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기를 아는 남자
– 개그맨 정성호

그는 천의 얼굴로 사는 남자다. 거울 앞에서 자신의 얼굴을 지우고, 백지의 얼굴 위로 모사하려고 마음 먹은 인물들을 끊임없이 그려낸다. 그 그림이 너무 흡사해서, 목소리의 색깔과 표정의 작은 주름까지 닮아 있어서, 우리는 예외 없이 웃음을 터뜨린다. 그러다 보니 정작 그 많은 인물을 걷어낸 그의 맨 얼굴을 본 지는 오래되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 얼굴이 궁금한 것은 지금의 그가 아닌, 지금을 쌓아 온 예전의 그를 궁금해 하는 일이기도 할 것이다. 정성호의 무명시절은 길었다. 지난한 시간을 견녀댈 수 있었던 힘에 대해 물었다. 그는 다만, 포기했다고 대답했다.

 

개그맨 정성호

개그맨 정성호

 

우리에게도 저마다 피어날 계절이 있음을

스케줄도 많고 바빠진 지금이 좋기도 하고불안하기도 할 것 같은데 실제론 어떤가요?

너무 좋죠. 2006년에 <개그야>에서 ‘주연아’로 주목 받고, 그 이후 몇 년간 침체기를 겪을 때는 조바심이 굉장히 컸어요. 개그맨들끼리 우리는 ‘물고기’, PD는 ‘상어’라는 표현을 많이 해요. 물고기의 살이 다 떨어져 나가면, 뼈다귀만 남은 물고기는 버려지는 게 현실이라고…. 예전엔 다시 살을 못 찌울 거라는 걱정을 많이 했어요. 그런데 그 뒤에 결혼하고 임재범 성대모사를 거쳐 지금에 이르면서 불안이 많이 없어졌어요. 뭔가를 버리고, 또 뭔가를 찾으면서 중심을 갖게 되면 조바심의 문제는 사라지는 것 같아요.

 

성대모사를 위해 입안에 휴지를 구겨 넣어서 구강구조를 비슷하게 만든다는 얘기를 듣고 놀랐어요. 성대모사를 타고난 개인기 정도로 여기는 편견도 있는데, 굉장한 노력과 연습이 필요하다는 생각도 들고요.

어휴, 성대모사는 결코 타고 나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에요. 노력으로 만들어내는 거죠. 휴지를 넣는 건 제가 가진 얼굴 골격이 정해져 있기 때문에, 인위적으로 변화를 주려는 거예요. 예전의성대모사가 흑백TV라면 3D로 발전시키고 싶어 안면모사에까지 욕심을 냈어요. 사람들이 좋아해주니까 연구를 더 많이 했죠. 제가 하는 코미디는 그 사람과 똑같아지자는 게 아니라, ‘똑같이 흉내를 내는 정성호를 만들자’예요. 보면 다 정성호인데, 사람들이 그 순간에만 속는 거죠. 그 사람만의 포인트를 잘 잡아냈다는 얘기를 듣고 싶어요.

 

서울예대 방송연예과에 다니던 중, 교수님이 무심히 던진 한 마디에 개그맨 시험을 보았다 덜컥 붙어서 MBC 공채 개그맨으로 데뷔하게 됐다고 알고 있어요.

예대다 보니 재학생 중에도 연예인이 많았어요. 그때가 스물서너 살쯤이었는데 정말 뭐를 해야 할지 모르겠더라고요. 대학생 대부분의 고민이 ‘졸업하면 뭐하지?’잖아요. 똑같았어요. 게다가 유급도 받았었고. 그래도 안심이 됐던 게 과특성상 유급 당한 선배들이 많았거든요. 유재석선배를 비롯해 선배들이 예사로 1학년을 3, 4번씩 다녔으니까.(웃음)

 

다른 선배들, 동기들은 방송을 하고 있는데 나는 뭘 해야 하나 그런 고민이 많았겠네요.

