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떠나는 법, 그만큼 잘 돌아오는 법
– 여행 작가 이지상

 

시험, 팀플, 과제…. 떠나지 못할 이유들이 조금은 느슨해지는 12월. 30년 가까이 여행을 다녔다는 그에게 물었다.

 

여행 작가 이지상

여행 작가 이지상

 

꼭 가지고 가야 하는 것에 대하여

고등학생 때 세계지리 선생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대학에 가서 해외여행을 가게 되면 한국에서 가장 먼 곳부터 가라. 가까운 곳은 늙어서도 갈 수 있지만 먼 곳은 혈기왕성할 때 가야 한단다.”

일리 있는 얘기네요. 모험이건 오지건 호기심 많고 체력 좋을 때 가면 좋죠. 그런데 한편으론, 가까운 곳에서 먼저 여행 경험을 쌓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배낭여행 처음 갈 때 사실 두렵잖아요. 우리와 문화권이 비슷한 동남아를 여행해보고 그걸 바탕으로 유럽이나 중남미, 인도에 도전하는 거죠.

 

작가님의 첫 여행지는 타이완이었잖아요. “첫 여행지는 첫사랑 같은 것”이라고 하셨는데, 어떤 점이 그런가요?

어떤 사람은 이집트가 첫 여행지였대요. 이집트는 지금도 혼란스럽지만 90년대에는 광장이고 공원이고 혼잡하지 않은 곳이 없었어요. 그런데 그 사람은 첫 여행이었기 때문에 지금도 그 생각만 하면 가슴이 설렌대요. 첫사랑도 지나간 것이지만 생각하면 설레잖아요.

 

전 타이완을 많이 가봤는데 늘 첫 번째의 순간이 오버랩 돼요. 갈 때마다 “아, 옛날엔 이랬는데…. 여기 있던 게 없어졌네” 씁쓸해하기도 하고, 예전의 흔적을 찾아내면서 달콤해하기도 하고요.

 

요즘, 방학하면 여행 갈 거라고 다짐하고 있는 독자들이 많을 텐데요. 겨울에 추천하고 싶은 여행지는 어딘가요?

겨울에는 동남아와 인도가 여행 철이에요. 아침과 저녁은 선선하고, 낮에도 그늘에 들어오면 시원하니까 여행하기 가장 좋아요. 유럽은 겨울엔 좀 썰렁한데, 대신 숙소나 기차표 구하기가 수월해요. 좀 싸기도 하고. 사람이 없어서 나름 낭만적이기도 하고요.

 

여행 짐을 꾸릴 때 상반되는 유형이 있잖아요. 몇 달 전부터 준비해서 바리바리 싸가는 타입과 전날 대충 챙겨 가는 타입. 30년 가까이 여행을 다니셨으니 짐 싸는데 도가 트셨을 것 같은데, 작가님의 여행가방은 어떤가요?

여행을 하면 할수록 짐이 줄어들어요. 저도 처음엔 별의별 걸 다 싸 갔어요. 두려우니까. 그런데 없어도 다 살 수 있더라고요. 속옷은 빨아 입고, 물가 싼 나라에선 사 입고. 그 대신 꼭 챙기는 것들이 있어요. 코털 깎이랑 손톱깎이! 하하. 여행 오래 다니면 남자들은 코털이 막 길어서 지저분해져요. 현지에선 구하기도 좀 그렇거든요. 장기 여행 할 땐 빨랫줄을 꼭 챙기죠. 빨아 입으면서 다녀야 하니까요. 골치 아픈 일이 생길것을 대비해서 여권 사본도 꼭 필요하고요.

 

그런데, 여행 가기 전에 그 나라에 대해 어느 정도 알아야 딱 좋은 걸까요? 저는 첫자유 여행을 라오스로 갔는데, 공부를 너무 열심히 하고 사진을 하도 많이 봐서 그런지 막상 실제로 보니까 감흥이 덜하더라고요.

그게 요즘 모든 여행자들이 부딪히는 문제예요. 너무 많이 알면 피로해요. 미지의 상태를 개척한다는 짜릿함도 줄어들고요. 다만, 그 나라의 역사와 문화를 알고 가면 보이는 깊이가 다르긴 해요. 예전에 시베리아 횡단 여행을 했는데, 공부를 안 하고 갔다면 재미가 덜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가기 전에 도스토옙스키 같은 러시아 문학과 시베리아의 역사와 문화를 다룬 책을 몇 권 읽었거든요. 러시아어도 2달 동안 배웠고요. 그렇게 가니까 가이드북에서 다루지 않은 곳을 가보게 되더라고요.

