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렸어요~ 때려야죠! 아아아아~!” 교태로운 샤우팅으로 그라운드의 열기를 전해주는 이 남자. 좋아하는 일을 잘하기까지 하는 정말 부러운 사람이다. 중계가 없는 날, 목동 SBS 사옥에서 박문성 위원을 만나 축구와 인생에 대해 물었다. 13년차 베테랑 해설위원답게 논리정연하게 답하는 그의 말은 버릴 게 하나도 없었다. 이것은 축구를 전혀 모르는 당신(a.k.a 축알못)이 읽더라도 충분히 가치 있을 인터뷰.
매번 선수들을 인터뷰하다가, 이렇게 인터뷰이가 된 소감이 어떤가?
사실 인터뷰를 당하는 입장보단, 하는 게 훨씬 편하다. 인터뷰이는 민낯을 보여줘야 하잖아. 왠지 모르게 부끄럽다.
이왕 보여줄 민낯 확실하게 보여주길 바란다. 대중이 아는 당신의 모든 커리어는 ‘축구’와 관련돼 있다. 일을 하기 전 학생 때는 어떤 사람이었나?
고등학교 때는 가수를 꿈꿨고, 운동을 즐기긴 했지만 축구를 마니악한수준으로 좋아하진 않았다. 그러다 점수 맞춰 대학에 들어가고 내가 무엇을 하고 살 것인가 고민하며 살기보단,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자의 반 타의 반으로 하는 평범한 청춘의 삶을 살았지.
축구 전문지 「베스트일레븐」에서 기자 생활을 하며 커리어를 시작했다. 당시만 해도 생소한 ‘축구 기자’를 첫 직업으로 선택한 이유가 궁금하다.
4학년이 되고 뭐 해 먹고살지 고민을 하다가, 문득 ‘기자가 되면 괜찮을 것 같아’란 생각이 들었다. 그때부터 기자 선배들을 찾아다녔다. 그 분들이 공통적으로 했던 말이 “시대가 변하고 있다, 그냥 기자 말고 앞에 ○○이 붙는 기자의 시대가 올 것이다”였다. 확실한 자기 카테고리가 있는 전문가의 시대를 예측했던 거지.
그 후 기자 아카데미에 등록해서 공부를 하고 있는데, 하루는 학원으로 전화가 한 통 왔다. 「베스트일레븐」에서 기자를 뽑는다고 학생을 한 명 추천해달라는데 원장님이 나를 부르셨다. 지금 당장 면접 보러 가라고 하시더라고. 근데 내가 그날 반바지에 슬리퍼를 신고 있었단 말이야. 전화해서 내가 옷을 이렇게 입고 있어서 오늘은 못 가겠다, 라고 하니까 “우리는 당신과 같은인재를 원한다. 슬리퍼와 반바지를 입고 세상을 활보할 수 있는 자유로운 영혼을!”이라고 하더군.(웃음) 그래서 그 길로 면접 보고 바로 출근하게 된 거다.
지금 하고 있는 해설은 기자 생활을 하다 본인이 강력하게 희망해서 하게 된 건가?
지금은 ‘해설위원’이라고 하면 하나의 직업군처럼 느껴지지만, 예전엔 축구를 했거나 잘 아는 사람이 방송이 잡히면 단타로 하는 개념이었다. 지금처럼 ‘내가 이 분야에 도전해봐야지!’라고 생각할 수 있는 카테고리가 아니었단 거지.
근데 운이 좋았던 게 2002 월드컵이 열리면서 축구 중계나 축구를 설명할 수 있는 사람에 대한 수요가 급속도로 증가했다. 때마침 내가 축구 잡지에서 글을 쓰고 있으니까, 방송국에서 섭외 연락이 왔다. 해설을 한번 해보면 어떻겠느냐고. 글도 좋지만 말로도 축구를 얘기하면 내가 하는 일에 더 깊이가 생길거란 확신이 들었다. 그렇게 해서 해설에 발을 내디디게 된 거다.
방송을 오랫동안 하면서 알게 된 ‘해설(말)의 맛’이 분명 있을 것 같다.
글이 느리지만 울림이 강하다고 한다면, 말은 굉장히 빠르다. 말을 내뱉었을 때 파급력도 강하고. 그래서 무섭고 조심스럽다. 주워 담을 수 가 없잖아. 글은 썼다가 아니다 싶으면 삭제 버튼을 누르면 되지만 말은 하고 나면 지울 수가 없다. 그래서 무섭기도 한데 또 그만큼의 재미도 있다.
말로 상황을 전달해야 하는 만큼 전달력도 중요하다. 발음, 발성 같은 아나운서적인 역량은 따로 공부를 하는지?
