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형철의 사랑

 

해가 넘어가면 한 살은 꼬박 먹고, 밸런타인데이는 어김없이 찾아오는데 아직도 사랑은 어려운 숙제다. 도대체 사랑이란 무엇일까? 책 『정확한 사랑의 실험』을 쓴 문학평론가 신형철을 만나, ‘사랑’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왔다.

 

덕분에 ‘사람에 대한 정확한 사랑’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게 되었으니 제 직업이 저의 선생인 셈입니다.

 

정확한 사랑에는 꾸밈이 없다

 

얼마 전 책 『정확한 사랑의 실험』을 내셨어요. 정확한 사랑이란 무엇인가요?

저도 잘 모르겠어요. 상대방의 가장 본질적인 부분을 이해하고 아끼는 것 정도가 아닐까요. 그래서 그가 다른 존재를 연기할 필요 없이 그냥 자기 자신이면 되도록 하는. 저에게 그 대상은 사람이기도 하고 작품이기도 해요. 한 인간으로서는 누군가를 정확하게 사랑하는 사람, 평론가로서는 텍스트를 정확하게 사랑하는 사람이면 좋겠죠. 두 가지는 서로 통하는 게 아닐까? 그런 생각에서 붙인 제목이에요.

 

책 서문에서 이렇게 쓰셨죠. “정확하게 사랑받지 못하는 사람은 고통을 느낀다”고. 그렇다면 우리는 언제 정확하게 사랑받지 못할까요?

“나는 너의 이런 면이 좋아”라는 말을 들었을 때, 그런 사람인 척 연기해야 한다면 그는 부정확하게 사랑받는 것이겠죠. 비평도 그래요. “나는 당신(작품)을 이런 이유로 높이 평가해”라는 메시지를 보냈는데, 작품의 입장에서는 이런 때가 있겠죠. “고맙긴 하지만 그건 내가 하려던 말이 아닌데.”

 

평소에 제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조차 모를 때가 있어요. 정확하게 누군가를 알아야 하나? 라는 욕구를 느끼기가 어렵기도 해요.

다들 부정확하게 살아가죠. 저 역시 그래요. 하지만 제 직업이 평론가이다 보니 어떻게 하면 작품을 정확하게 읽을 수 있을까, 100%의 정확함은 아니더라도 근사치로라도 작품의 핵심에 도달할 수 없을까를 고민하며 살죠. 덕분에 ‘사람에 대한 정확한 사랑’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게 되었으니 제 직업이 저의 선생인 셈입니다.

 

서로 결여를 확인하는 순간 더 깊어지는 관계도 있지 않을까요?

 

정확한 사랑은 ‘없음’을 교환한다

 

가끔은 ‘이게 사랑일까?’ 의문이 들 때가 있어요. 가령 연인을 만나는 이유가, 그를 사랑해서라기보다는 내가 사랑받고 싶어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거든요. 욕망의 대상이 될 때의 뿌듯함도 있고요. 이런 마음을 정확하게 들여다봐주실 수 있나요?

누군가의 욕망의 대상이 된다는 것, 즉 ‘인정을 받는다’는 것은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삶의 중요한 동력일지도 몰라요. 홍상수의 많은 영화들이 누군가의 욕망의 대상이 되기 위해 발버둥치는 안쓰러운 인간들의 초상화가 아니던가요. 단, 내가 누군가의 욕망의 대상이 되고 싶다면 상대방 또한 그렇다는 사실을 기억해둘 필요는 있겠죠. 그런 면에서 관계는 일종의 ‘교환’이라고 생각해요. 제가 사랑을 ‘없음의 교환’이라고 규정해 본 것도 그런 맥락에서예요.

 

‘없음’을 교환한다는 말이 흥미롭게 들려요. 작가님의 책도 “나의 없음을 당신에게 줄게요”라는 부분이 나오고요. 하지만 ‘없어 보이는 모습’은 감추고 싶은 게 사람 마음이잖아요. ‘없음’을 활짝 드러내서 사랑을 이룬다는 말이 잘 이해되지 않아요.

어느 집이건 어느 한 군데는 고장이 나 있잖아요. 전구가 나갔거나 문고리가 떨어졌거나. 인간도 그렇다고 생각해요. 그러나 우린 그걸 감추려 하죠. 이미 온전한 존재인 척 해요. 그래야만 상대방이 나를 욕망할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겠죠. 하지만 원하든 아니든 언젠가는 자신의 결여가 드러나는 순간이 와요. 계속 결여를 부정하거나 가면을 쓰려고 한다면 그 관계는 깊어지지 못할 거예요. 하지만 서로 결여를 확인하는 순간 더 깊어지는 관계도 있지 않을까요?

