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개인주의자다 이런 내가 좋다
문유석 판사

 

“고백해야겠다. 나는 사람들을 뜨겁게 좋아하는 편이 아니다. 오히려 인간 혐오증이 있다고까지 할 수 있다. 세상에서 제일 싫은 것이 회식이고 행사다.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란 노래를 들을 때마다 머릿속에 ‘무슨 근거로?’가 떠오른다.” (책『개인주의자 선언』 중) 이 책을 쓴 법조계의 음유시인(!), 문유석 판사를 만나고 왔다. 만나고 보니 싫은 게 많아도 너~무 많은 이 판사님. 그런데 이상하게도 하나도 안 밉다. 밉기는커녕 고구마 100개 먹은 것처럼 답답했던 속이 뻥 뚫리는 것 같아.

 

문유석 판사

문유석 판사

아무래도 싫은 건 싫다

“모르는 사람이 길거리에서 알아보는 게 생지옥처럼 느껴진다”고 말씀한 적이 있죠.

통제할 수없는 인간관계를 싫어해요. 나는 그를 모르는데, 그는 나를 보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면 두렵죠. 비슷한경험이 있어요. 재수 없는 얘기지만 책에도 썼으니까 해볼게요. 저는 그렇게 크게 의미 있지는 않은 대학(서울대 법학) 수석 중 한 명이어서, 당시 뉴스와잡지에 얼굴을 비치게 됐는데요. 그 바람에 동네 미장원에서도 아주머니들이 수군수군…. 불편했던 기억이 남아있어요. 누군가가 길거리에서 절 알아보는 일은 없이 살아야겠다고 다짐했죠.

 

하지만 때론 모르는 사람과의 관계보다는, 어설프게 아는 사람과의 관계가 생지옥이 되곤 하잖아요.

그렇죠. 슬픈 얘기지만 생면부지의 타인보다도 가까운 인간관계가 사람을 힘들게 해요. 직장 상사와 학교 선배, 동아리 선배, 가족과 친척이 그렇죠. 명절 때 모이면 “너 왜 장가 안 가니?”, “왜 이렇게 살이 쪘어?”, “대학은 어디 들어갔지?”, “좋은 아파트로 이사했다며!” 안테나를 치열하게 곤두세우고 캐물어요. 결국은 경쟁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걱정해주는 것 같지만, ‘네가 나보다 잘나가는 게 싫다’는 경쟁. 그리고 이어지는 비교와 질투와 원치않는 간섭까지.

 

대학에서도 이런 관계가 생기곤 해요. 군기를 잡는다든지.

손아랫사람에게 무례하게 구는 일이 많죠. 대학 선배가 후배에게 군기를 잡아요. 규율을 정하고, ‘다나까’ 말투를 강요하고, 애교를 부리도록 시키고…. 하지만 단지 나보다 일 년 먼저 입학했다는 이유로, 특정한 시기에 같은 학교에 각자 등록금을 내고 다닌다는 이유만으로 부당한 요구에 응해야 하나요? 인간적인 관계를 맺었다면 또 몰라.그저 같은 학교를 나왔기 때문에 간섭할 권리가 있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이 많은데요. 그럴 땐 그래서 뭐? So what? 이라고 답하고 싶어요.

 

이럴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죠?

지금은 21세기니까 다들 ‘쿨’해져도 괜찮지 않을까요. 각자 자기의 영역을 지키면 되잖아요. 특히 ‘군기’라는 말은 사라지면 좋겠어요. 그건 군대라는 특수 집단에서 통용되는 것이지, 사회 전체를 아우르는 미덕이 아니니까요.

 

개인주의자는 박해 받을 일이 많아요. 학교에서도, 사회에서도 환영 받지 못하고요. 하지만 판사님의 책은 벌써 5쇄를 찍었고, SNS에선 이 책에 공감한다는 이들이 많네요. 그런데 왜 다들 개인주의자로 보이기 싫어서 안간힘을 쓸까요?

개인주의자로 낙인찍히면 손해를 보는 문화가 있는 것 같아요. “쟤는 학과의 단합을 해쳐”, “회사에 충성하지 않아”, 심지어는 “국가와 민족의 단합까지도 해친다”는 말까지 듣게 될 수 있거든요. 게다가 요즘은 취업이 생존 문제와 직결돼 있는데요. ‘원하는 인재상이 아니다’라는 말을 들으면 그간의 노력이 물거품으로 돌아 가잖아요. 그러니 기성세대가 바라는 ‘훌륭한 젊은이’상에 따를 수밖에요. ‘으쌰으쌰 ’를 잘 하거나 부당한명령에도 충성스럽게 따르는 사람, 그리고 조직을 위해 내 한 몸 희생할 수 있는 사람이 집단에서 환영받는다는 사실을 잘 아니까요.

 

속마음과는 다른 행동을 하고 있다는 얘기죠?

