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으로의 한국 역시 ‘설계자들’의 손에 달려 있다.

앞으로의 한국 역시 ‘설계자들’의 손에 달려 있다.

 

최근 내가 발행인 및 편집인으로 복무하는 잡지 「월간잉여」의 독자 모임을 가졌다. 모임 참석자 중 한 명은 20대 초반의 대학생이었는데, 그와 내가 발견한 현실의 문제점은 중첩됐다. 극심한 경쟁, 성긴 사회안전망, 질 낮은 일자리, 턱없이 낮은 최저임금, 말도 안 되는 주거비용. 이런 척박한 삶 속에서 싹트는 구성원끼리의 적대와 혐오는 지옥 같은 아수라장을 구현하고, 잔존하는 봉건주의·가부장주의는 조선시대를 원망하게 만든다는 것, 그래서 한국사회는 헬(hell)조선이라 불린다는 것.

 

생각이 갈린 것은 투표에 대한 관점에서다. 그는 태어나서 단 한 번도 투표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나는 우리가 공유한 현실의 문제점을 개선하기 위해 기득권의 이익보다는 보편적인 국민의 행복을 위해 복무하는 대리인이 선출돼야 하고, 그 과정에 개입하는 것이 투표이며, 그것이야말로 ‘헬조선’이 ‘탈지옥’이 될 수 있는 유력한 방법 중 하나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나는 그로부터 꼰대라는 소리를 듣게 되는데….

 

상대의 입장을 고려하지 않고, 강 건너 불 구경하듯 관조하며 어디에나 통용되는 ‘옳은말’을 지루하게 늘어놓는 기성세대를 꼰대라고 생각해왔다. 하지만 나와 그는 같은 기반 위에서 함께 고통 받는 입장이다. 공유하는 고통이 있고, 그 고통에서 ‘함께’ 벗어나는 방법 중 하나로 꼽은 것이 투표였는데, 그로서는 흥미 없고 지루하게 들렸나보다. 어쩌면 강요받는 기분이 들어 불편했을 수도 있겠다. 그러나 비슷한 처지의 사람이(어차피 그나 나나 모두 잉여…) 근거를 갖춰 설득하는 말에 대해서는 마음을 열고 들어볼 필요도 있지 않을까? 나이 차이도 그렇게 많이 안 나는데… 나 아직 만으로 서른 안됐는데….

 

뭘 해도 세상은 바뀌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염세적인 사람에게, 세상에 개입하는 어떤 행위도 쓸모없게 보일 수 있다. 하지만 나는 여성에게 참정권이 없는, 미사일과 총기를 이용한 전쟁이 일상화된, 그리고 초고속 인터넷이 깔리지 않은(…) 시공간 보다는 2015년의 한국이 낫다고 본다. 이것을 역사의 ‘진보’라 말한다면, 그것은 주어진 세상에 만족하지 않고 더 나은 세상을 상상하며 목소리를 낸 사람들 덕분이다.

 

목소리를 내는 방법은 여러 가지다. SNS에서 자기가 발견한 세상의 진실을 외치는 것도, 술자리에서 사람들과 더 나은 세상의 모습에 대해 토론하는 것도 방법이다. 문화 개선 운동에 참여하는 것과 라이프스타일을 통한 실천도 중요하다. 그리고 이 모든 활동은 몇 년에 한 번씩 돌아오는 선거에 참여하는 것과 병행할 수 있다. 몇 년에 한 번이다. 한 시간도 안걸린다. 그렇게 선출된 권력에 의해 시스템이 바뀌고 시스템에 의해 삶은 달라진다.

 

투표의 의욕을 꺾는 요소가 많다는 것은 알고 있다. 현재의 소선거구제는 ‘사표(死票)’를 양산하며, 지역 기반의 거대 양당이 의회를 장악하도록 만들고, 다양한 계층의 목소리가 제대로 반영되지 못하게 한다. 비례대표제를 확대하는 것이 대안으로 제시된 지 오래다.

 

우리나라는 국회의원 의석 300석 중 지역구가 264석, 비례대표 의석이 54석으로 비례대표가 전체의 18% 정도다. 비례대표제는 정당득표율에 비례해 당선자 수를 결정하는 제도로, 비례대표의 확대는 다양한 집단을 대표할 수 있는 소수 정당들이 의회에서 목소리를 내는 것을 돕는다. 정당들이 지역 구도가 아닌 정책 기반으로 대결·연정하도록 만드는 유력한 방법이다. 시스템을 이렇게 바꿀 수 있는 건 투표를 통해 선출된 의원들이다. 이건 뭐 뫼비우스의 띠도 아니고….