 

예를 들면…?

예컨대 이성들에게 인기가 많은 사람이 있을 때, 그의 ‘있음’은 누구나 욕망할 만한 것이지만, 그의 ‘없음’은 그렇지 않죠. 실망하고 등 돌리는 사람도 있을 거예요. 그런데 나는 오히려 그의 그 ‘없음’ 때문에 그의 곁에 있어야만 하겠다는 생각이 드는 겁니다. 이상한 일이죠. 그런 느낌은 그 관계를 대체 불가능한 것으로 만들 겁니다. 제가 책에서 예로 든 영화 <러스트 앤 본>에서처럼 극적인 상황은 아니더라도, 크고 작은 결여는 모두에게 있으니, 구조적으로는 비슷한 상황을 누구나 맞이할 수 있겠죠.

 

저의 경우는 제 단점이 연인에게도 똑같이 있었기 때문에, 보는 것만으로도 고통스러웠던 경험이 있어요.

맞아요. 서로의 결여를 알아보는 일이 늘 바람직한 결과를 낳는 건 아니죠. 상대방에게서 나와 비슷한 결여를 발견했을 때 오히려 더 견딜 수 없게 되는 경우도 있어요. 그를 볼 때마다 나를 더 미워하게 되겠죠. 고통이 곱하기 2가 될 거예요. 그러니까 사랑이 드물고 귀한 게 아닐까요. 그래서 저는 사랑을 일종의 ‘사건’이라고 생각해요.

 

사랑은 일대일로 똑같이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에요. 그래서 많이 주는 사람은 지쳐요.

또 많이 받는 사람은 자기도취에 빠지기 쉽고요. 이런 관계는 지속하기 어려울 수밖에 없어요.

하지만 미리 준비하고 계산해서 피할 수 있는 고통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사람을 만나다보면 부딪힐 수밖에 없는 일이겠죠. 서로를 더 좋은 사람으로 만들어주는 관계가 아니라,
한 사람만 행복한 관계라면 그만 두는 게 나을 거예요.

 

저는 ‘유행어’라는 것의 정반대편에 ‘문학’이 있다고 생각해요.

 

정확한 사랑에는 오해가 없다

 

그렇다면 미안함이나 죄책감 또는 동정심으로 시작하는 만남 또한 사랑일까요? 예를 들어 나를 좋아해주는 상대에게 사랑의 감정은 못 느끼지만, 고맙거나 안쓰러워서 만나게 된다면?

몇몇 글에서 본능, 충동, 욕망, 사랑 등등의 감정을 논리적으로 구별해 보려는 시도를 했어요. 내가 나에게 속지 않기 위해서였어요. 내 감정도 나를 속일 수 있으니까요. 사랑이 아닌데도 스스로 사랑이라고 착각하면서 지낸다면 내가 나에게 속는 거죠. 그럴 땐 질문을 던져봐야 하겠죠. 이 관계 안에서 나는 나 자신으로 존재하고 있는가? 이 관계는 혼자 있을 때보다 나를 더 온전하게 만들어주는가?

 

‘온전함’은 어떤 상태를 뜻하지요?

예전에 무라카미 하루키 소설에 관해 얘기하면서 ‘완벽함’과 ‘온전함’을 구분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 적이 있어요. perfect와 complete의 미묘한 차이와 유사해요. 누구에게나 결여가 있으니 ‘완벽한 사람’은 없지요. 다만 자신의 결여와 성숙한 관계맺음에 도달하는 ‘온전한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으로 나뉠 수는 있어요. 사랑은 나를, 나의 자아를, 나의 삶을 ‘완벽하게’ 만들지는 못해도 ‘온전하게’ 만들 수는 있지 않을까 생각해요. 그와 함께 있으면 내가 온전해진다는 느낌. 플라톤의 『향연』에 나오는, 원래 둘이 한 몸이었던 인간이 쪼개진 후 서로를 찾아 헤매는 것이 사랑이라는 이야기도 저는 그런 맥락에서 이해해요.

 

사실 사랑이 일대일로 정확하게 교환될 수는 없잖아요. 더 많이 주는 쪽이나, 감정을 더 많이 쏟는 상대는 결핍을 느낄 수밖에 없죠.

