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만난 친구와 저녁을 먹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머릿속이 ‘지쳤다’는 생각으로 가득 찼다. 종이에 베인 것처럼 찝찝한 기분. 아마 친구도 상처를 받았을 것이다. 분명 최선을 다한 것 같은데, 왜 대화를 하면 할수록 공허해졌을까? 이럴 거면 왜 아까운 시간 쪼개 가며 만난 거지? 어렵다 어려워. 심지어 난 학부 내내 소통만 배우는 신방과 출신인데. 대체 4년 동안 뭘 한 거야!

 

되는 일이 없을 땐 누굴 만나도 즐겁지가 않다. 아니 오히려 괴롭다. 질투, 짜증, 화, 자조 같은 못난 감정들을 아닌 척 숨기느라 신경이 잔뜩 날카로워진다.

 

조금만 더 참았다간 터져 버릴 것 같던 차, 운 좋게도 제주에 갈 일이 생겼다. 만세! 여기서 단 며칠이라도 도망칠 수 있다니. 저 많은 것을 바라지 않겠습니다. 좋은 날씨도, 바다도 훈남 오빠도 다 필요 없어요. 그저 혼자만 있게 해 주세요.

 

 

<여기선 진짜로 아무 것도 안 해도 돼>

 

 

삼달리는 제주도 동쪽에 있는 작은 마을이다. 말 그대로 사람 사는 동네라 특별한 볼거리가 없는데, 유명 관광지에서 가깝지도 않다. 굳이 이 곳을 찾는 여행객은 근처에 있는 ‘김영갑 갤러리’를 찾아온 사람들 정도. 그마저도 삼달리까지 오지 않고 돌아가는 경우가 대다수다. 빙고! 이곳이라면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푹 쉬다 갈 수 있겠구나.

 

 

여행 내 묵었던 게스트하우스 ‘삼달재’는 곳곳에서 기품이 느껴지는 공간이었다. 잘 정돈된 정원과 하얀 벽. 실내에 들어서자마자 은은하게 풍기는 나무 향. 왠지 큰 소리를 내면 안 될 것 같아 살금살금 들어갔더니, 아직 아무도 오지 않은 듯 이층 침대 2개가 덩그러니 비어 있었다.

 

새 시트의 버석한 감촉을 즐기며 생각했다. 앞으로 적어도 삼일 동안은 누구도 나를 찾지 않을 것이다. 억지로 웃을 필요도, 보고 싶지 않은 사람을 만나야 할 이유도 없다.

 

창 밖에서 들리는 파도 소리는 방에 온 지 한참이 지나서야 알아챘다.

“대박. 나 지금 침대에 누워서 파도 소리를 듣고 있는 거야?”

 

 

<우리 집 마당엔 바다가 있어>

 

 

적당히 짐을 정리하고 어슬렁어슬렁 나와 걸었다. 바다다. 마치 우리 집 마당인 양 코앞에 있다. 협재나 함덕처럼 보드라운 모래가 가득한 해변은 아니지만 어쨌거나 바다니까! 방파제에 걸터앉아 연약한 파도가 까만 돌에 있는 힘껏 부딪치며 내는 소리를 들었다.

 

아플 걸 알면서도 전속력으로 달려오는 무모한 파도를 보며, 오해를 풀 용기가 없어 영영 남이 되어 버린 친구를 생각했다. 생각만 했다. 혼자 여행을 자주 하는 선배가 미리 조언을 해 준 덕이다.

 

“괜히 감성 돋아서 옛사람한테 연락하지 마. 괜히 서로 민망해지니까. 너는 여행 중이겠지만 그 사람은 일상을 사는 중이라고.”

 

 

오늘 꼭 봐야 하는 명소도, 빨리 가자고 보채는 동행도 없어서 동네 구석구석을 몇 바퀴 더 돌았다. 제주 어디에나 있는 낮은 돌담이나 동네 개를 사진에 담는 데 시간을 허비하면서.

 

 

<낯선 이와 함께 노래를 부르다>

 

 

방으로 돌아가니 비었던 침대가 채워져 있었다. 같은 방을 쓰게 된 것도 인연인데, 넷 다 혼자 여행 중(그것도 뚜벅이로!)이라는 공통점이 있어 신기했다.

 

그중 한 명이 근처에 해물 라면을 기가 막히게 끓이는 집을 안다고 해서, 방에 있던 모두가 따라 나섰다. 목적지는 ‘고래라면’. 제주는 도보 길 찾기 서비스가 제공되지 않는 지역이라, 걸어서 얼마나 걸리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차로 3분 거리라기에 만만히 봤는데, 습한 공기를 가르며 15분 넘게 걸어도 나타나지 않아 제안한 사람도 따라 나선 사람도 당황스러웠다.

 

그쯤 어디선가 나타난 개 두 마리가 마치 우리를 데리러 온 요정처럼 앞서 걷기 시작했다. 이들은 꽤 먼 곳까지 우리를 따라 왔는데, ‘고래라면’의 간판이 보일 때쯤 소리 없이 사라졌다고 한다. 당시엔 몰랐는데, 지나고 나서 생각해 보니 참 신기한 일이다.

