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공항에서 출발한 뒤 기내식을 세 번 먹었다. 비행기에서 내린 지는 2시간쯤 흘렀다. 이곳은 모로코의 카사블랑카 무함마드 5세 국제공항. 밖으로 나가는 줄은 좀처럼 줄어 들지를 않았다. 목덜미가 땀으로 끈적거렸다. 푹 찐 콩에 고수를 얹은 냄새가 공기 중에 섞여 있었다. 목구멍을 긁으면서 발음하는 아랍어는 계속 들어도 낯설었다. 밖으로 나오자 적도의 햇볕이 온몸에 꽂히는 듯했다. 혼자 왔다는 사실이 실감 났다.
100명의 여행자에겐 저마다 여행을 떠날 수 밖에 없는 100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다. 내게도 모로코에 간 이유가 있었다. 첫째는 ‘모로코’라는 이름이 예뻐서. 둘째는 사하라에 가고 싶어서. 셋째는 롤랑 바르트 때문이다. 응? 웬 프랑스 작가가 나를 모로코로 보낸거다. 작가는 『소소한 사건들』이라는 책에서 과거 프랑스의 식민지 시절 모로코 풍경을 포착했고, 그중 한 문단이 내 눈을 잡아끌었다.
“마라케시의 키 작은 남자 초등 교사. ‘당신이 원하는 건 뭐든지 다 할 거예요.’라고 그가 흉금을 터놓고, 두 눈엔 선의와 암묵적 동조의 뜻을 가득 담고서 말한다. 그 말은 ‘나 당신과 잘래요’라는 뜻. 오로지 그 뜻뿐이다.”
마라케시는 어디일까? 바람둥이와 달콤한 거짓말, 자유로운 사랑이 섞여있는 이 도시는?
동방예의지국에서 태어난 내겐 낯선 풍경이 아닐 수 없었다. 그 도시의 분위기와 사람들이 모두 궁금해졌다. 그래, ‘추파(flirting)’의 천국으로 직접 가봐야겠다.
도착하자마자 후회했다. 여독을 씻어줄 환상적인 풍경은 없었다. 식당에선 종업원이 “마드무아젤, 팁은…?”이라고 물었다. 밤길은 위험했고, 호텔에선 체크인을 거부당했다. 택시를 타거나 과일을 사는 데도 흥정이 필요했다. 다행스러운 건 현지 가이드와 친해졌다는 사실이었다. 그의 이름은 ‘사이드’(Said). 나보다 3살이 많은 베르베르 족 남자였다.
모로코에는 아랍인과 베르베르인 그리고 여러 민족이 산다. 베르베르인은 북아프리카의 사막과 산을 집으로 삼아 살던 유목민. 프랑스 축구선수 지네딘 지단이 이 민족 사람이다. 사이드는 조용조용하면서도 농담을 좋아했다. 나와 생김새는 달라도 죽이 잘 맞았다. 모르는게 많은 나를 놀려 먹다가도 “My lady, I will protect you”라고 하니 기분이 좋아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관광 코스가 아닌 현지인의 거리로 나를 데려갔다. 야시장, 카페, 공원, 맥주를 마실 수 있는 클럽까지. 동양 여자사람은 거리에 나뿐이었으나, 그와 함께라면 밤에도 안전한 느낌이었다. 사람들은 ‘아랍’ 하면 IS를 떠올리곤 하지만, 내가 본 사람들은 순박하고 착했다. 느긋하게 민트티를 마시는 남자들과 스카프를 두른 채 웃는 여자들, 반가운 친구를 만날 때마다 뺨에 뽀뽀를 하는 습관. 지금도 그립고 기억에 남는다. 리, 유세프, 무함 마드…. 알게 되는 친구들이 늘어났다.
롤랑 바르트 아저씨의 말에 따르면, 모로코 남자들은 바람둥이임에 분명하다. 하지만 농담을 잘하면서도 나긋한 이 남자는 믿어도 될 것 같았다. 그는 도를 넘는 행동을 하지 않았다. 이렇게 했을 뿐이다. “나는 네가 좋아. 너는 정말 아름다워. 하지만 남자친구가 있다면 어쩔 수 없지.” (‘아름답다’는 말의 마력을 여행하면서 깨우쳤다.)
여행 넷째 날에는 사하라에 갔다. 그는 모래더미의 꼭대기에서 가장 편안해 보였다. 자신은 “사막에 있으면 강해지는 느낌”이라고 했다. 프랑스어와 아랍어에 능통하고 스페인어와 영어를 꽤 잘하는 이 남자. 사막의 주인인데다 힘도 세고, 자기 일을 사랑하며 예의도 바르다. 그의 까무잡잡한 피부와 깊은 눈망울이 섹시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여행 중에 친해진 한국인 여성 K와 셋이서, 사하라의 밤하늘을 보며 별똥별을 찾았다.
여행 7일째. 산 넘고 물 건너 남쪽의 고대도시 마라케시에 도착했다. 마라케시의 밤은 신비로웠다. ‘자마엘프나’ 광장에선 밤마다 포장마차 수백 개가 불을 밝혔다. 코브라는 피리소리에 맞춰 고개를 까닥거렸고, 이야기꾼과 소매치기들이 광장을 누볐다. 사람들은 이탈리아의 로마나 프랑스의 파리를 사랑에 빠지기 좋은 장소라고 말하곤 하지만, 내 생각엔 마라케시야말로 사랑에 빠질 수밖에 없는 곳이다.
최고의 가이드였던 그와 함께 광장을 걸었다. 그는 선량하고 커다란 눈망울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네가 원하는 건 무엇이든 다 할 거야. 너를 여왕으로 만들어줄게. 모로코에 남아.” 아, 롤랑 바르트 아저씨가 뭐라고 했든 간에 그 순간만큼은 머무르고 싶었다. 여기서 빙수 가게를 차려볼까? 하지만 이내 정신을 차렸다. 나 돌아가서 마감해야지! I have to go to work!
서울에 돌아와서도 그리웠다. 집에 돌아와서 인터넷에 ‘모로코’를 검색하기를 수십 번. 외교부 지침에는 모로코 여행에 관해 이렇게 적혀 있었다.
“우연히 알게 된 현지인과 호텔 밖에서 음주할 경우 위험한 상황이 생길 수 있으니 주의하십시오. 여성들에게 친절을 베풀며 접근하는 경우가 많으니 더욱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에이. 내 경우는 달라.
여행 중에 친하게 지냈던 K를 서울에서 만났다. 그녀가 말했다. “그가 계속 추파를 던졌어. 남자친구는 잘 해주느냐? 자기는 더 잘 해줄 수 있다면서. 사람은 참 좋은데 대체 왜 그러지?”
어라.
그때 핸드폰 알림이 울렸다. 그에게서 온 문자였다. “My lady, I miss you.”
프랑스의 현명한 작가와 외교부엔 미안한 일이지만, 그들이 아닌 행복했던 순간을 믿어보기로 했다. 그리고 핸드폰을 열었다.
“Dear, I miss you too.”
Editor 조아라 ahrajo@univ.me
Illustrator 전하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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