볼펜 물고 발음 연습하는, 뭐 그런 걸 물어보는 건가? 한 번도 해본 적 없다. 누군가를 설득하거나 대화할 때 중요한 건 기술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사랑해”라는 말이 꼭 발성이 좋고 똑 부러지게 표준어를 써야 감정이 전달되는 건 아니지 않나. 중요한 건 진심이지. 해설도 마찬가지다. 상황 자체에 대한 이해, 내가 이것을 충분히 즐기고 있느냐, 내가 이 내용을 완전히 내 것으로 만들어서 내뱉고 있느냐. 이게 제일 중요한 거다. 말은 기술이 아니다. 마음이다.
당신은 좋아하는 일을 직업으로 삼은 사람이다. 근데 이런 얘기가 있다. “좋아하는 일을 직업으로 삼으면 즐겁지 않게 된다.취미로 남겨둬야 인생이 행복해진다.”
동의하지 않는다. 이 사회가 그런 이야기를 마치 정설처럼 이야기하는 건 좋아하는 일을 먹고사는 문제와 일치시키는 사람이 별로 없기 때문일 것이다. 아무리 좋아해도 그것을 일로 하다보면 지겹기도 하고 힘들기도 하겠지. 근데 한번 생각을 해보자. 내가 싫어하는 일을 억지로 하는 것보단,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게 백배 더 행복하지 않을까? 이건 초등학생도 이해할 수 있는 쉬운 말이다.
「대학내일」 대표님이 자주 던지시는 질문이다. 좋아하는 것과, 잘하는 것의 차이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좋아하는 건 ‘에너지’이다. 내가 무엇을 할 수 있게 만드는 에너지. 근데 좋아한다는 것 자체가 능력이 되거나 구체적인 일자리를 보장하진 않는다. 이 에너지를 동력 삼아 ‘실제적인 일’로 만들어낸 게 잘하는 것이다. 근데 문제는 사람들이 자기가 잘하는 것에 대해선 크게 고민하지 않는다. 막연히 좋아하는 것만 좇으려 한다. 아까도 얘기했지만 좋아하는 건 움직일 수 있게 만드는 에너지일 뿐이다.
내가 축구를 좋아한다는 사실만으로 축구 해설을 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축구를 좋아하고 그것을 업으로 삼고 싶다면 실제 액션을 취해야지. 축구기자든, 심판이든, 지도자든, 선수든 준비를 해서 직접 부딪쳐봐야 한다. 유의미한 결과물이 나온다면 그게 바로 잘하는 것이다.
해설계에서 흔치 않은 ‘비 선수 출신’임에도 많은 이들에게 사랑 받을 수 있는 비결은 뭐라고 생각하나?
선수 경험이 있다는 건 해설을 하는 데 있어 아주 좋은 경험적 자산이다. 하지만 그게 절대적인 필수 요소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사실 ‘비선출’이라는 말 자체가 우리 사회가 갖고 있는 선과 줄을 긋는-어느대학, 어느 지역 출신인지 따지는-문화가 은연중에 녹아 있는 것이다.실력만 있다면 크게 문제될 건 없다고 본다. 다만 내가 선수로서의 경험적 자산이 없기 때문에 더 노력해야 하는 건 사실이다. 공부도 많이 하고 선수들 만나서 얘기도 듣고 실제로 축구도 자주 해야지. 내가 선수 경험이 없다는 건 불편한 것일 뿐이지, 이 일을 하는 데 있어 불가능한 요소라고는 생각해본 적은 없다.
얼마 전 손흥민 선수가 득점한 경기를 영국 현지에서 중계하지 않았나. 골 넣었을 당시의 느낌이 궁금하다.
골은 내가 안 넣고 (손)흥민이가 넣었는데….(웃음)
아… 내 말은 골이 터졌을 때의 벅찬 감동을 물은 거다.
월드컵 현지 중계도 3번이나 갔었고, 다른 큰 경기들도 많이 해봤지만 이번엔 정말 특별했다. 축구 종가 영국 한가운데에서 우리 선수가 골을 넣었다는 자체로 기쁘기도 했지만 그다음이 더 감동적이었다. 주위를 보니 1만 명이 넘는 관중이 우리 중계진을 보고 기립해서 박수를 치고 있더라고. 그 광경 자체가 굉장히 소름 끼쳤다. 살면서 언제 외국인들한테 이런 박수를 받아보겠는가. 물론 중계진한테 친 박수가 아니라, 한국과 손흥민에 대한 리스펙트를 우리에게 보낸 것이겠지만 현장에서 받은 감동은 엄청났다. 그날 경기에 못 나간 (이)청용이도 그 장면을 보고 소름이 쫙 돋았다고 하더라.
이번엔 안티 팬 관련 질문을 해보겠다. 포어체킹, 조깅백, 솔로드리블 등. 존재하지 않는 말을 자주 쓴다는 이유로 많은 댓글러들이 당신을 저격한다. 이 점에 대해선 억울한 부분이 없는지?
