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이켜 보면, 인터뷰 중간중간 나도 모르게 이천희의 얼굴을 빤히 바라봤던 것 같다. TV에 나오는 사람들이 그 모습 그대로일 거라고 믿는 순진함따위 갖다 버린 지 오래건만, 내 앞엔 내가 아는 이천희가 앉아 있었다. 자신을 꾸며낼 줄도 모르고 애당초 그럴 생각도 없다는 무구한 표정으로.
10월 22일에 영화 <돌연변이>가 개봉했어요. 주변 반응은 어떤가요?
시사회 끝나고 다들 그러더라고요. “와, 너네 이거 언제 찍었어? 찍는지도 몰랐어!” 저예산으로 찍은 작은 영화인데 지금 보니 생각보다 커 보여서 걱정도 돼요. 저희끼린 50만 명만 들어도 파티하자고 했던 영화인데, 큰 상업 영화들과 비교돼서 100만이 들어도 안 된 것처럼 느껴질까 봐요.
생동성 실험 부작용으로 생선인간이 된 ‘박구’를 이용해서 정규직 기자가 돼보려는 ‘상원’ 역을 맡았어요. 시간이 지나면서 ‘구’에게 안쓰러움과 죄책감을 느끼지만, 세상을 뒤집으려는 시도보단 현실에 타협하길 택하잖아요. 그런 모습이 현실적으로 느껴졌어요.
영화에서 상원이의 감정이 약간 단조롭게 표현되는데, 그게 오히려 공감을 일으키는 것 같아요. 사실 현실에 있는 인물들의 감정이나 생각이 그렇게 드라마틱하게 변하지 않잖아요. 구를 취재하다보니 얠 이용해서 정규직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싶었고, 어느 순간 ‘내가 맞는 건가?’ 고민하게 된 거죠.
너 같은 놈이 공정 언론을 해친다며 선배들이 공격할 때도 분노를 폭발시키진 못해요. 감정적으론 엄청 올라왔는데 결국 한다는 건 “어떡해요, 그럼?” 정도예요. 기자들이 시위하는 틈을 비집고 들어와 부장의 지시를 따르고 있는 상원이의 상황상 감정을 크게 표출할 수가 없는 거죠.
상원 외에도 많은 인물들이 돌연변이가 된 박구를 이용해 ‘한 탕’ 해보려고 하잖아요. 그런 면에서 제작진이 명명한 ‘한국형 극현실 재난영화’라는 장르명이 의미심장해요.
영화 완성본을 토론토국제영화제에서 처음 봤어요. 상영 전엔 걱정이 되더라고요. 외국 관객들이 공감할 수 있을까? 그런데 우리랑 같은 부분에서 반응하는 걸 보면서, 이 이야기가 한국 사회만의 일이 아니라 인류의 공통적 고민이란 생각이 들었어요.
인간으로서 평범하게 사는게 얼마나 힘든가에 대한. 구는 남들처럼 결혼하고 애 낳고 살고 싶은 애인데 그마저 못 한단 말이에요.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제 생각엔, 자꾸 남보다 더 가지려고 하니까 이런 문제가 일어나는 것 같아요. 남을 괴롭히고, 이용하고…. 그래서 오히려 생선인간이 된 박구만 사람 같고 나머진 다 돌연변이처럼 느껴지는 거예요.
‘인간성’이라는 것에 의문을 던지는 거네요. 그렇다면 세상이 무너지고 돌연변이가 돼도 천희씨가 마지막까지 지키고 싶은 인간성은 어떤 건가요?
언제나 진실된 사람이고 싶어요. 저는 뭔가를 못 느꼈는데 느낀 척할 수 없고, 뭐든 느낀 만큼만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에요. 연기도 마찬가지예요. 어떤 감정을 표현하는 사람으로서, 그냥 ‘그런 것처럼’ 연기하는 게 맞는 건가 의문이 들어요.
조금이라도 진심 어린 마음이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그래서 악역 할 때 힘들어요. 얘가 왜 이런 행동을 하는지 제 마음에서 이해가 돼야 하거든요. 그러다보면 세상이 다 싫어져요.(웃음) 작품이 끝나면 그 역할에 몰입했던 제 자신이 무서워 지기도 하고요. ‘뭐지? 내 안에 이런 광기가 있는 건가?’ 그냥 캐릭터일 뿐인데 뭘 그러냐고 하는 분들도 있지만 전 분리가 잘 안 돼요.