 

상트페테르부르크에 가면 센나야 광장이란 곳이 있는데, 아무것도 모르고 보면 정말 아무 곳도 아니에요. 근데 그곳이 『죄와 벌』에서 라스콜니코프가 죄를 회개하면서 땅에 입 맞추는 장소거든요. 제가 그 장면을 굉장히 좋아해서 감격스럽더라고요. 홍콩에 가기 전엔, 홍콩이 중국으로 반환될 때의 분위기를 다룬 영화와 소설을 찾아 봤어요. 현지에서 중국인들과 홍콩 사람들이 싸우는 모습을 많이 봤거든요. 모르고 보면 왜 싸우는지 이해가 안 되는데 알고 가면 “아, 저게 갈등의 현장이구나” 보이죠.

 

"제가 많은 분들에게 글을 쓰 라고 권유하는 이유가, 여행기를 쓰다보면 여행이 더 깊어져요."

“제가 많은 분들에게 글을 쓰라고 권유하는 이유가, 여행기를 쓰다보면 여행이 더 깊어져요.”

 

쉬어요, 두 번 쉬어요

코스 공부만 하고 갔던 절 반성하게 되네요.(웃음) 내친김에 여행 코스 얘길 해보자면, 자꾸 ‘여기까지 왔는데’ 하는 생각 때문에 무리하게 되지 않나요?

전 코스를 하루에 두 곳 정도만 짜요. 오전에 다녀와서 쉬고, 오후에 둘러보고 쉬고. 너무 빽빽하게 계획을 짜면 중간에 다른 길로 빠질 수가 없어요. 이곳에 더 있고 싶어도 일어나야 하고요. 만약 한 달 여행을 한다면 나흘은 계획 없이 두세요. ‘오늘 뭐하지?’ 그걸 즐기시면 돼요. 그 빈둥거림을 누리는 게 아주 달콤해요.

 

여비도 마찬가지예요. 내가 현지에서 쓸 수 있는 돈이 100만원이라고 한다면 70~80만원만큼의 계획만 짜고 나머지는 그냥 가져가는 거라고 생각하세요. 그러면 가끔 럭셔리하게 지내고 싶을 때, 비싼 거 먹고 싶을 때 선뜻 할 수 있어요. 그 여백이 여행을 풍요롭게 만들어요.

 

이것 역시 여백이 없기 때문일까요? 여행지에 도착하는 순간부터 초 단위로 사진을 찍어대다가 셋째 날부터 급격히 사진양이 줄어들어요. 질려버리는 거죠….

저는찍을 만큼 찍었다 싶으면 사진기를 가방에 넣어버려요. 휙 떠나서 또 다른 걸 찍는 게 아니라 그 자리에 앉아서 시간을 보내는 거예요. 기록을 하거나 멍하게 앉아서 쉬어주면 덜 피곤해요. 쉰다는 게 얼마나 소중한 건지 몰라요. 사진도 계속 찍으면 질리고, 글도 계속 쓰면 질려요. 여행에도 완급 조절이 정말 중요해요.

 

몇 장만 찍어도 멋진 사진이 나오면 쿨하게 카메라를 집어넣을 수 있을 것 같은데…. 여행 사진 멋지게 찍는 팁 같은 게 있을까요?

글이든 사진이든 내가 뭘 보여주고 싶은지 인식해야 돼요. 아무 생각 없이 셔터를 누르는 게 아니라 ‘이 장면에서 무엇에 초점을 둘까’ 생각하는 거죠. 그것에 따라 기법이 달라져요. 배경보다 사람을 강조하고 싶을 때 뒤를 아웃 포커싱으로 날려버리는 것처럼요.

 

예를 들어볼게요. 아주 평화로운 한낮에 베트남 골목을 걸은 적이 있어요. 작은 여자애가 문지방에 걸터앉아 있고 엄마가 아이에게 뭔가를 가르쳐주고 있었어요. 아무 생각 없었다면 그 모습부터 당겨서 찍었을 거예요. 그런데 제가 찍고 싶었던 건 그 모녀의 모습이 아니라, 골목길의 한적함이었어요. 어떻게 해야 할까. 일단 저분들이 무심해야 해요. 날 바라보면 안 돼. 그래서 카메라를 만지는 척하면서 기다렸어요. 한참 있으니까 저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할 일을 하더라고요. 그때 찍으니까 원하는 느낌이 나왔죠. 사진이든 글이든 내 감성이 배어드는 시간이 필요한 것 같아요.

 

여행기를 쓰려면 사진뿐 아니라 그때의 감정과 상황을 생생하게 소환해내야 할 것 같은데요. 기록은 언제 하시는 거예요?

