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약 빤’ 사람들 참 많다. 일상생활이 가능한지 걱정되는 병맛 콘텐츠도, 번뜩이는 아이디어로 승부하는 창작자들도 많다. 하지만 약은 가늘고 길게 빨아야 제 맛이라고 생각하는 당신이라면, 윤성호 감독을 영접하길 바란다. 크게는 아니지만 ‘피식’ 터졌던 장면은 몇 번을 봐도 질리지가 않고, 우리 동네에 살고 있을 법한 캐릭터들의 요상한 행동은 묘한 카타르시스를 준다. 독립영화부터 웹드라마, 시트콤까지 은근히 다 잘하는 사람. 은근한 말투로 은근하게 웃기는 자신의 작품을 쏙 빼닮은 윤성호 감독과의 1대 1 심층 대화를 공개한다.
윤성호 표 드립 팬입니다. 그 폭발하는 드립력은 언제 키우신 건가요?
독립영화 덕분인 것 같아요. 어렸을 땐 친구들이랑 어울리는 게 힘들었어요. 사실 성격 자체가 고독을 즐기는 사색가 스타일은 아닌데, 엄마가 제가 다니는 학교의 선생님이셔서 나댈 수가 없었어요. 또 책 읽기에 맛을 들였던 때라 애들이 와글와글 떠드는 게 바보같이 느껴졌고요. 원래는 사교적인데 어릴 때 다른 재미에 먼저 맛을 들인 거죠. 저처럼 불완전하게 내성적인 사람들은 자기를 돌아보는 게 아니라 남을 잘 관찰해요. 그러면서 사람들을 재밌게 범주화시키는 시도를 많이 했어요. 셀프 디스도 하면서요. 그러다 연출가가 되면서 입을 다물고 있으면 안 되니까 말을 많이 하게 됐어요. 영화는 오지랖을 떨고 설득을 하지 않으면 만들 수가 없거든요. 또 관객과의 대화를 계속하다 보면 ‘요렇게 말하면 반응이 좋구나’ 알게 되죠. 제가 만드는 게 주로 유쾌한 영상이다 보니 사람들이 제가 어떤 말을 할지 기대하기도 하고요.
특히 정치적 입장이나 부조리한 사회 현상에 유머를 버무려서 던져놓는 게 감독님 장기잖아요.‘이건 내가 봐도 재치 있다!’ 싶은 장면 좀 꼽아주세요.
좋아하는 장면은 <두근두근 시국선언>에서 “사람들이 광명 시장도 모르는데” 했던 장면이요. 지자체 투표는 안하지만 롯데월드 가면 10년 된 회전목마 앞에 줄을 세 겹씩 둘러서 기다리잖아요. 전 감성에 호소하는 걸 싫어해요. 잠깐 벅찰 순 있어도 시간이 지나면 더 남루하거든요. 새벽 술자리를 보는 것 같아요. 하지만 방금 말한 건 팩트잖아요. 누구를 까기보다 우리를 직시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런 아이러니를 유머러스하게 표현했어요.
제가 만들었지만 싫어하는 장면도 있어요. <은하해방전선>에서 정신과 의사가 “친척 중 정신 병력을 가진 사람이 있느냐”고 묻자 “사촌 중에 「조선일보」 기자가 있다”고 했던 거요. 뺄 수 있다면 빼버리고 싶어요. 「조선일보」를 원래 싫어하는 사람들은 박수 치며 볼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의 마음은 1mm도 못 움직이는 장면이잖아요. 첫 상영 때 관객들이 그 장면에서 빵 터지는데 그게 정말 싫었어요. 내가 싫어하는 짓을 내가 했구나, 싶더라고요.
그런데 최근작을 보면 초기에 비해 굉장히 담백해진 것 같아요. 드립보단 서사에 집중하는 느낌이랄까.
예전엔 드립 100개를 모으면 시나리오가 됐거든요? (감회에 젖음) 그런 시절이… 있었죠. 지금은 드립력이 많이 떨어졌어요. 트위터가 나오고 좀 위축된 거 같아요. 잘 치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웃음) 그리고 요즘은 큰 그림이 안그려지는 작품은 사람들이 선택을 잘 안 해요. 공감대가 있고 ‘이게 무슨 이야기구나’ 정도는 알 수 있어야 해요. 콘텐츠가 많은 시대이다 보니 대중에게 친절할 필요가 있죠.
