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별도 시간이 지나면 좋은 추억으로 남는다는데, 나는 이상하게 생각할수록 열 받았다. 지난 연애를 찬찬히 돌아보면, 상대가 못난 놈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그때 내 모습은 더욱 못나게 느껴졌다. 과거의 연애가 ‘흑역사’ 취급을 당하자, 연애 자체에 회의감이 생겼다. 남자에 대한 불신, 그리고 자학에 가까운 나를 향한 미움도 컸다.

 

극복? 극복은 바라지도 않으니 체념이라도 하고 싶었다. 많이 생각하고 정리하길 반복했다. 그렇게 나의 흑역사를, 후회와 반성을 여기 잔뜩 풀어놓을 테니 나와 비슷한 이가 있다면 공감이든 위로든 함께 했음 좋겠다.

 


 

상대가 원하는 대로 전부 맞춰주는 게 사랑은 아닌데

 

15살 때부터 4년 동안 마음을 쏟았던 첫사랑이 ‘진짜 공부해야 할 때’라며 나를 뻥 찬 후, 슬퍼 죽을 뻔했다. 그리고 우연히 독서실에서 만나게 된 A. 같은 학교에 다니던 우리는 가까워졌고, 그는 지겨웠던 고3 시절의 나를 웃게 했다. 몰래 하는 불장난이 재밌듯, 연애해선 안 될 시기에 하는 연애는 달콤했다.

 

하지만 우리가 대학에 간 후, 모든 게 어긋났다. 나는 서울에 있는 대학에, A는 부산에 있는 대학에 다니게 됐다. 갑자기 시작된 장거리 연애는 힘들었다. 올인했던 어린 연애는 서울 부산 간 거리를 감당할 수 없었다.

 

새내기 시절, 아는 사람도 많아졌고 술자리도 늘었다. 서울에서 새로운 세계를 만난 나는 신이 나 있었다. 그러나 A는 그렇지 않았다. 늘 불안해했다. 그는 나의 네이트온 메신저 쪽지함을 다 뒤졌다. 비밀번호를 알려주지 않으면 내가 숨기는 게 있다고 생각했다. 남자와 절대 싸이월드 친구를 맺어선 안 되었기에 나는 선배들에게 이상한 여자 후배로 찍혔다. 매일 아침 영상통화가 걸려 왔다. 치마를 입어선 안 되고, 커플링도 꼭 해야 했다.

 

나중에는 MT도 못 가게 했다. (알고 보니 A는 다 갔더라) 그리고 2주에 한 번, 주말마다 부산에 내려가야 했다. 내려가지 않으면 ‘내가 보고 싶지 않냐’며 내게 따졌다. A가 서울에 올라오면 있을 곳이 없으니, 부산에 집이 있는 내가 내려가는 게 당연시됐다. (KTX 비용을 반반 낸 것도 아니었으므로 난 늘 거지였다)

 

A는 내게 매우 소중한 존재였다. 서울은 늘 낯설고 외로웠기에 A를 잡아 둬야만 했다. 오직 A만이 나의 결핍을 채워줄 수 있다 생각했다. A의 사랑을 얻기 위해서 나는 그가 원하는 여자가 되려 노력했다. A와 헤어질 걸 상상하면, 차라리 힘든 지금이 낫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하지만 하나를 맞춰 주면 또 다른 하나가 어디선가 생겨났다. 누군가에게 맞춰준다는 건 끝이 없는 일이라는 걸 그때는 몰랐다. 나는 내가 바뀜으로써 사랑이 완성될 거라 착각했다. A도 그랬을 거다. 모서리가 맞지 않는 퍼즐을 억지로 끼우면, 다른 곳이 망가진다는 걸 몰랐을 거다. 지금은 우리 모두 그걸 알 나이니까, A도 잘 연애하고 있겠지?

 


 

어떤 사람은 믿음을 빌미로 나를 없애기도 한다

 

나는 B를 운명이라 생각했다. 겨우 이십 대 초반이었으면서, 이번엔 결혼할 것 같다고 동네방네 떠들 정도였다. B는 당시 졸업하면 뭐할지 고민 중이었고 결국 취업을 선택했다. 취준생 B의 모습이 내 가까운 미래라고 생각했다. 나도 언젠간 취업 준비를 하게 될 테니까.

 

데이트 장소는 늘 카페였다. 나는 B의 자기소개서도 봐주고, 면접 질문도 해줬다. 술 먹고 늘어놓는 푸념도 잘 들어줬다. 당연한 거라 생각했다. 그리고 B는 운 좋게 취업에 성공했다. B는 신입사원이 되고, 나는 취준생이 되었다.

 

“취업하면 더 힘들어. 준비하는 게 뭐가 힘들다고.”