그런데 필모그래피를 보면요. <바비>에선 조카를 입양 밀매 보내 돈을 챙기려는 삼촌이었고, <남영동 1985>에선 고문관, <아름답다>에선 한 여자를 너무 가지고 싶어 강간하는 남자로 나와요. ‘어떻게 인간이 인간에게 저럴 수 있나’ 싶은 캐릭터들을 많이 연기했어요.
세 영화 모두 하고 싶은 이유가 달랐어요. 다만, 한 번쯤 생각해볼 주제를 던져주는 영화들인 건 확실한 것 같아요. 2시간 알차게 웃다 끝나는 영화보다는 관객을 고민하게 하는 영화들이 저랑 더 잘 맞는 것 같아요. 대본 볼 때도 더 끌리고요. 이왕이면 의미 있는 작업을 하고 싶은거죠. 물론 정신적으로 힘들긴 해요. ‘세상에 즐거운 역할도 많은데 내가 왜 이걸 한다고 했을까!’ 후회하기도 해요. 하하.
캐릭터의 감정에 인간 이천희의 마음까지 매몰돼버리는 거군요. 역으로 생각하면, 그래서 취미가 많은 건가 싶기도 해요.
그렇기도 하죠. 늘 이런 감정일까, 저런 감정일까 고민하는 일을 하잖아요. 그러다 취미 생활을 할 땐 “아, 좋아. 즐거워!”로 끝나는 거예요. 깊이 있는 고민이 아니라 일차원적인 감정! 복잡한 걸 다 잊게 된달까요? 대부분 몸 쓰는 것들이라 좋은 에너지로 돌아오기도 하고요.
요즘엔 뭐에 꽂히셨어요?
서핑이요! 아, 10월 파도가 진짜 좋은데. 특히 내일 파도는 진짜 꿀 파도인데… 벌여놓은 게 많아서 못 가네요. 하하.
천희씨의 취미 중 가장 오래된 건 아무래도 ‘목공’이겠죠? 브랜드도 론칭한 14년 차 목수니까요. 놀라웠던 건 목공을 시작할 때 누구에게도 배우지 않았다는 거예요.
혼자서 이렇게 저렇게 해보면서 부딪치는 스타일이에요. 근데 그것도 문제인 것 같아요. 남들은 대개 한 달이면 배워서 할 걸 정말 오랜 시간을 거쳐 돌아가거든요. 전 일단 하고 싶단 생각이 들면 해요. 혼자 계~속 해요. 처음에 가구 만들 땐 붙여서 만드는 것밖에 몰랐어요. 그러다 어느 순간 홈을 파서 끼우는 걸 알게 됐어요. 저한테는 신세계였는데 남들은 이미 그렇게 하고 있더라고요. 하하. 처음에 사람들이랑 같이 서핑할 때도 그런 소리 많이 들었어요. “야, 너 왜 그렇게 해? 안 배웠어?” 안 배웠지!
생소한 분야를 시작할 땐 당연히 배워야 한다고들 생각하잖아요. 특히 목공은 아주 일상적인 취미가 아닌데, 어떻게 시작하게 된 거예요?
제대하고 구했던 옥탑방 천장이 기울어져 있어서 딱 맞는 가구 찾기가 힘들었어요. 이런 테이블이 있으면 좋겠는데 안팔아, 그럼 만들면 되는 거 아냐? 그렇게 시작해서 집에서 쓰는 가구를 전부 만들었어요. 이걸 하면 즐거울 것 같아서가 아니라 그냥 내가 쓰려고 만들기 시작한 거죠.
취미 생활을 ‘능력자’의 반열에 오를 때까지 하는 분들을 보면 늘 궁금해져요. 뭐든 처음엔 재미로 시작하지만 어느 정도 쌓이다보면 깊은 노력을 요구하는 순간이 오잖아요. 그럴 때마다 막 포기하고 싶어지지 않나요?