속을 들여다보면 모두 비슷해요. 누구든 자유와 행복을 추구하며, 남에게 휘둘리길 원치 않죠. 하지만 진짜 속마음을 드러내면 불이익이 생기니까 가만있는 것 아닐까요. 그러니 솔직하고 자유로워야 할 학생 시절부터 일찌감치 가면을 쓰는 거죠. 그러다보면 집단 생활에 적응하려고 오버하는 사람들이 생겨나고, 남은 사람들도 어쩔 수 없이 과하게 행동하게 돼요. 결국 꼬리가 몸통을 흔들 듯, 한 줌도 안 되는 소수가 다수를 마음대로 좌지우지해요.

 

판사님은 사람들이 선망할 코스를 밟아왔어요. 서울대 법대 졸업, 사법고시 합격, 판사 재직, 안정적인 가정을 꾸리는 중. 그래서 ‘개인주의자 선언’을 할 여유가 생긴 게 아닐까요? 20대는 지금껏 남의 시선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교육을 받았어요. 한 사람의 정체성은 시험 결과나 윗사람의 평가 혹은 어디에 소속되어 있느냐로 결정 나죠. 이런 20대에게 ‘개인주의자임을 선언하라’고 요구할 수 있을까요?

맞는 말이에요. 무책임하죠. 저야 지금은 제 앞가림을 할 만하니 책을 쓰고 있지만, 사실 취업은 생존의 문제잖아요. 제가 살아온 시대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생존 경쟁이 어려워졌어요. 이런 와중에 20대 분들에게 “당당해져라” 라고 말하는 것도 전형적인 꼰대질인 것 같아요.

이런 질문을 종종 받아요. 예를 들어 “저는 신입사원인데 회식도 싫고 강압적인 위계질서도 거북해요. 그럼 들이받아야 하나요?” 들이받으라고 대답 못 해요. 저도 초임 판사 때는 못 했고요. 비겁하게 들리겠지만 어느 정도는 타협하라고 말하겠어요.

 

예를 들면 어떻게 타협을 하죠?

내 목소리를 내되 직접적인 충돌은 피하기를 권해요. 상대가 납득할 만한 핑계를 대는 거예요. 전 회식을 싫어해요. 하지만 사소한 회식 하나도 빠지는 게 쉽지 않았어요.빠지겠다고 하면 이런 말이 돌아오니까요. “법원장이 주최하는 회식에 어떻게 초임 판사가 빠져?” 그래서 폭탄주를 마셔야 할 때마다 누구 돌아가셨다고 했어요. 그러고 보니 일가친척들을 두 번씩 돌아가시게 만들었네.

 

법원에서도 그런 일이 생기나요?

저희도 인사 평가를 하니까요. ‘조직 적응력’이 평가 항목에 들어 있어요. 회식에 빠지면 하(下)가 되겠죠?(웃음) 또는 “머리는 좋을지 모르나 사회성이 부족함.” 대한민국에서 사회성 부족하면 그거 최악이잖아요. 가치관이 다른 다수를 혼자 투쟁으로 바꾸려면 좋은 결과를 얻지 못할뿐더러 제가 크게 상처를 받겠더라고요. 핑계를 대서라도 제 자유를 확보하려고 노력했어요.

 

"비슷한 사람들끼리 끊임없이 역적모의(!)를 해야 돼요."

“비슷한 사람들끼리 끊임없이 역적모의(!)를 해야 돼요.”

 

나는 당신의 멘토가 될 수 없다

판사님은 유머를 즐기고, 상대를 유쾌하게 해주는 분이에요. 군중 속에서도 잘 어울리고 사람들과의 거리도 잘 유지하는 비결, 그러니까 ‘호감가는 개인주의자’로 사는 법이 궁금해요.

위에서 말씀드린 사례는, 제가 얻은 혜택이 많았기 때문에 가능했어요. 그나마 법원이 다른 곳보다는 심하지 않은 조직이라 저 같은 성향으로도 버텨온 거예요. 기업에서 저처럼 행동한다면 살아남는다고 보장할 수 없어요. 그래서 저는 누군가의 멘토가 될 수 없어요. 『개인주의자 선언』은 문유석이라는 한 사람의 특수한 입장에서 솔직한 이야기를 쓴 것이기 때문에, 각자의 생존 전략은 다를 수밖에 없죠.

 

그렇다면 개인주의자인 20대가 자신의 행복을 지키면서도 잘 어울리며 살 방법이 있을까요?

혼자 힘으론 안 돼요. 모두에게 똑같이 적용되는 비결은 없지만, 모두에게 유일한 비결이 있다면 ‘내 편을 많이 만든다’예요. 만약 제가 폭탄주와 회식을 싫어 한다는 걸 혼자 꿍하게 품고 있다면, 이 문화는 영영 바뀌지 않겠죠. 비슷한 사람들끼리 끊임없이 역적모의(!)를 해야 돼요.