내가 1년에 150경기 정도 중계를 한다. 그러다보니 같은 상황을 두고도 새로운 표현을 쓰고 싶은 마음이 들 수 밖에 없다. 그래서 가끔 그런 용어를 사용하는 건데, 결론부터 말하자면 다 실제로 있는 축구 용어들이다. 일반 팬들은 잘 몰라도 현장에서는 너무나 많이 사용하는 말들이다. BBC 중계만 봐도 ‘조깅백’이란 말이 자주 나온다. 근데 팬들 입장에선 본인이 잘 모르면, 들어본 적이 없으면, 엉터리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 물론 중계를 할 때 가장 좋은 건 우리말로 쉽게 풀어서 말하는 것이다. 하지만 가끔씩 새롭게 말하고 싶어 저런 표현을 쓰는 거지. 방송인데 내가 설마 없는 말을 지어서 하겠나?(웃음)
평소 본인 칼럼의 댓글이나 인터넷 커뮤니티 여론은 체크하는가?
신경 쓰면 한도 끝도 없을 것 같아 아예 안 본다. 박지성 선수가 이런 얘기를 한 적이 있다. 선수가 보여줘야 하는 곳은 경기장이고, 보여줘야 할 것은 축구 실력이라고. 마찬가지다. 어떤 댓글에 대꾸해 글이나 말로 상대해서는 이길 수 없을뿐더러 이길 필요도 없다. 기자든, 해설가든, 캐스터든, 선수든 대중의 피드백을 받는 직업이라면 자신의 영역에서 그 일을 잘하는 게 유일한 정답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직업이든 일을 잘하고 싶다면 계속해서 공부해야 한다. 해설위원이라면 그 정도가 더 심할 것 같은데. 구체적으로 ‘어떻게’ 공부하는지 궁금하다.
당연한 얘기겠지만 우선 축구를 많이 봐야지. BBC나 스카이스포츠 같은 외국 분석 프로그램이 정말 좋다. 그런 걸 보며 다양한 시각을 공부한다. 선수들 만나서 살아 있는 얘기를 듣는 것도 정말 중요하다. 토트넘이랑 팰리스 경기 끝나고 (박)지성이랑 밥 먹는데 “아씨~ 그걸 왜 그렇게 얘기했어!?” 이러더라고. 나는 “내가 뭘~!” 이런 식으로 대꾸하며 티격태격 댔지.(웃음) 이런 얘기야말로 정말 살아 있는 현장의 얘기이다. 이론을 읽고, 영상을 보고, 선수들의 얘기를 듣는 것. 이 세 가지가 전부 중요하다.
만약 다시 태어나서 선수로 살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어떤 선수로 살아보고 싶은가? 박문성의 다·태·○은?(다시 태어난다면 ○○)
박지성. 인성, 실력, 팀을 만들어가는 능력. 내가 실제로 봤던 국내 선수 중 최고다. 지금 우리가 프리미어리그를 안방에서 편하게 보면서 “맨유가, 첼시가, 맨시티가, 아스날이”라며 친숙하게 느끼지 않나. 이런 문화를 만든 사람이 누구인가. 박지성이다. 누가 길을 만들어 놓은 다음에 그 뒤를 따라가는 건 쉽다. 처음으로 길을 닦는 게 어려운 거지. 박지성은 그 길을 개척한 선수이다.
철학적인 질문을 하나 던지겠다. 당신이 생각하는 축구와 인생의 공통점은 무엇인가?
이기고 지는 게 뚜렷하다는 것. 물론 무승부가 있지만 승부를 위한 과정일 뿐이다. 시즌이 끝나면 우승하는 팀과 강등팀이 생기지 않나. 그래서 어린 친구한테 축구를 가르칠 때 가장 신경 써야 할 부분이 ‘잘 지는 법’을 말해주는 거다. 패배를 인정하지 않으면 원망하고 탓하며 부정하게 된다. 그러면서 세상과 나를 고립시키게 되지.
내가 싫어하는 말이 하나 있다. ‘최선을 다 하면 모든 게 이뤄질 거야’. 거짓말이다.그럼 세상 모든 사람이 호날두, 메시처럼 됐겠지. 노력하는 건 정말 중요하지만, 노력해도 안 되는 일은 분명히 있다. 내가 좋아하는 일을 시도하는 것도 용기이지만, 실패했을 때 꿈을 접는 것도 용기이다. 그래야 다시 일어날 수 있다. ‘이길 수도 있지만 질 수도 있다.’ 이 말을 가슴에 담고 사는 게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언제까지 축구 관련 일을 하며 살고 싶은가?
당분간은 축구 생각밖에 없다. 나중에 나이 들면 시골 내려가서 집 짓고 닭 기르며 살고 싶은 꿈은 있다. 내가 딸만 셋인데, 나중에 사위나 남자친구 데리고 오면 닭 삶아서 같이 먹어야지. 정말 즐거울 것 같다!
Editor 이민석 min@univ.me
Photographer 배승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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