 

하긴 낯 가리는 내가 모르는 사람을 따라 밥 먹으러 갔다는 것 자체가 별난 일이지. 심지어 돌아오는 길엔 스마트폰으로 노래를 켜고 함께 따라 부르기까지 했다. 대학교 신입생 환영회 이후에 낯선 사람과 노래를 튼 건 이번이 처음이다. 그런데도 불편하거나 어색하지 않았다. 제주 효과였을까?

 

 

<먼 곳에서 벗이 찾아오면 즐겁지 아니한가>

 

 

다음 날 느지막이 일어나 조식을 먹고 선흘리 가는 버스를 타러 나갔다. 혼자 하는 여행이 본격 시작되는 터라 사실 조금 긴장한 채로 버스 정류장에 앉아 있었다. 그런 주제에 옆 사람에게 초조한 마음을 들키기 싫어서, 책을 꺼내 읽는 척했다. 속으론 ‘버스 놓치면 어떻게 하지’, ‘제주에선 정류장을 그냥 지나쳐 가는 경우도 많다던데’ 따위의 생각을 하면서 말이다. 그때 옆자리에 앉아 있던 친구가 말을 걸어 주지 않았다면 엉뚱한 곳으로 가는 버스를 탔을 것이다.

 

그 친구는 구좌에 있는 게스트하우스에서 스텝으로 일하고 있었다. 마침 오늘이 휴일이라 놀러 나왔다고. 나는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났는지, 뻔뻔하게도 “그럼 오늘 안내 좀 해 줘.”라고 했고, 친구는 싫은 내색 하나 없이 흔쾌히 승낙해 줬다. 덕분에 하루 종일 헤매지 않고 편하게 여행할 수 있었다. 여행 내내 “귀인을 만났다.”며 우스갯소리를 했는데, 헤어질 때가 되니 진지하게 고맙고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잘 가! 쉬는 날 일 시켜서 미안해.”
“저도 쉬는 날 놀아 주는 사람 있어서 좋았어요. 또 놀러 와요.”

 

어떻게 보면 다시는 못 볼지도 모르는 사람인 나에게 선뜻 휴일을 내어준 예쁜 마음. 그 고마움은 오래도록 잊지 못할 것이다.

 

 

<역시 술친구 정도는 필요하려나?>

 

 

숙소에 생각보다 늦게 도착해서 저녁은 컵라면과 맥주로 해결했다. 옆에서 게스트들 먹일 아침을 준비하던 주인아저씨가 “이 동네 재미없죠?” 하고 물었다. 나는 의외의 질문에 신이 나서 길게 답했다. “아니요. 너무 좋은데요. 제가 꿈꾸던 곳이에요! 바로 앞에 바다도 있고. 조용하고.”

 

‘할 수만 있다면 여기 내려와서 살고 싶다’는 말은 덧붙이려다 말았다. 사실 조금 외로울 수도 있을 것 같아서. 술친구 정도만 있어도 좋을 텐데…

 

방으로 돌아가는 길에 하늘을 봤는데, 반짝반짝한 것들이 그득했다. 지구가 둥근 것이 눈으로 느껴질 정도로 투명한 하늘에 촘촘히 박힌 별들. 제주에서의 마지막 밤. 여행 내 꾹꾹 참아 왔던 말을 나도 모르게 뱉고야 말았다.

 

“혼자 보긴 아깝다. 친구들이랑 같이 올걸.”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떠나는 날. 프렌치토스트를 굽고 계신 주인아저씨에게 인사를 하니, “아침 안 먹고 가? 먹고 가면 좋을 텐데…”하며 서운한 기색을 보이셨다. 또 놀러 온다고 씩씩하게 대답은 했지만, 사실 공항 가는 내내 아쉬운 마음이 달래지지 않았다.

 

비행기를 기다리며, 삼일 간 제주에서 찍었던 사진을 쭉 보았다. 대부분이 풍경을 담은 사진이었는데, 그 장소에 함께 있었던 사람들 얼굴이 같이 떠올랐다. 내 마음을 헛헛하게 하는 것들도 어쩌면 제주의 아름다운 자연이나 한적함이 아니라, 그때 만났던 사람들일지도 모른다.

 

사람에게 받은 상처는 사람만이 아물게 해 줄 수 있다는 것을 떠나기 전엔 몰랐다. 사람이 싫어 떠난 도피 여행의 결말은 어쩌면 떠나기 전부터 정해져 있었을 지도.

 

 

촌스러워 보일 수도 있겠지만, 공항 기념품점에서 감귤 초콜릿을 샀다. 그간 소홀했던 친구들에게 주려고. 그 초콜릿이 제주에 다녀온 지 2주가 지난 오늘까지 우리 집 냉장고에 있는 게 함정이지만.

 

역시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그래도 오늘은 꼭 미안한 사람들에게 메시지를 보내야지.
“나 제주도 갔다 왔어. 감귤 초콜릿 사 왔는 데 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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