나름대로 개발한 노하우인데, 노트를 세 부분으로 나눠 써요. 숙소에 돌아오면 일단 앞쪽에 일정을 쭉 써요. 어디 가서 뭘 먹었고 숙소를 찾는 데 힘들었다, 이런 사실적인 이야기들. 그러고 나서 좀 쉬어요. 모드 전환을 해줘야 돼요.(웃음)

 

뒹굴다가 두 번째 일기를 써요. 그날 다니면서 메모한 것들 중에 옛날 생각이 났다거나, 감정적으로 진폭이 컸던 순간들을 세밀하게 묘사하는 거죠. 맨 뒤에는 날짜와 숙박비, 교통비, 식비 같은 정보를 기록해요. 하루 예산에서 얼마나오버 됐는지 매일 체크하는 게 좋아요. 그걸 안 하면 얼마가 있는지 모르니까 무조건 아끼게 돼요. 사람이 쫀쫀해지는 거죠. 특히 여행이 길어질수록 관리를 철저히 해야 돼요. 자유와 낭만은 튼튼한 현실감각이 있어야 끌고 갈 수 있는 거거든요.

 

잘 서있어야 날 수도 있다

사실 여행이라는 게 별것 없는데… 왜 우리는 의식주를 다른 공간에서 해결하는 것만으로 자유로움을 느끼는 걸까요?

‘exist(존재하다)’의 어원이 라틴어인데, ‘탈출하다’라는 의미를 품고 있대요. 우리는 이 사회 속에서 규정되잖아요. 누구 집의 아들, 어느 대학의 학생, 어디 직장 다니는 누구…. 사람들은 그걸 받아들이며 살고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그걸 깨고 싶어 한다는 거예요. 그래서 궤도를 벗어날 때 해방감을 느끼죠. 본능에 충실한 해방감.

 

그리고 우리 사회가 너무 바쁘게 돌아가잖아요. 주말에 쉬는 것도 하나의 패턴일 뿐이죠. 그런데 여행을 가면 반복되던 것들이 사라지고 공기, 음식, 사람 모두 낯설어요. 신선한 것들이 마구 다가오니까 순간순간이 살아 숨 쉬는 것처럼 느껴지는 거예요.

 

그 기분을 못 잊어서 여행 후유증을 앓는건가 봐요. 작가님은 여행 후유증을 심하게 겪었던 적 있으세요?

첫 인도 여행을 9개월간 다녀왔는데, 거기선 수염 기르고 머리도 안 자르고 히피처럼 다녔거든요. 그러다 한국에 오니까 적응이 안 되더라고요. 사람들도 이상하게 보고. 밥을 맨손으로 먹다가 야단맞고 그랬어요.(웃음) 사실 정신을 딱 차리면 안 그러는데, 계속 여행자 모드로 살고 싶었던 거죠. 자전거 타고 가다 갑자기 쓰러져버린 느낌이라고 해야 되나. 굉장히 힘들었어요.

 

잘 떠나는 것만큼 잘 돌아오는 것도 중요하겠네요.

그럼요. 전 히피처럼 살고 싶었던사람이라, 여행 다녀와서 뿌리내리는 게 참 힘들었어요. 붕 떠가지고. 와이프 말이, 결혼하고 몇 년간은 절 보면 정신이 다른 세계에 가 있는 것 같았대요. 뭔가를 열심히 하긴 하는데 정신이 저기에 가 있더래요. 그런데 방법은 없더라고요.

 

땀 흘려야 되고, 싫어도 노력해야 되고, 이를 악물고 꾹 참고 하니까 뿌리가 내려지더라고요. 제가 ‘역동적 뿌리내리기’란 말을 하거든요. 떠나는 게 즐겁고 희망차려면 일상에 뿌리를 잘 내려야 돼요. 맨날 떠나면 재미없어요. 여기서 돈도 벌고 열심히 살다가 스트레스가 가득 찼을 때 떠나야 기분이 좋아요. 떠나서는 돌아와서 어떻게 살지 꿈꾸고요. 그런 밸런스가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뿌리내리되 떠나는 걸 꿈꾸는 삶.

 

다녀온 여행을 잘 정리하는 것도 그 밸런스를 맞추는 방법 중 하나라는 생각이 들어요.

여행기는 과거의 이야기를 꺼내오는거잖아요. 몸은 현실에 있지만 과거를 추억하면서 새로운 세계가 만들어져요. 내 기분대로 여행을 즐기는 시공간이요. 그게 굉장히 위로가 돼요. 제가 많은 분들에게 글을 쓰라고 권유하는 이유가, 여행기를 쓰다보면 여행이 더 깊어져요. 사람들은 머릿속에 정리가 된 것이 그냥 글로 나온다고 생각하는데 반만 맞는 말이에요. 물론 마음에 고인 것이 많을수록 다양한 이야기가 나오지만, 쓰지 않으면 아무것도 안 나와요. 부유하다 그냥 잊혀져버려요.

 

 

Editor 김슬 dew@univ.me Photographer 킴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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