1. <두근두근 시국선언>
아티스트들의 모임을 ‘있어 보이는 사람들끼리 있어 보이게 노는 것’이라 폄하하는 스태프들에 대한 감독님의 분노. 진짜 화난 줄.
주관적인 명대사 “난 성호가 나쁘게 말하면 좀 끌리더라.”
2. <우익청년 윤성호>
한 애국 보수 청년이 ‘빨갱이’들이 득실대는 대한민국의 미래를 걱정하는 내용. 윤성호감독의 드립력과 궤변이 폭발하는 영화. (*반어법 주의)
주관적인 명대사 “전경련도 빨갱이다. 자기들끼리 부를 재분배하지 않나. 그것도 나름대로 사회주의다.”
3. <은하해방전선>
어…. 말 많은 남자가 진짜 소통의 묘미를 깨우쳐가는 영화라고 합시다.
주관적인 명대사 “연애랑 영화는 비슷해. 좋을수록 말이 필요 없지.”
감독님 작품의 재미 포인트는 일상의 깨알 같은 순간에서 나와요. 너무 공감돼서 주인공의 모습에 내가 겹쳐 보일 때도 많아요.
사실 우리의 머리를 아프게 하는 건 현실에 놓인 문제들이잖아요. “아빠가 온 가족을 살해했어요. 어떡하죠?” 이런 문제보단 “아빠가 잔소리가 너무 많아요”가 고민인 경우가 많고, 남자친구가 재벌 3세여서 힘든 게 아니라 무난한 자신을 너무 과신하는 게 힘든 거잖아요. 전 이런 인생의 작은 아이러니가 참 재밌어요. 그래서 캐릭터를 만들 때도 특이한 사람보다는 보편적인 고민에 건강하게 대응하는 모습이 재밌는 사람에 대해 쓰게 돼요. 결국엔 내가 알만 한 사람, 주변에 있을 법한 사람을 묘사하게 되는데… 그래서 배우를 정하지 않으면 시나리오를 못 써요.
그래서 같은 배우들이 여러 작품에 나오는 건가요? 한 배우와 여러 작품을 같이 하면, 감독으로서 좋아하는 그 배우의 얼굴이 있을 것 같은데! 표정 같은 거요.
그런 이유도 있죠. 좋아하는 표정이요? (박)희본 씨는 코믹한 것보다 자기 상황을 버티려는 표정들이 좋아요. 옆에서 말을 무심하게 하거나 어려운 상황을 견뎌야 할 때 ‘버텨보자’ 하는 느낌을 잘 표현하는 것 같아요. 표정이 없는 것 같지만, 밖으로 들키지 않으려고 애쓰는 거죠.
감독님의 페르소나 박혁권 씨는요?
혁권이 형은 다 좋은데… 가끔 형이 피식 웃을 때가 있거든요. 대사가 웃기거나 자기가 하고 있는 모습이 웃겨서. 그런데 전 그게 너무 좋은 거예요. 오히려 NG 장면을 OK 컷으로 많이 쓰게 돼요.
같은 배우들이 자주 나온다는 것 말고도, 마지막에 대부분 몸짓으로 끝난다는 공통점이 있어요. 옛날 <할 수 있는 자가 구하라>에선 다 같이 복싱 흉내를 내고, 2012년 <할 수 있는 자가 구하라>는 함께 춤을 추며 끝나요. <출중한 여자>의 엔딩에선 천우희 씨가 달을 보며 춤을 추고요.
어, 그렇네요? <은하해방전선>에선 마지막에 괴물 소리 지르게 했거든요. 창작하는 사람들은 결국 자기가 했던 걸 또 하게 된대요. 히치콕이 항상 도망 다니는 남자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요. 제가 본 저의 패턴은 항상 주인공이 이별한 다음 이야기가 시작된다는 거예요. 끝이 났으니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것 자체가 작은 아이러니잖아요.
