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까지 퀴리부인, 장영실, 미켈란젤로가 위인전집을 하드캐리 해야 하는가. 위대한 사람들은 그 후에도, 지금도 끊임없이 태어나고 있다.
그 방증인듯, 유독 올해 전기영화들이 많이 쏟아져 나왔다. 앞으로 100년 후, 위인의 세대 교체가 일어나는 순간 이름들을 모아왔다.
1. 사스가 디올, 그리고 보그!
이브 생 로랑은 1953년부터 당대 패션계 최고 거장인 디올의 조수로 일하기 시작했다. 그는 일찌감치 후계자로 지목돼, 1957년 디올이 사망하자 21살의 어린 나이에 ‘크리스찬 디올’의 수석 디자이너가 된다. 이듬해 공개한 첫 컬렉션, 트라페즈 룩을 본 파리의 시민들은 이브가 파리 패션계를 구원했다며 칭송했다. 이브는 프랑스의 식민지국 알제리에서 태어났으며 성적 성향까지 소수자였다. 그러나 그는 디올에 입성해 자신의 인생을 바꿨다
2. 평생 남남이 되지 않을 남남
첫 컬렉션이 끝나고, 이브는 파티에서 사업가 삐에르 베르제를 만나 사랑에 빠진다. 하지만 이브는 곧 프랑스에 징집돼 알제리 독립 내전에 참전하게 되고, 그로 인해 디올의 수석 디자이너 자리를 박탈당한다. 심지어 돌팔이 군의관에 의해 신경 안정제 중독 증세까지 보인다. 우울증을 호소하던 이브는 삐에르의 응원에 용기를 ‘이브 생 로랑(YSL)’을 차렸다. 삐에르는 YSL의 경영을 맡았고, 이브가 디자인에만 집중할 수 있게 만들어준 최고의 파트너였다.
3. 바지 입혀줘서 고마워요
전쟁이 끝나고 빈곤이 해결된 1960년대. 여성들은 자신의 개성을 살린 스트릿 패션을 원했다. 이런 흐름 속에서 이브는 최초로 여성 정장에 바지를 입히기로 했다.
영화 <생 로랑>의 말미에서 그는 “난 언제나 우아함과 아름다움을 위해 싸웠다.”라고 말한다. 그가 지키고자 했던 것은 전통적인 아름다움이 아니었다. 그것을 벗겨낸 여성 자체의 우아함과 아름다움이었다. 이 싸움 속에서 그의 무기는 ‘파격’이었다.
4. 이브의 영원한 아담
YSL 역시 1972년이 되자 다른 브랜드에게 추격을 당하게 된다. 심리적 압박에 시달린 이브는 약물을 과잉 복용하며 스스로를 파괴한다. 하지만 이브는 삐에르 덕에 정신을 차리고, 혼신의 힘을 다 한 컬렉션으로 화려하게 재기한다.
그가 밑바닥을 치던 순간마다 손을 내밀었던 소울메이트가 없었다면 우리가 아는 ‘이브 생 로랑’은 없었을 지도 모른다. 그런 그에게 이브는 이렇게 화답했다. “가장 좋아하는 시인이 누구죠?” “피에르 베르제.”
* 생 로랑
감독 : 베르트랑 보넬로
개봉 : 2015.4
Reporter 공태웅 dnlriver@naver.com
1. 노블하지 못했던 노블
크리스티나 노블의 삶은 ‘노블(고귀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녀는 어머니를 일찍 여의고, 알코올중독자인 아버지 아래에서 자랐다. 가톨릭 재단의 한 고아원에 들어간 노블은 갑갑한 생활을 견디지 못하고 탈출을 결심한다. 그녀는 손쉽게 성범죄의 표적이 됐고 강간범의 아이를 갖게 된다. 그리고 다시 돌아간 고아원에서는 노블의 동의 없이 그녀의 아들을 다른 가정에 입양 시켜 버린다.