하지만 언젠가부터 신입사원 B는 나를 혼냈다. 정확히 말하면 꼰대질이었다. 막내 역할이 힘든지, 만날 때마다 회사 욕을 했다. 내가 한마디라도 거들면, 돌아오는 말은 “네가 뭘 안다고?” 였다. 우리 둘 사이에 관한 얘기는 하지 않았다. 가끔 나도 취업 준비가 힘들다 말하면, ‘취준생 때가 좋다’는 소리만 해댔다. 그렇다. 그는 내가 무조건 가만히 들어주기만을 바랐다.

 

친절하고 자상하던 사람이 변해 슬펐다. 일에 적응하면 나아질까 싶었는데, B는 몇 달이 지나도 그대로였다. 나는 견딜 수 없어 B에게 회사 얘기를 안 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러자 B는, “내가 너 아니면 누구한테 말해? 내가 믿고 말하는 사람이 넌데. 사랑한다면서 이것도 못 들어주니?” 라고 했다. B에게 그렇게 회사 생활이 힘들면 그만두는 건 어떠냐 묻자, “빨리 돈 벌어서 너랑 결혼하려고 취업한 건데 무책임하게 그만두라고? 난 널 믿으니까 취업한 거야.” 라고 했다.

 

정말 개똥 같은 소리지만, 나는 저 말 속의 ‘믿음’이라는 단어 때문에 죄책감을 느꼈다. 나를 믿고 힘든 걸 말하는, 미래를 결정한 (지금 생각해보니 정말 나 때문에 취업했다면 더 노답이다) B에게 미안했다. 믿는다는 말 때문에 나는 그를 맹신했고, 괴로웠고, 나를 잃었다.

 

돌아보면 B는 미성숙했고 그의 말을 굳게 믿었던 나도 미성숙했다. B와의 연애에서 내가 깨달은 건, 가끔 사랑은 시야를 흐리게 해 사람을 바보로 만들기도 한다는 것. 최선을 다해 사랑하고 맞춰나가는 건 좋지만, 사랑 때문에 자기 생각과 감정마저 부정하기 시작하면 결국 불행해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B야, 취업해보니까 그 정도로 힘든 거 아니더라. 엄살은.)

 


 

곁을 안 주는 너, 그게 편하면 비슷한 사람이랑 만나

 

C는 처음부터 내가 아는 남자들과 어딘가 달라 보였다. 책을 좋아하고, 인디 밴드 음악을 즐겨 듣고, 혼자 감성적인 에세이를 썼다. 말수가 적고 속을 알 수 없었다. 그런 매력에 끌렸다.

 

겉으로 그렇게 보이는 C가 내 남자가 되면 모든 걸 오픈할 줄 알았다. (뭐, 이건 여자들의 판타지이기도 하다.) 그러나 내 남자친구가 된 C는 그대로였다. 연락을 왜 매일 해야 하는지 이해가 안 됐다. 나는 C의 일정을 잘 알 수도 없었다. C는 늘 바빴고, 무언가를 하고 있었다.

 

가끔 데이트할 때, ‘오빠는 어떤 걸 좋아해?’라고 물으면, 시큰둥하게 대충 얼버무렸다. C는 자기 얘기를 하는 게 무척 어렵다고 했다. 기쁘고 슬픈 것을 공유하며 서로를 받아들이는 게 사랑이라 믿었던 나는 내내 어리둥절했다.

 

우리 관계가 곪아 터지기 전까지 난 계속 물었다. 내 나름의 노력이었다. “오빠는 옆에 있는 사람을 너무 외롭게 만들어. 날 사랑하긴 해?” C의 대답은 늘 같았다. “사랑해. 너와 나의 연애 스타일이 다를 뿐이야. 네 연애 스타일은 좀 피곤한 것 같아.”

 

엉겁결에 피곤한 여자가 되어버린 나는 마음을 닫아갔다. 그리고 깨달았다. 서로 오래 사랑하기 위해서는 결정적으로 연애 스타일이 같아야 한다는 걸. 여러 모양의 연애를 겪어오며, 각자의 스타일이 생긴다. 누군가를 새로 만났을 때, 서로의 스타일이 절충될 수 있는지 살펴야 했다. 그리고 그것이 절대 맞지 않는다면 과감히 버려야 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서로를 미워하고 원망하게 되니까.

 

(사실 이 글을 쓰는 지금도 C가 과연 자신의 연애 스타일과 맞는 여자를 만났는지 궁금하다. 자신의 세계와 연애 스타일을 조금 포기하고 맞춰가는 법을 알게 되었는지도.)

 


 

사실 과거의 연애가 미운 이유는, 부족하고 미성숙했던 내 모습을 인정하기 어려워서다. 현재의 내가 과거의 나를 합리화하고 상대를 원망한다. 이런 생각이 계속되면 과거를 완전히 털어 내고 새로운 연애를 시작하기 어려워진다.

 

너무나도 미웠던 A, B, C의 얘기를 쓰며 느꼈던 건 ‘정말 내 탓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과거의 사랑을 마냥 미화하지 않고 반성하는 내 모습에서 사랑의 희망을 찾고 있다는 것. 이 정도면 충분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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