사진 찍을 때 그랬어요. 아버님이 쓰시던 필름카메라로 사진을 찍어봤는데 참 예쁘게 나오더라고요. 드라마 촬영 현장도 찍고, 스태프나 일반인들은 사진 찍힐 일이 별로 없으니까 그분들을 포토 월에 세워놓고 파노라마로 찍기도 했어요. 주변에서 되게 좋아하더라고요. 그러다 나중엔 산 찍고 들 찍고 바다 찍고… 정신차려보니 암실에서 흑백사진을 현상하고 있더라니까요. 그쯤 되니까 ‘이제 뭔가를 더 하려면 사진과에 가야 하나?’ 싶은 거예요. ‘이제 카메라를 놔야겠구나’ 했죠.
아….(당황) 포기의 순간이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늦게 찾아오네요?
네. 해볼 것 다 해봤을 때! 사실 목공으로 사업하게 된 것도 혜진씨의 힘이 커요. 오빠가 하는 것들이 되게 좋은 거고, 사실 일이 돼도 상관없는 건데 왜 접느냐고 말해주더라고요. 그걸 꾸준히 발전시키면 나중에 DIY 문화가 생겼을 때 앞장서서 “만들어 쓰자”고 소리 낼 수 있을 텐데, 이렇게 끝내버리면 “나도 예전에 만들었었는데.” 밖에 안 되는 거 아니겠냐고요.
전 가구를 만들어서 파는 것보단, 나무를 만지고 직접 만들어 쓰는 문화를 전파하고 싶거든요. 외국에선 가구를 다 만들어 쓰는데 우린 다 사서 쓰고 조금만 흠집이 생기면 버리잖아요. 조금만 손보고 리폼하면 다 쓸 만한 것들을….
제가 진짜 손재주가 없는데…. 저도 이런 테이블을 만들어 쓸 수 있을까요?
그럼요. 요즘엔 지인들이 가구 만들어 달라 그러면 ‘네가 하라’고 해요. 그냥 잘라서 붙이면 된다고. 물론 대충 만들면 나중에 나무가 뒤틀리거나 변할 순 있어요. 이 테이블도 보세요. 나무가 휘어 있잖아요.
그래요?
잘 모르시겠죠? 보면 테이블 표면이 굴곡져 있어요. 아마 인도네시아에서 집성한 나무들일 거예요. 우리나라랑 습도가 달라서 수축되고 휘거든요. 사실 이 정돈 별로 티가 안 나는 건데, 장인들은 그런 것까지 계산해서 다 잡아주죠. (빤히 쳐다보는 에디터를 향해) 멋있죠? (네.) 저도 제가 가구 얘기 할 때 제일 멋있는 것 같아요. 으하하.
나무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책 <가구 만드는 남자>에서 이렇게 쓰셨더라고요. “어쨌든 나무는 나무다. 사람들의 필요에 따라서 용도는 달라지겠지만 본질은 달라지지 않는다.” 천희씨는 스스로 어떤 나무라고 생각하세요?
나무도 여러 종류가 있잖아요. 큰 느릅나무도 있고, 위로 곧게 뻗은 나무도 있고, 잎이 정말 풍성한 나무도 있고, 꽃이 만발한 나무도 있고. 전 어쩌면 그들보다 좀 작은 나무일 수도 있어요. 겉으론 작아 보여도 바닥으로 깊게 뿌리내린 나무일 수도 있고요. 그냥 흔들리지 않는, 오래가는 나무였으면 좋겠어요. 좀 더 욕심을 부리면 푸르르고 병충해도 없으면 좋겠죠.
가끔 저에게 “다른 배우들은 다 높고 큰데 왜 천희는 이만해?” 걱정하시는 분들이 있어요. 근데 나무마다 쓰임이 있고 사람들에게 주는 행복이 다 달라요. 높고 크지 않다고 해서 제 나무를 베어 버리고 다른 싹을 심고 싶진 않아요. 전 조금씩 조금씩 자라고 있고 ‘어떤’ 나무가 돼가고 있어요. 그렇게 만들어지는 과정이 전 좋은데, 혹시 저 스스로의 기대치에 못 미쳤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을까봐…. 그러면 걱정하지 마시라고 말하고 싶어요.(웃음) 저는 지금 행복하니까.
Editor 김슬 dew@univ.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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