그 문제는 정말 어려워요. 우리는 이 세상의 수많은 사람 가운데 아주 적은 몇 사람과만 연애를 하고, 그중에서도 특히 소수의 몇 사람과만 행복한 연애를 할 수 있으며, 그중에서 한 명 있을까 말까한 사람과만 사랑의 관계로 진입하겠죠. 그러니 대부분의 관계가 아프지 않다면 그게 이상해요. 문제는 그런 아픔을 미리 계산해서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이죠. 서로를 더 좋은 사람으로 만들어주는 관계가 아니라, 한 사람만 행복한 관계라면 그만 두는 게 나을 거예요.

 

비단 연인에게만 적용되는 개념은 아닌 것 같아요.

그렇죠. 히라노 게이치로가 쓴 <나란 무엇인가>라는 책이 최근에 나왔는데 추천하고 싶어요. 부제가 ‘개인에서 분인으로’인데, ‘분인’은 ‘나눌 분(分)’과 ‘사람 인(人)’을 썼어요. 우리는 이런 고민들을 하죠. “왜 고등학교 친구와 대학교 친구 앞에선 다르게 행동할까? 왜 엄마를 대하듯 아빠를 살갑게 대하지 못할까? 난 왜 여러 모습이지? 위선자인가?” 이에 대해 히라노는 나의 진정한 본질 같은 건 없다고 주장해요. 누구와 함께 있느냐에 따라 나는 달라진다, 그냥 여러 종류의 나가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나’라는 것은 결국 여러 ‘분인(分人)’들의 집합체다, 라는 겁니다. 그러니 나는 누구인가를 고민할 시간에 어떤 내가 더 소중한가를 생각하라고 해요. 나를 더 멋지고 행복한 사람으로 만들어주는 사람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라고, 즉 내 안에 존재하는 여러 분인 중 특정한 분인의 비율을 더 높이라는 거죠.

 

살다 보면 사람이 아닌 상황 때문에 사랑에 빠지는 경우가 있어요. 우리는 사랑을 할 때, 상황 때문에 생긴 게 아니라고 확신할 수 있을까요? 운명이라는 게 있을까요?

여행지나 전쟁터에서 다급한 상황을 함께 보낸 사이에선 감정이 갑자기 가까워질 수도 있죠. 저도 책에서 “어떤 사랑의 논리학도 결과를 확언할 수 있는 정도로는 정교해질 수는 없는 것이다. 우리가 세상의 모든 우연을 다 통제할 수는 없으므로.”라고 덧붙였어요. 사랑이라는 사건은 ‘보편적인’ 논리에 ‘가변적인’ 상황이 더해져서 발생하는 거니까요. 그 배합 비율을, 선택할 수는 없겠지만 인식할 필요는 있다고 생각해요.

 

그렇다면 영화 <색, 계>에서처럼 목적을 갖고 육체적 관계로 시작한 사랑, 이것 또한 사랑일까요?

<색, 계>건 다른 어떤 영화건, 비평가로서 할 수 있는 대답은, 서사 전체를 다 봐야만 판단할 수 있다는 거예요. 예컨대 두 사람이 즉흥 만남으로 하룻밤을 보냈는데 그렇게 시작한 관계가 사랑이 될 수 있을지 아닐지 판단할 수 있을까요? 그 하룻밤만으로는 판단하긴 어려워요. 슬라보예 지젝은 사랑인지 아닌지를 판단하는 기준은 그 관계 내부에만 있다고 했어요. 두 사람이 함께 만들 이야기를 총체적으로 봐야죠. 이야기를 읽고 본다는 것은 그래서 중요합니다. 판단 유보의 연습이 될 수 있거든요.

 

텔레비전이나 뉴스, 대중매체를 보며 생각이 한쪽으로 휩쓸려가게 되는 요즘, 정확하게 자기 마음을 들여다보는 방법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요?

요즘 ‘대박!’이라는 말을 많이 쓰더군요. 반대말로는 ‘헐!’이 있고요. 별로 멋져 보이지 않아요. 왜 자기 감정을 더 정확하게 표현하려고 하지 않을까요. 왜 흔하고 단순한 그 말에 자신을 내주는 것일까요. 저는 ‘유행어’라는 것의 정반대편에 ‘문학’이 있다고 생각해요. 내가 느끼는 바를 정확하게 표현하기 위해 말을 고르고 정련하는 과정에서 내 마음을 들여다보게 되겠죠. 적어도 저는 그랬어요.

 

Editor 조아라 ahrajo@univ.me

Phtographer 김재윤 Studio Zi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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