그렇죠. 동기 중에 신하균 씨는 이미 배우의 길을 걷고 있었고…. 방송은 하고 싶은데 내가 가진 능력이나 끼는 뭔지도 모르겠고 답답했어요. 그런데 당시 주철환 교수님이 수업 중에 뜬금없이 “정성호 저 친구가 방송을 하면 사람들이 참 좋아할 텐데.”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수업 끝나고 교수님을 쫓아가서 어떻게 하면 방송을 할 수 있겠느냐 무턱대고 물어봤더니 “이번에 개그맨 시험이 있는데 한 번 볼래?” 하시더라구요.

 

그날부터 개그를 짜서 몇 번 보여드렸는데 시험 하루 전날에 보여드린 것도 재미없다는 평을 받았어요. 그러면서 아무렇지 않게 또 한 마디 던지시는 거예요. “성호야, 네 목소리가 서경석이랑 참 비슷한 거 같다.” 그 말만 듣고 집에 돌아가서 밤새 연구한 다음 서경석 씨 성대모사를 했는데, 그걸로 합격을 한 거예요. 그 해에 천 명이 넘게 지원했는데, 5명 뽑는 데 붙었으니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은 기분이었죠.

 

"밤새 연구한 다음 서경석 씨 성대모사를 했는데, 그걸로 합격을 한 거예요. "

“밤새 연구한 다음 서경석 씨 성대모사를 했는데, 그걸로 합격을 한 거예요. “

 

이전엔 개그맨이 되겠단 생각은 전혀 없었던가 봐요.

없었죠. 학생 땐 배우가 더 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데뷔하고 나서 더욱 정체성을 잃었던 거 같아요. 매일 미팅남, 친구1 이런 역할만 전전하다가 이건 정말 아니다 싶어서 리포터 일을 시작했어요. 그런데 “안녕하세요, 개그맨 정성호입니다. 오늘은 어디에 왔습니다.” 하면, “자네 개그맨이야? 개그는 뭐했어?” 물으니까 거기서 또 정체성에 혼란이 오고…. 개그맨이 되었다 뿐이지 자기 개그도 특기도 없는 상태였어요. 관객도 몇 명 없는 행사장에서 MC 보고, <뽀뽀뽀>도 하면서 딜레마에 많이 빠졌어요.

 

개그맨으로서 어떤 노력을 해야 할지 스스로도 잘 모르던 시기였을까요?

안일했어요. 잘 나가는 개그맨 선후배들을 보면서 나한테는 왜 기회가 안 오지, 그런 생각만 했어요. 기회를 만들려고 하지 않고 그냥 계속 기다린 것 같아요. 그 즈음 허무개그가 떴는데, 그걸 보면서 ‘내가 그들보다 대체 뭐가 못났나, 하면 되는데 정작 노력을 안 했구나’ 하는 생각을 했어요. 그러다 코미디 프로그램이 변화하면서 개그맨들 아이디어를 받아서 코너를 만들기 시작했고, ‘주연아’를 짜게 된 거죠. 개그를 다시 제대로 해봐야겠다고 마음먹으면서, 내가 여기 있는 이유, 나를 뽑은 이유가 분명히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힘든 시기가 오래 이어지다 보면, 사람이 그런 이유를 찾기도 힘들어지는 것 같아요.

류승룡 선배를 우연치 않게 인터뷰한 적이 있는데, 그때 들은 얘기가 기억에 남아요. 류승룡 선배도 <난타>만 10년에, 수산 시장에서 배달하고 편의점에서 일하고 그랬거든요. 그러다 안재욱씨와 연극을 하게 됐는데 출연료 얘기를 듣고 감독한테 그만둔다고 그랬대요.

