다가 마지막에 숲으로 들어간다는 설정에도 이유가 있고요. 제가 하고 싶었던 얘기는 죽는 순간에 새로운 세상의 문이 열린다는 거였거든요. 저희 아버지의 죽음을 고통스럽게 남겨두지 않기 위해 미화를 한 거죠. 가족을 암으로 떠나보낸 다른 분들도 지금 내 어머니, 내 남편이 귀여운 동물들과 함께 숲 속을 여행하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조금 덜 쓸쓸하지 않을까요?

 

출처: 웹툰 <아만자>

 

만화의 귀여움을 담당한 건 숲 속 동물들이었어요. 누가 가장 인기 많았어요?

남들이 슬플 때나 기쁠 때나 항상 슬퍼하는 ‘보보보’요. 아무 생각 없이 그렸는데, 독자들이 걔를 좋아하시더라고요. 다들 슬픈 건지…. 좀 성격 이상한 애들이 인기가 많아요. 만화에 나오는 동물은 명랑하고 밝은 줄만 알았는데 싸가지 없고, 멍청한 동물들이 나오니 신기한가 봐요.

 

주인공도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암 환자의 모습과는 달라요. 문병 온 여자 친구한테 계속 장난치고 농담을 하잖아요.

원래 유머 감각이 있는 애거든요. 아프기 전이나, 아프고 나서나 초지일관 장난을 치죠. 근데 좀 슬픈 장난이에요. 본인이 아무리 힘들어도 주변 사람을 슬프지 않게 하려는 거니까요. 실제로 암에 걸린 가장들은 본인보다 가족이 겪게 될 고통 때문에 더 힘들어해요. 회사 다닐 때 죽어야 조의금이 많이 들어온다는 말까지 하시거든요.

 

전 삶이 뷔페라고 생각해요. 먹어볼까 말까 망설이다가는 아무것도 못 먹어요.

 

그리면서 심적으로 가장 힘들었던 장면은 무엇이었나요?

자기가 죽는다는 걸 받아들이는 장면이요. 침대에 가만히 누워서 가족들의 일상적인 대화를 듣다가 “나는 여름이 가기 전에 죽을 것이다. 용감한 사람이기 때문에 내가 말할 수 있는 거다”라고 울면서 말하거든요. 그때가 참 괴로웠죠. 암 환자 중에 죽음 수용 5단계(부정-분노-타협-우울-수용) 전부를 거치고 돌아가시는 분들은 거의 없대요. 시간이 없어서. 돌팔이 아니냐, 왜 하필 나냐 따지다가 돌아가시는 분, 슬퍼하다가 연락 끊으시는 분까지. 마음을 챙길 새도 없이 사막으로 뒤덮이는 거죠.

 

사막은 암 환자가 아니더라도 누구에게나 생길 수 있는 것 같아요.

자기 마음을 좀먹고 있는 존재죠. 슬픔, 고독, 탐욕 모두 사막이 될 수 있어요. 그 사막을 만든 건 결국 본인이잖아요? 그러니 사막의 왕은 바로 자기 자신이에요. 저는 회사를 다닐 때 슬픔의 사막이 너무 컸어요. 내가 이런 삶을 산다는 거에 대한 자기 모멸감 때문에, 건강부터 시작해 모든 관계가 나빠졌거든요. 지금은 벗어났지만, 언제 또 사막이 생길지 몰라요. 결말에도 나오지만, 왕관과 지팡이는 사라지지 않았거든요. 마음을 잘 지키지 않으면 어디선가 또 사막의 왕이 태어날지 모르는 거죠.

 

“부서질지 부숴버릴지는 부딪쳐봐야 아는 거 아니겠어?”, “포기는 하는 게 아니라 당하는 거야!”처럼 패기 넘치는 대사가 많아요. 평소에도 많이 경험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하시나요?

저는 그렇게 생각해요. 유치하다거나, 입에 발린 소리 아니냐는 사람들도 있긴 해요. 근데 전 그런 얘기를 하고 있는 사람보다는 그러거나 말거나 한번 해보는 사람들이 더 풍요로운 삶을 산다고 생각해요. 수많은 성공과 실패, 도전과 좌절이 삶을 채울 테니까요. 전 삶이 뷔페라고 생각해요. 먹어볼까 말까 망설이다가는 아무것도 못 먹어요. 맛이 있는지 없는지는 먹어봐야 아는 거니까.

 

본인이 만약 주인공처럼 스물여섯의 나이에 암에 걸렸다면 어땠을지 생각해보셨어요?

그럼요. 만화 그릴 때는 물론이고, 아버지가 투병하실 때도 계속 했어요. 그러니까 회사도 그만둔 거고. 피에로 복장을 하고 다닐까, 시베리아로 도망칠까 여러 가지 생각을 해봤는데, 다 필요 없고 전 만화를 그릴 거예요. 5화까지 봤는데 작가가 암 걸렸다고 완결이 안 나면 독자 입장에서 얼마나 억울하겠어요.

 

그 상황에 그런 이타적인 생각을 할 수 있을까요?

에이, 그게 이기적인 거예요. 만화를 보여주고 싶다는 제 욕망만 생각하는 거잖아요. 이야기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누군가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욕망이 충족돼요. ‘내 만화를 기다린다고? 그럼 밤새워서라도 얼른 그려야겠다.’ 이 욕망이 되게 커요. 그 사람들을 위해서가 아니에요. 나를 위해서예요.

 

만화가 김보통이 들려줄 이야기는 이제 막 시작됐다. 윤태호 작가(『인천상륙작전』)의 뒤를 이어 한겨레 토요판에 새 작품 를 연재하고 있다. 탈영병을 쫓는 군탈체포조의 이야기. 이번에도 본인의 경험이 바탕이 된 작품이다. 내년 봄에는 수필집이 출간되고, 여행기도 내고 싶고, 일러스트 작업도 병행하고, 영화도 찍고 싶은 그는 아직 하고 싶은 게 많다. 어쩜 그리 다양한 일을 할 수 있느냐는 질문에 그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한다. “두 번 사는 거 아니잖아요.”

 

Editor 기명균 kikiki@univ.me
Photographer 박경섭 Studio ZIP

 

> 올레 웹툰 ‘아만자’ 정주행하고 싶다면

http://webtoon.olleh.com/toon/timesList.kt?webtoonseq=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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