1. <출중한 여자>
잘 나가는 잡지 에디터, 출중한 여자지만 매일이 완벽하진 않다. 천우희의 생활 연기를 볼 수 있다는 자체로 재밌다.
주관적인 명대사 “걘 중딩 베프, 넌 대딩 베프.”
2. <할 수 있는 자가 하라>
웹에 올렸던 2010년 <할 수 있는 자가 구하라>를 원작으로 한 시트콤. 영세 매니지먼트사에서 벌어지는 좌충우돌 우왕좌왕이 다다. 그게 매력이다.
주관적인 명대사 “정의란 초코파이 같은 거야.”
3. <출출한 여자>
평범한 싱글녀의 속을 달래주는 음식 퍼레이드. (* 굴소스 뽐뿌 주의)
주관적인 명 트윗 “외로워서 아무나 만나고 싶기도 하고, 외로워서 아무도 안 만나고 싶은 날”
독립영화, 웹 드라마, 시트콤, 최근엔 공중파 드라마 <프로듀사>까지. 여기저기서 감독님의 이름이 많이 들려요.
의뢰가 들어오면 해요. 전 제 안의 이야기가 그리 많진 않아요. 다만, 의뢰를 받으면 평소에 담아두고 있던 이야기를 접목시켜서 풀어내려고 해요. 내 칼을 들고 돌아다니는 장수가 아니라 누가 “여기 뭐 있어요?” 물으면 “이게 괜찮은데 한번 써볼라우?” 하는 식인 것 같아요.
많은 일들 중에 감독님이 제일 잘하는 장르는 뭐라고 생각하세요?
여러 사람이 등장하는 앙상블 코미디! 그런 걸 하면 지치지 않고 신나요. 물론 놀 때가 제일 좋긴 한데.(웃음) 최근에는 웹 드라마 <썸남썸녀>를 찍을 때 제일 재밌었어요. 하루에 16시간씩 찍었는데 진짜 힘들더라고요. 1호 커플 찍고 나니까 2호 커플 남아있고. 찍어도 찍어도 커플들이 계속 남아있어…. 그래도 좋은 신인들을 많이 만나서인지 제일 재밌었던 것 같아요.
콘텐츠도 많고 창작자의 벽이 없는 시대에요. ‘반짝’ 하고 사라지는 콘텐츠와 크리에이터들도 그만큼 많고요. 그 사이에서 지금까지 롱런할 수 있는 비결이 뭐예요?
제가 요새 영화를 안 했잖아요. 영화 하는 친구들이 절 모르더라고요. 오히려 PD 지망생들이 많이 알아요. ‘웹 드라마의 선구자’ 이런 거로.(쑥스)
앞으로 영화를 좀 더 열심히 해야겠단 생각이 드세요?
아뇨, 확실히 영화과랑은 나랑 안 맞는구나 싶은데요.(웃음) 근데 질문이 이게 아니었죠?
롱런의 비결을 물었어요.
롱런이라고 볼 순 없죠. 크게 히트한 것도 없으니까. 그래도 먹고 살면서 뭔가를 조금씩 할 수 있었던 건, 연남동 골목 가게 같은 이유 아닐까요? 문전성시를 이루진 않지만, 단골이 있으니까 유지되는 거죠. 도와주는 사람도 있고. 웹 드라마를 할 때도 출중한 감독들과 협업할 수 있었거든요. 다른 사람들의 재능과 도움이 나를 향해 있다는 건 창작자로서 정말 큰 복이죠.
1. <썸남썸녀>
결혼하기 위해 ‘썸 타는 마을’에 모인 남녀가 인연을 찾는 이야기. 웃음도 터지고 케미도 빵빵 터짐.
주관적인 명대사 아씨, 병신 같은데 멋있어.
2. <오늘 영화>
‘영화’를 주제로 한 세 가지 이야기의 옴니버스 영화. 윤성호 감독의 <백역사>는 나이트클럽에서 만난 남녀가 영화를 계기로 연애를 시작하는 순간을 귀엽고 담백하게 그려냈다.
주관적인 명대사 “내가 생각해봤는데, 바다가 보고 싶다고 했어요. 바다 나오는 영화가 아니라!”
Editor 김슬 dew@univ.me
Art 위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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