 

“얘는 내 동기고, <별은 내 가슴에>로 뜬 건 알겠지만 연극은 내가 더 오래 했는데 이렇게 차이 나는 돈 받으면서 하긴 싫다.” 그랬더니 감독님이 말하더래요. “야, 사람은 봄에 피는 꽃이 있고 가을에 피는 꽃이 있어. 안재욱은 봄에 피는 꽃이야. 너는 가을에 피는 꽃이고. 그런데 정말 그것 때문에 그만 둘 거야?” 사람마다 피는 계절이 다르다는, 그 얘기가 그렇게 와 닿았어요.

 

저도 그랬던것 같아요. 지금 당장 꽃봉오리를 맺든 안 맺든, 피든 안 피든 중요한 건 자기 계절이 있다는 거죠. (앞에 커피잔을 가리키며) 커피가 있어야 할 자리에 있으면 맛있지만, 있지 말아야 할 자리에 있으면 거들떠보지도 않잖아요. 똑같아요. 그런 자리를 찾는 게 힘든 거지, 재능은 다 가지고 있는 거예요.

 

"원하는 것이 있다면 스스로 뭔가 하나를 버려야 해요. 다가지려고 하면 안 돼요. "

“원하는 것이 있다면 스스로 뭔가 하나를 버려야 해요. 다가지려고 하면 안 돼요. “

 

포기할 줄 아는 용기, 버려야 얻는다

20대에 겪는 방황도 비슷한 맥락인 것 같아요. 스물 서너 살 때는 뭘 해야 할지도, 내게 어떤 재능이 있는지도 잘 모르니까 남들 가는 대로 가게 되잖아요.

원하는 것이 있다면 스스로 뭔가 하나를 버려야 해요. 다가지려고 하면 안 돼요. 하나를 버려야, 다른 게 오죠. 자기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 4개를 꼽는다면 그 중에 하나를 버려야 3개를 더 많이 가질 수가 있는 거예요. 이것 하나가 정말 가지고 싶다면, 나머지 3개를 버려야 하고요. 포기할 줄 알아야 하는데, 그걸 잘 모르는 거죠.

 

무얼 포기했나요?

제가 좋아하는 것들을 포기했죠. ‘주연아’로 좀 잘되기 시작하니까 술과 담배를 비롯해 온갖 쾌락들이 다 왔어요. 그때만 해도 ‘이 정도 되면 원래 가져야하는 것들 아닌가’ 생각했어요. 근데 아니었어요. 그걸 가지니 다른 게 없어지는 거죠. 결혼하고 아이들이 생기면서 술과 친구를 포기하는 대신 ‘아침’을 얻었어요. 그 아침이 ‘정재범’까지 이어졌고, 그 후 <SNL>을 하게 됐어요.

 

제가 원래 배우를 하고 싶어 했으니 약간의 기대를 가지고 갔는데, 김원해 선배나 (정)명옥이랑 연기를 해보니 하늘과 땅 차이인 거예요. 엄청 좌절했죠. <SNL> 시작 2주 만에 한 주를 쉬었는데, 어찌 보면 제일 필요 없는 사람으로 꼽힌 셈이죠.

 

그 주가 지나고 장진 감독님이 불러서 묻더라고요. “성호야, 너는 뭘 잘하지?” “저는 사람 흉내나 이런 걸…” “아, 맞다. 너 성대모사 잘하지? 그럼 성대모사 하자! 다음 주에 이순재 선생님, 가능하지?” “예?예예…!!” 그렇게 해서 이순재 선생님 모사를 일주일 만에 만들게 됐어요. 그 뒤론 계속 같았어요. “다음 주에 이승철 가능하지?” “예? 예!!”

 

와, 그럼 매번 일주일 만에 새로운 인물을 연습해서 투입되고 했던 거네요.

연습을 엄청 많이 했어요. 안 하던 것에 대한 두려움이 큰 만큼 완벽하게 보이고 싶다는 생각으로 연습을 상상 이상으로 했어요. 그리고 어쨌든, ‘아뇨, 못 해요’라는 말을 안 했어요. 내일 촬영이라도 뭐든지 다 했던 것 같아요.