 

IMF 이후 세상이 계속 나빠지고 있다는 감각 속에 살았다. 2008년, 정말 많은 사람들이 모인 집회가 있었지만 세상은 원하는 방향으로 바뀌지 않았다. 우리에게는 승리의 경험이 부재하다. 그것 역시 투표 의욕을 꺾는 요인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보드게임을 출시하기로 결심했다. 무언가를 논리로 설득하려는 게 ‘노잼’이고 꼰대 같다면(마음에 담아두었다…) ‘예스잼’의 방식으로 시스템을 바꾸는 경험을 자연스레 체득하게끔 하는 것은 어떨까?

 

보드게임의 가제는 ‘헬워크(hell walk)’다. ‘특권 이동(privilege walk)’이라는 퍼포먼스에서 모티브를 얻었다. ‘특권 이동’은 태어나면서 결정된 조건이 삶의 격차를 벌린다는 진실을 시각화하는 퍼포먼스다. 다양한 인종 계급의 사람들을 한줄로 세운 뒤, 질문의 답변에 따라 이동시킨다. “성범죄에 대한 두려움 없이 여행을 할 수 있다면 한 걸음 앞으로 나오시오”, “대학등록금을 내는데 어려움을 겪었다면 뒤로 한 걸음 물러서시오”, “학벌이나 성별로 채용에 불이익을 겪었다면 뒤로 두 걸음 물러서시오” 등의 지령으로 구성된다. 예전에 진행된 특권 이동의 결과, 맨 앞의 둘은 모두 백인 남성이었고 가장 뒤처진 이는 흑인 동성애자 여성이었다. 무엇이 특권을 만드는지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헬워크(hell walk)’의 이동 방식은 ‘특권 이동’과 같다, 참여자 모두는 스스로가 ‘말’이 된다. 헬워크는 여기에 ‘연대’의 개념을 도입할 예정이다. 윷놀이에 참여한 말은 다른 게임 참여자의 말과 같은 칸에 위치할 경우 한쪽이 제거된다. ‘헬워크’에서는 오히려 같은 칸에 위치하는 순간 기회를 얻는다. ‘투표’ 이벤트다. 같은 칸에 위치한 사람들이 많을수록 게임의 규칙을 유리하게 바꿀 수 있게 만들것이다. 즉, 쪽수가 많을수록 자신들에게 유리한 기반을 닦을 수 있는 것이고, 그들은 중간계급의 사람들이 될 것이며, 그들의 투표는 계급 투표의 성격을 띨 것이다. 이로써 게임의 끝에 우승자와 꼴찌의 간극이 크지 않기를 희망한다.

 

<더 지니어스>를 흥미롭게 본 것 역시 게임 개발 욕구에 불을 지폈다. 스스로 게임의 세계관을 구축하면서, <더 지니어스>를 시청하며 느꼈던 지점을 재확인했다. 게임 설계자의 의도에 따라 우승자가 달라질 수 있다는 것. 시즌 1에서 창의적인 솔로 플레이어가 우승했고, 시즌 2에서는 정치질을 가장 잘 하는 협잡꾼이 우승했으며, 시즌 3에서는 개인 기량과 리더십을 갖춘 공리주의자가 우승했다. 여기에는 제작진의 의도가 어느 정도 반영됐다고 생각한다.

 

마찬가지로 앞으로의 한국 역시 ‘설계자들’의 손에 달려 있다. 태어나면서 결정지어진 조건 때문에 차별과 억압에 노출되는 일이 없는 세상을 꿈꾼다. 기술의 진보로 획득된 이윤을 인류 구성원이 공평하게 나누는 체계를 꿈꾼다. 삶의 불안 요소를 어느 정도 책임져주는 공동체를 희망한다. 이런 세계를 설계하는 ‘제작진’을 선출하는 것은 우리 손에 달려있다. 2016년 총선과 2017년 대선이 한국사에서 중요한 분기점이 되길 바란다. 그렇기에 지금부터 미리 떡밥을 뿌려보는 것이다.

 

 

 

Freelancer 최서윤 「월간잉여」 편집장 monthlyingyeo@tistory.com

Illustrator 전하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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