2. 가슴이 시키는 일
어느 날, 노블의 꿈에 모래 먼지를 만들며 놀고 있는 두 명의 여자 아이가 등장한다. 꿈속 아이들이 뛰놀던 곳은 전쟁으로 폐허가 된 베트남이었다. 베트남으로 간 그녀는 꿈에 보았던 소녀들과 비슷한 아이들을 마주한다. 노블은 레스토랑에 가서 아이들에게 디저트를 사 먹였고, 경찰은 더러운 아이들을 데려와 영업을 방해했다는 이유로 그녀를 체포한다.
그때 그녀는 깨닫는다. 이 먼지 같은 아이들은 법이나 국가의 보호도 받지 못하는 존재란 것을.
3. 날 닮은 너를 위해
1990년대 초, 베트남엔 보호가 필요한 수만 명의 아이들이 방치 돼 있었다. 물론 아이들을 모두 돕기 위해선 제도 변화가 필요했지만 노블은 아이들의 삶을 되찾아 주려는 노력도 경시돼서는 안 된다 여겼다.
그녀는 베트남에서 만난 ‘리암’이라는 아이의 소망인 어머니를 만나는 것에 마음 깊이 공감했고, 그의 바람을 이뤄주기 위해 노력한다. 그렇게 집 없는 아이들과 교감하고 아픔을 나누며 노블은 자신이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결정한다.
4. 이런 게 의지의 차이
홀로 베트남에 정착한 노블은 자본가들이 모이는 컨츄리 클럽에 찾아가 호소했다. 한 아일랜드 사업가는 그녀에게 “당신이 나를 위해 일할 수는 없겠냐.”고 제안했다. 하지만 그녀는 “나는 당신이 나를 위해 일해주기를 바란다.”고 했다. 결국 그녀는 바람대로 2만 달러의 지원을 받아냈고, 이것을 시발점으로 100개가 넘는 자선 프로젝트가 시행된다.
현재까지 노블 재단을 통해 교육의 기회와 의료 혜택을 받은 아이는 70만 명. 불행했던 소녀가 끝끝내 지켜온 반짝이는 마음이 이제 세상을 빛나게 한다.
* 노블
감독 : 스티븐 브래들리
개봉 : 2015.10
Reporter 김송미 songme920226@gmail.com
1. 까칠한 흑형들
마약과 범죄가 극에 달했던 1980년대, LA 남부의 소도시 컴턴에서 N.W.A(Niggaz with Attitude)가 결성된다. 랩 작사에 재능 있던 아이스 큐브, 클럽 DJ 닥터 드레, 마약상을 하던 이지-E. 여기에 MC렌과 DJ옐라가 가세해 팀이 만들어진다.
‘까칠한 흑형들’ 정도로 해석되는 팀명답게 그들은 시작부터 논란의 중심에 섰다. 하지만 빈민가의 삶을 노래하고, 경찰을 비판하며 미국 사회의 부조리한 현실을 지적하는 그들의 과격함은 많은 사람들을 매료시켰다.
2. Fuck Tha Police!
당시 사회는 흑인이면 무조건 잠재적 범죄자로 몰아가는 사회였다. 이를 비판한 곡이 ‘Fuck Tha Police’이다. N.W.A의 대표곡으로 흑인들의 엄청난 지지를 얻었고, 급기야 ‘공권력에 대한 폭력을 부추긴다.’며 FBI의 경고장을 받기에 이른다.
하지만 까칠한 흑형들은 디트로이트 공연에서 FBI의 경고에 가운데 손가락으로 화답했다. 그 다음은? 노래를 부르다 단체로 경찰서에 끌려갔다. 그리고 그들은 답한다. “이것은 현실을 반영한 예술이요.”
3. 디스의 향연
언제까지나 승승장구할 거 같던 N.W.A도 돈 앞에선 어쩔 수 없었다. 매니저 제리 헬러의 불공정한 수입 배분으로 멤버들이 갈등을 빚게 된 것이다.
시작은 아이스 큐브였다. 팀 내에서 그의 역할은 막중했다. 호화로운 생활을 하던 매니저와 이지-E 비해 그의 생활은 별반 나아진 게 없었다. 결국 그는 장기 계약서를 뿌리치고 팀을 탈퇴한다. 닥터 드레 역시 팀을 그만두고 직접 자신의 레코드를 설립한다.