 

지금의 정성호와 무명시절 방황하던 정성호를 비교하자면 어떤 것이 가장 달라졌나요?

안 될 거라는 생각을 버렸죠. 예전엔 제 목소리와 비슷한 사람만 찾았어요. 연구도 안 하고. 근데 못할 거라 여겼던 목소리도 사실 다 되더라고요. 목소리가 안 나와서 그만두고 싶을 때도 정말 많아요. 그래도 포인트를 잡아내려고 애쓰면 되더라고요. 하기도 전에 두렵다, 뭘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그럴 땐 사실 ‘해 봤냐?’가 정답이에요. ‘해 봤는데 그건 나한테 안 맞았어, 그래서 지금 이거 하는 거야.’ 그게 답인 거죠.

 

포기의 산증인이 하는 말이라 더 와 닿네요.(웃음)

정말이에요. 다는 못해요. 다는 못하는데, 중요한 것 중에 몇 개를 포기하면 몇 개가 남아요. 저도 제가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몇 가지를 버리고, 가장 얻고 싶었던 걸 얻은거예요.

 

"정말 좋아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이 하는 행동을 따라하세요. 그럼 그 사람과 어느 순간 친해지게 돼요. "

“정말 좋아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이 하는 행동을 따라하세요. 그럼 그 사람과 어느 순간 친해지게 돼요. “

 

네 아이의 아버지이기도 한데, 아이 낳기 전에는 화도 잘 내고 좀 외골수인 성격이었는데 많이 바뀌었다고요.

그 전엔 되게 이기적이었어요. 다른 사람이 내 뜻대로만 행동하길 바라고. 살다 보니 그게 정답이 아니더라고요. 나이를 먹으면 젊은 사람들의 얘기를 충분히 받아들여야 해요. 근데 받아들일 때 조건이 있어요. 그 사람이 나한테 주는 좋은 것만 받는 건 그 사람을 다 받아주는 게 아니더라구요.

 

예를 들어 후배한테 “편하게 해”라는 말을 했다면, 후배가 나한테 안 좋은 얘기를 해도 받아줘야 되는 거예요. “형은 진짜 재수 없어. 이런, 이런 점은 정말 이기적인 거 알아?” 하는 얘기를 해도 화내지 않고 받아줘야 진짜 “편하게 해”가 되는 거죠. 예전엔 그걸 못했는데, 아내하고 결혼한 뒤 드세게 싸우면서 ‘아, 저 사람을 받아들인다는 건, 저 사람의 모든 생각을 받아들이는 거구나’ 하고 깨달았어요.

 

방황을 먼저 해 본 선배로서 지금의 20대에게 한마디 해준다면.

되고 싶은 어떤 사람이 있는데 1차적으로 가는 길을 모른다면 그 사람을 흉내 내라는 말을 하고 싶어요. 정말 좋아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이 하는 행동을 따라하세요. 그럼 그 사람과 어느 순간 친해지게 돼요. 같은 색깔과 향기가 나는 사람끼리는 가까워지게 돼있거든요.

 

일도 마찬가지예요. (포토그래퍼를 가리키며) 예를 들어 포토그래퍼가 되고 싶다면 자신이 좋아하는 포토그래퍼가 가진 습관부터 모든 것을 흉내 내세요. 그러면 어느 순간에 자신이 원하는 그 사람이 돼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자기 자신을 잃지 않아야 하겠죠? 잃지 않아요, 절대. 자기 본연의 모습은 사라지지 않아요. 오히려 그걸로 플러스가 됩니다. 설탕물에다 물을 아무리 더 부어도 설탕의 단맛은 살아 있잖아요. 무엇을 흉내 내고 어떤 사람이 되든 자기 자신은 잃지 않을 거예요.

 

 

Editor 김신지 sirin@univ.me Photographer 박시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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