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득 고개를 들었더니 작은 탄성이 터져 나왔다. 해야 할 일들에 쫓겨 가을이 온 것도 모르고 있었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었다. 늘 타던 버스를 그냥 보내고 종로 1가로 향했다. 어리다는 건 유용한 핑계다. 에라 모르겠다, 한 나절 일탈쯤은 괜찮을 것이다.
1020번 버스 노선을 따라 잃어버린 가을을 찾아서 떠난다. 1020번 버스는 종로와 정릉을 잇는 버스로 경복궁, 부암동, 북한산 입구를 돈다. 준비물은 교통 카드, 이어폰, 노트. 마음이 작게 설레는걸 보니 여행의 시작이다.
이 버스는 북악산을 따라 구불구불 올라가서 차가 없어도, 등산을 하지 않아도 단풍 구경을 할 수 있다. 정릉 방향으로 가는 버스에 올라 왼 편에 자리를 잡았다. 오늘의 규칙은 최대한 스마트폰 보지 않기. 대신 창밖과 주변을 예민하게 느낄 것. 매일 작은 액정 화면에 고정되어 있던 시선을 밖으로 던져본다. 나도 모르는 새 어느새 가을이 지나가려 하고 있다.
“아가씨 종점이예요” 나도 모르게 깜빡 잠이 들었다.가을방학의 노래 가사처럼 ‘정해진 목적 없이 발길 가는 대로’ 산책을 하기로 한다. 입에는 흥얼흥얼 멜로디를 달고서. 낯선 동네를 돌아다니면 같은 서울인데도 여행지처럼 느껴진다.
지붕이 낮은 집이 오밀조밀 모여 있는 정릉3동 주택단지에는 골목마다 벽화가 그려져 있었다. 나중에 알고보니 정릉생명평화마을이라 불리는 곳이었다. 홍대 예술가들이 저렴한 집값을 찾아 정릉 쪽에 자리를 잡고 공동체를 형성하게 됐다고. 예쁘게 페인트를 칠한 대문들과 주렁주렁 나무에 매달려 있는 감을 한참 바라본다.
+여기도 가보자!
경국사│1시간 이내로 둘러볼 수 있는 절. 숲이 아늑하게 절을 감싸고 있으니 피톤치드가 필요할 때 가보자.
부암동은 가을에 유난히 예쁜 동네다. 부암동에는 자주 왔지만, 한 번도 가본 적 없던 윤동주 문학관에 가본다. 윤동주 문학관은 동네의 물탱크 역할을 했던 공간을 개조해 전시 공간으로 만든 곳으로 건물 자체가 예술 작품이다. 20분 정도면 둘러볼 수 있는 작은 크기로, 시인의 친필원고를 전시하고 관련 영상을 상영하고 있다.
문학관 뒤편의 ‘시인의 언덕’에서부터 청운공원으로 이어진 길을 따라 걸었다. 혼자 산책 온 사람이 꽤 많았다. 나무 밑에 잠시 앉아 지나가는 강아지와 아이들에게 인사했다. 눈길 줄 여유조차 없이 지나쳤던 단풍과 은행이 오롯이 내 앞에 있었다. 따가운 햇볕과 완벽한 온도의 바람을 맞고 있자니 곧 지나가버릴 가을을 꼭 붙들고 싶어졌다.
늦은 점심을 해결하러 부암동의 <천진포자>에 들어섰다. 평생 만두만 빚고 산 듯한 장인 포스의 주방장이 홀로 앉아 TV를 보고 있었다. 작은 가게에는 오후가 고요하게 고여 있었다. 주말과 달리 텅 빈 부암동에서 오후를 보낼 수 있는 지금이 굉장한 특권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막 빚어낸 중국 만두를 깨무니 따뜻한 육즙이 입 안을 가득 채웠다.
+여기도 가보자!
청운문학도서관│작년에 오픈한 최초의 한옥 도서관. 책이 많지 않아 대여하러 가기보다는 읽고 싶었던 책을 가져가서 읽으면 좋을 공간이다.
산유화카페 │드라마 <연애의 발견>에서 여름&소나무의 작업 공방으로 나왔던 곳. 꽤 높이 있어서 찾아가기가 불편하지만 풍경을 보면 고생한 보람이 있다는 생각이 들 것.
시대를 잊은 간판들이 멋스럽게 걸려 있는 효자동으로 향한다. 카페와 갤러리가 드문드문 놓여진 골목을 어슬렁거리다 문을 열어둔 꽃 가게 <가든하다>에 멈춰섰다. 처음 본 꽃들이 많았다. 언니가 가을 꽃 이름을 하나하나 가르쳐주는데 내 시선은 선인장들에 머물러 있었다. 봄, 가을이 선인장 키우기 좋은 계절이라는 말이 머리를 맴돌았다. 결국 단풍색 선인장 한 녀석을 업어오고 말았다.
+여기도 가보자!
카페 에 마미│ 런던의 홍차 가게를 옮겨 놓은 듯 빈티지한 분위기가 매력적인 홍차 전문점. 문을 여는 순간 스콘 냄새에 피로가 녹는다. 주워온 낙엽을 곁에 두고 오랜만에 펜을 들어 일기를 써보자.
오늘의 마지막 행선지. 가을의 꽃, 국화를 만나러 조계사로 향했다. 조계사 앞마당이 국화 향기로 가득 차서 아찔했다. 꽃과 나무에 둘러싸여 누군가가 간절하게 쓴 소원들을 하나하나 들여다보면서 그제야 오랜만에 머릿속이 조용하다는 걸 깨달았다. 늘 알람을 켜둔 것처럼 시끄러웠다. 할 일에 대한 부담만 가득차서 주변뿐만 아니라 스스로에게도 관심을 둔 적이 없었다. 반나절의 여행으로나마 탈탈 머리를 비워낸다. 비워야 또 채울 수 있을테니까.
여행지에서 돌아올 때면 언제나 큰 깨달음을 얻은 것처럼 다짐하곤 했다. 일상도 여행으로 만들겠다고. 실제로 여행을 떠나서 하는 것들은 대단하게 특별하지 않다. 예쁜 골목을 산책하고 맛있는 음식을 먹는다. 의욕이 있다면 유명 미술관을 가거나 공연을 보러 가고 쇼핑을 한다. 모두 서울에서도 충분히 할 수 있는 일들이다. 다음은 어떤 버스를 타 볼지 고민하며 집에 돌아가는 길, 마음이 한결 보송해져 있었다.
조계사 국화축제│11월 15일(일)까지 무료 관람.
참고도서 │버스로 서울여행
자문 │ 생각버스 프로젝트 이혜림
생각버스란? ‘버스를 새롭게 바라보기‘ 프로젝트로 버스 노선별로 얽힌 이야기, 가볼만한 곳을 잡지 형태로 소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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