조금 더 용기 있고 자유로운 처지의 사람들이 먼저 말을 꺼내면, 남은 사람들이 겁먹지 말고 “맞아~ 맞아~” 리액션을 해줘서 여론을 형성하는 거죠. 저도 나름대로 손을 들고 얘길 한거예요. 조금 더 자유로운 처지에 있으니까. 하지만 20대에게도 당당히 선언해, 라고 하는 건 무책임한것 같아요. 가능할 때 의사 표시를 하고, 동조하면서 이 사회의 대세를 바꾸면 좋겠어요.

 

판사님은 책에서 이렇게 말씀했어요. “한국 사회에서 투사가 되기 싫으면 연기자라도 되어야 한다”고. 하지만 발연기는 티가 나잖아요. 저는 연기를 잘 못합니다…. 연기자도 되기 어려운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하죠?(동공 지진)

슬프네요. 심정은 충분히 이해가 되는데. 연기 학원을 다니면서 노오오력을 해야 하나?(웃음) 장난이고요. 사실은 제가 실천적인 어드바이스를 드릴 만한 사람이 아닐뿐더러, 그런 팁을 드리고 싶지도 않아요. 너무 슬픈 일이잖아요. 연기자라도 된다는 게 좋은 것도 아니고요. 그리고 저도 아마 발연기를 했을 거예요. 그래도 그럭저럭 살아갈 수 있었던 건 그나마 헌법상 신분이 보장되는 판사였으니까요. 싫어도 자를 수 없잖아요. 아마 제가 기업에 들어갔다면 뻣뻣하게 살 순 없었겠죠.

 

판사님의 뻣뻣한 모습, 상상이 잘 안 되는데요.

아닌 것 같으면 아니라고 말하는 편이었어요. 다만 웃으면서 말했을 뿐이었죠. 싸우는 걸 싫어하니까 핑계를 댔고요. 하지만 핑계를 댄다고 용서되진 않아요. 아이와의 약속보다도 일이 더 중요하게 여겨지는 시대였으니까요. 그래도 전 그런 변명을 했어요. 저도 상대방의 표정을 보면 알아요. ‘저 새낀 뭐지?’라는 속마음이 들려와요.(웃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짬밥이 생기면, 조심스럽게 말하는 거죠. “폭탄주 안 마시는 게 트렌드예요. 구글도 그렇고 삼성도 그렇고”, “회식 때 파스타 먹고 영화 보면 멋쟁이로 소문날 걸요~” 계속 말하다 보니 쑥스럽네요. 판사랍시고 이런 얘기를 하는 게 시시한 것 아닌가 싶고.(웃음)

 

개인주의자와 사회부적응자는 어떻게 다르죠?

우리나라에선 ‘개인주의’를 이기주의나 사회부적응으로 받아들이기도 하지만, 역사적으로 보면 근대 르네상스 이후에 나온 개념이에요. 종교와 왕권에서 해방된 개인들이 공화국을 만들고 지금에 이르렀어요. 나의 권리를 위해, 다수와 손을 잡고 왕과 귀족의 목을 베면서 싸워온 ‘개인’들이에요. 국가와 민족을 위해 개인이 있는 게 아니라, 개인이 먼저 존재함을 뜻하는 개념이고요.

만약 개인주의를 이기주의로 본다면, 홉스가 말했듯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상태로 넘어가겠죠. 그렇다면 약육강식이 지배하는 조폭 중심의 사회가 될 거예요. 그럼 다수는 노예로 살 수 밖에 없어요. 그래서 약한 개인들이 자기 권리와 이익을 보장하려고 계약을 맺어 사회를 만드는 거예요. 그래서 개인주의는 사회부적응과 달라요. ‘개인의 자유를 보장하기 위한 사회’를 전제로 출발하니까요.

 

‘개인주의자 선언’은 취향의 다름을 인정한다는 뜻이기도 한 것 같은데요. 사람마다 분노하고 행복해하는 지점이 달라요. 어느 기자는 “간장종지 요청을 거부당해서” 분노하고, 또 어떤 의대생은 “여자친구가 전화를 잠결에 성의 없게 받아서” 폭발하죠. 이럴 땐 물리적으로든 권력으로든 강자가 약자를 짓누르면서 문제가 생겨요. 이렇게 다른 우리들이 잘 어울리며 살아가는 방법이 궁금합니다.

약자인 개인이 힘을 합쳐야죠. 그대로 내버려두면 약육강식 세상이 돼요. 강자가 갑질하며 폭력을 행사하고…. 하지만 절망할일만은 아니에요. 지금 우리가 누리는 수준도 엄청나요. 불과 몇 십년 전까지 여성은 투표권을 행사할 수 없었고, 사람들은 강간에 관대했어요.

인류가 걸어온 몇 십만년 끝에, 최근 200년 사이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자유주의와 법치국가가 발전된 거예요. 그러니 1인 1표가 우리의 마지막 밑천이에요. 여성도 노약자도 권력을 바꿀 수 있으니까요.

 

 

Editor 조아라 ahrajo@univ.me

Photographer 배승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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