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아들 편애, 오빠의 언어폭력, 아무렇지 않게 희생을 강요하는 가족들. 차별이 차별인 줄도 몰랐던 시절, 상처 받은 마음을 부여잡고 일기를 쓰던 소녀는 이제 만화를 그린다. 같은 모양의 아픔을 안고 사는 이들에게 너만 그런 게 아니라고 위로를 건넨다. 가족을 원망하고 욕하는 대신, 난 애물단지라고 자학하는 대신 유행가의 가사를 빌려 스스로 말해주길 택한다. “단지 널 사랑해.”
1화에서 단지는 말합니다. “따져 묻고 싶었지만, 난 소심하니까 못 할 거다. 그래서 이 방법을 택했다.” 31년간 참아왔던 이야기를 웹툰으로 그리게 된 계기가 있나요?
원래 준비하던 작품이 있었어요. 그때 편집장님이 6개월 동안 제 작품을 반려시키면서 물으셨어요. “이게 정말 네가 하고 싶은 얘기니?” 고민하던 즈음에 아버지가 입원을 하셨어요.
전 그때 독립을 하고 있어서 마음의 안정을 찾았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아버지의 입원을 계기로 엄마가 저를 심하게 하대하니까 ‘내가 완전히 독립한 게 아니구나’ 싶더라고요.
이 문제에 대해 한 번은 얘기해야겠다는 생각과 작품에 대한 고민이 섞여들면서 만화로 그리게 된 거죠. 원래 이렇게 날것으로 그리고 싶은 마음은 없었는데, 가족들에게 내가 겪었던 일들 기억하느냐고 묻고 싶었어요.
처음엔 가족들에게 보여주고 싶단 의도로 그려진 거네요.
네, 그런데 연재 중간에 가족들이 보게 된다면 작품을 그리는 데 영향을 많이 받을 것 같아서요. 아직은 시기가 아니라고 생각해요.
만화 제목도 ‘단지’, 작가 이름도 ‘단지’, 주인공의 이름도 ‘단지’. 온몸으로 본인의 이야기임을 드러내고 있는데 그리기 부담스럽진 않으셨어요?
‘단지’라는 닉네임은 이번에 바꾼 거예요. 가명이죠. 나름대로 숨기고 시작했는데 친한 친구들은 알아보더라고요. 알아보는 사람들에겐 굳이 숨기지 않고요. 그래도 자전적인 얘기니까 조심스럽긴 하죠. 이렇게 여러 사람 입에 오르내릴 줄도 몰랐고, 내용 자체가 가벼운 이야기가 아니라서….
만화 속 단지는 일기장을 펼치며 유년의 이야기를 시작해요. 오랫동안 일기를 쓰신 것 같은데, 어찌 보면 외면하고 싶었을 일들을 모두 기록했던 이유는 뭘까요?
마음을 터놓고 대화할 상대가 없었어요. 친한 친구들이 있긴 했지만, 사실 우리들 수준에서 오가는 대화가 큰 감동을 주거나 위로가 되진 않잖아요. 일기에다 분풀이를 많이 했죠. 지금 다시 봐도 그때의 분노가 고스란히 전해져요. 그래도 지금은 작품 하느라 많이 읽어서 처음과 다르게 감정이 많이 무뎌졌어요.
독자들이 특히 싫어하는 캐릭터가 ‘오빠’예요. 독선적인 가부장제를 그대로 체화하고 앞으로도 답습해나갈 존재로 보이거든요. 하지만 더 기가 막힌 건 가부장제를 이어나갈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사람들이 같은 여성이란 거죠. <단지>의 ‘엄마’처럼요.
저도 잘 모르겠어요. 엄마가 그런 환경에서 자라서인지….
시골의 대가족에서 자라 본인이 겪었던 일들을 대물림하는건가 싶어요.
처음엔 나한테 왜 그러느냐고 어필했는데 전혀 안 통했어요. 의견을 냈을 때 받아들여야 상호적인 소통이 되는데 그렇지 않으니까 상처만 받더라고요. 무시 받는 게 아파서 그냥 피하게 됐어요.
한쪽에서 <단지>를 보며 화를 낸다면, 한쪽에선 만화를 보며 울어요. 본인의 기억이 떠올라서죠. <단지>의 어떤 점이 같은 경험을 한 이들에게 위안이 되는 걸까요?
저는 그때 미즈넷에서 저랑 비슷한 사연을 많이 찾아봤어요. ‘나만 그런 게 아니구나’라는 생각 자체가 큰 위안이 됐거든요. 그분들이 느끼는 공감도 그런 게 아닐까요?
페이스북 페이지 ‘단지 널 사랑해’에는 아픈 사연을 털어놓는 독자들이 많아요. 공감 이상의 감정을 느낄 것 같은데….
작품이 인기가 있는 건 작가로서 고마운 일이지만, 제 이야기에 공감한다는 건 그만큼 마음 아픈 사연을 가진 사람들이 많다는 거잖아요. 기쁘면서도 씁쓸하죠.
<단지>가 많은 화제가 되면서 다양한 반응이 나오고 있는데요. 반대로 ‘남자라서 희생을 강요받고 차별 받았다’는 의견도 있더라고요.
순수하게 제 얘기다보니 여자라는 코드가 들어가고 둘째의 입장이 반영됐어요. 남녀 차별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그냥 ‘차별’에 대해 말하고 싶었어요.
단지가 남동생과의 회상 씬 이후 “상처 받은 건 나뿐이 아니었다” 되뇌는 장면이 인상적이었어요. 오랫동안 뭔가에 상처 받은 사람이 ‘나 말고 얘도 힘들었겠다’ 인정하는 게 참 힘든 일이잖아요.
어릴 때부터 동생에겐 두 가지 마음이 공존했어요. 친하게 지내지 못한 미안함과 ‘네 뒤에 있는 엄마가 싫다’는 마음. 그런데 생각해보면 동생도 엄마한테 시달림을 많이 당했어요, 저보단 덜하지만. 한집에서 같이 살 땐 눈에 잘 안 띄었는데 나와서 보니까 확실히 느껴지더라고요.
한국 사회에서 가족은 미워해서도, 치부를 드러내서도 안 되는 존재로 여겨져요. 누구에게 말도 못 하고 끙끙 앓고 있을 이 세상의 단지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을 것 같아요.
가끔 “<단지>를 보고 우리 집이 평범하지 않단 걸 알았어요” 라고 보내오는 친구들이 있어요. 저도 어릴 땐 몰랐거든요. 힘들긴 한데 뭐가 잘못됐는지. 사회생활을 시작하고 시야가 넓어지면서 보이더라고요. 우리 집이 잘못된 거구나. 내가 그때 힘든 게 당연했구나.
만약 그때 그 심정을 그대로 받아 들이고 내 감정이 뭔지 인지했다면, 좀 덜 힘들지 않았을까 싶어요. 자기 마음을 무시하지 말았으면 좋겠어요. 거기서부터가 출발인 것 같아요.
Editor 김슬 dew@univ.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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