4. 이미 늦은 화해
이지-E와 닥터 드레, 아이스 큐브의 불화는 오래가지 못했다. 이지-E가 에이즈에 걸려 31세의 나이로 요절했기 때문이다. 영화에선 이지-E가 제리 헬러의 비리를 알아내고 멤버들을 찾아가 화해한 후 재결합하는 과정을 그린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그들은 화해는커녕 서로 얼굴도 보지 않았고 디스곡과 인터뷰를 통해 꾸준히 상대를 비난했다. 결국 화해는 이지-E의 죽음을 목전에 두고서야 이뤄졌다. 팀의 리더였던 그가 죽음으로써 흑인들의 ‘표현의 자유’를 몸소 실천했던 N.W.A의 시대는 완전히 막을 내리게 된다.
* 스트레이트 아웃 오브 컴턴
감독 : F. 게리 그레이
개봉 : 2015.9
Reporter 배대원 bdw1707@naver.com
1. 내 이름은, ‘LEOS CARAX’
레오스 카락스는 19살에 프랑스의 권위 있는 영화잡지 「카이에 뒤 시네마」에 논평을 기고하면서 처음으로 세상에 자신의 이름을 내놓았다. 그 전까지 그의 이력은 모두 베일에 싸여있다. 한 인터뷰에서 그는 “12~13살 경의 나는 행복하지 않았다”는 말로 유년기를 에둘러 언급했는데, 바로 이 시기에 스스로를 재창조하기 위해 ‘레오스 카락스’라는 현재의 이름을 만들었다.
파격적인 이미지와 야성적 연출, 그리고 스스로에 대한 자문으로 완성되는 그의 영화의 뿌리는 유년기에서부터 찾을 수 있지 않을까.
2. 소년, 소년을 만나다.
데뷔작 <소년, 소녀를 만나다>로 평단의 주목을 한 몸에 받았을 때, 레오스 카락스는 불과 24살이었다. 프랑스 영화계의 ‘될 성 부른 떡잎’으로 일찌감치 자리매김한 것. 하지만 그보다 더 큰 수확은 평생의 페르소나 배우 ‘드니 라방’을 만난 것이다.
드니 라방은 유연한 몸과 역동적인 움직임, 풍부한 표정으로 카락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 후 드니 라방은 레오스 카락스의 연출작 중 단 한 편을 제외한 모든 작품에서 주인공으로 출연하게 된다.
3. 천재에서 비운의 예술가로
차기작 <나쁜 피>의 연이은 성공에 힘입어, 그의 세 번째 장편 영화에는 전과 다른 큰 자본과 관심이 쏠렸다. 우리에게 친숙한 <퐁네프의 연인들>이 그 주인공.
파리 시의 허가를 받지 못해 직접 다리 세트를 강 위에 지었고, 드니 라방을 비롯한 관계자들의 사고, 부상으로 촬영 기간은 3년에 달했다. 그 사이 세간의 관심은 극에 달했고, 투자자들의 불만 역시 고조됐다. 과열된 분위기에서 1991년 공개된 영화는 결과적으로 흥행에 참패했다.
4. 다시, 영화라는 섬으로
<도쿄!>이후 4년, 장편작품으로는 <폴라 X> 이후 13년 만에 레오스 카락스는 <홀리 모터스>를 발표했다. 오랜 공백기 동안 그의 작품세계는 한층 더 심오해졌다. 동반자 드니 라방은 1인 11역을 소화했고, 감독은 그 안에 디지털 시대를 살아야 하는 아날로그 영화인의 고민을 파격적인 형식 파괴를 통해 녹여냈다. 이번에는 통했다.
30여 년의 작품 활동 중 가장 큰 성과를 거둔 뒤, 그는 “영화를 찍으니 이제야 내 섬에 온 기분이다. 아니, 어쩌면 무덤일까?”라며 소감을 밝혔다.
* 미스터 레오스 카락스
감독 : 테사 루이즈-살로메
개봉 : 2015. 10
Reporter 김유진 kyj379@naver.com
※ 각 인물의 사진은 소개된 전기영화와 실제 인물의 사진을 혼용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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