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덕동의 오피스텔은 다 좋은데, 좁아도 너무 심하게 좁았다. 어떻게든 책상과 소파를 함께 놓고 싶었지만 도저히 공간이 나오지 않았다. 월세 계약이 끝나갈 즈음, 다음에 살 집을 보러 다닐 때 꼭 따지기로 한 첫번째 조건은 ‘침대를 놓고도 책상과 소파를 둘 공간이 있는가’였다.

 

 

소파가 없으니 하루 종일 침대에서 뒹굴 거리게 되는 게 싫었고, 각 잡고 앉아서 집중할 만한 책상이 없는 게 내 게으름의 원인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50만원이라는 월세는 꽤 큰 부담이었기 때문에 이왕 알아보는 김에 전세를 찾기로 했다. 하지만 참 얄궂게도, 내 인생 처음으로 전세에 도전하려는 이 때 전세 대란이 터졌다.

 

 

전셋값이 미친듯이 폭등했고 매물이 없었다. 마땅한 매물이 없다는 게 아니라, 말 그대로 매물 자체가 없었다. 사회초년생이 구할 수 있는 전셋집은 다 거기서 거기인 지라, 얼추 예산에 맞는 집은 선착순으로 눈 앞에서 사라졌다. 마치 인기 아이돌의 콘서트 티켓팅을 방불케 했다. ‘이미 선택된 좌석, 아니 집입니다.’

 

 

꼼꼼하게 적어 둔 ‘집 구할 때 고려할 점’ 체크리스트에서 후순위에 둔 조건들을 하나씩 삭제했다. 회사와의 거리? 삭제. 역세권? 삭제. 신축? 삭제.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채광마저… 삭제.

 

마지막까지 양보할 수 없었던 ‘청결’과 ‘평수’만 남았다. 결국, 그럭저럭 깔끔하고 적당한 크기를 갖춘 집을 겨우 찾아 그 날 바로 계약을 했다. 내 의지라기보단 조건상 어쩔 수가 없는 선택이었다.

 

 

그래도 이전 집보다 만족스러웠다. 5평짜리 오피스텔에서 고작 세 평 더 넓은 8평짜리 원룸으로 왔을 뿐인데 생활 환경이 많이 바뀌었다. 침대와 옷장 맞은편에 원목 책상을 두고 그 옆엔 TV와 소파를 뒀다. 그러고도 TV와 소파 사이에 100X150 사이즈 러그를 깔고 좌식 테이블을 놓을 수 있을 정도로 공간이 남았다.

 

 

좁은 공덕동 오피스텔에는 수납장을 놓을 공간이 없어 창틀에 책을 쌓아 뒀는데, 이 집에는 4단 수납장을 놓고도 침대 옆에 협탁을 둘 수 있었다. 화분 네다섯개를 창틀에 조로록 앉혀 놨다. 내 허리춤까지 자란 거대한 몬스테라 화분도 들였다.

 

 

취미를 더 가졌다. 오일파스텔로 그림을 그려 한 쪽 벽면에 작품을 전시하듯 붙여 뒀다. 자기 전엔 스탠드 조명만 은은하게 켜 둔 채 소파에 앉아 책을 읽는다. 감수성이 풍부해지는 날엔 천천히 우려낸 꽃차도 곁들인다.

 

 

수집욕이 늘었다. LP를 사들이기 시작했다. 취향을 소유할 공간이 없어 집 밖의 카페를 떠돌며 타인의 취향을 잠시 빌려 쓰던 내가, 바이닐 수집이라니. 여유로운 주말엔 그날의 기분에 맞는 LP를 골라 턴테이블에 올려 둔다.

 

 

시국이 바뀌면서 야외 운동이 어려워져 요가매트를 샀다. 요가를 하며 아무리 양팔을 벌리고 다리를 찢어도 좁지가 않았다.

 

팔 벌리고 빙글 돌면 그 자리가 공간의 전부였던 고시원에서 살았던 기억이 아득해졌다. 삶의 질이 상승하고 있다는 걸 실시간으로 느끼는 순간들이 많아졌다. 취향을 마음껏 향유하고 있다는 만족감에 스르륵 미소 짓는 날들이 이어졌다.

 

 

여전히 지금 사는 집이 100퍼센트 마음에 쏙 들지는 않는다. 옆 건물과 너무 가까워 해가 드는 시간이 하루 중 2시간도 안 되고, 길거리에서 태연히 담배를 피우며 쓰레기를 버리는 사람들이 많은 번잡스러운 동네에 있다. 산책할 만한 곳도 마땅히 없어 20분을 걸어가야만 초록초록한 공원이 있는, 그런 집이다.

 

 

고시원에서 시작해 쉐어하우스, 좁은 오피스텔을 거쳐 전셋집으로 옮겨오는 동안 마음에 아주 강한 확신이 단단히 뿌리를 내려갔다.  나의 삶은 점점 나아지고 있다는 것. 앞으로 여기서 더 나아질 일만 남았다는 것. 더 이상 내가 발 딛고 사는 공간이, 내 집이, 거지같아서 도망치고 싶지는 않다는 것.

 

 

<끝>


illustrator 몽미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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