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왕따 당한 적이 있어.” 마음과 마음사이에 다리가 놓였다고 느낄 때, 성급하게 내뱉고 싶어진다. 그러나 이내 정신을 차리고 입을 다문다. 상대의 눈동자가 당황으로 물들면 기껏 지어놓은 그 다리가 허물어지는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열세 살짜리들을 모아 놓은 곳에도 권력관계가 존재한다. 나는 그때 반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여자애에게 밉보여 6개월 동안 친구 없는 학교생활을 했다. 방학이 끝나고, 그 아이는 마음이 풀렸는지(이유는 모른다) 내게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말을 걸어왔다. 반 전체가 ‘얼음 땡’ 놀이를 하는데, 몇 달 동안 ‘얼음’ 상태로 방치됐다가 갑자기 터치를 당해 원래대로 돌아간 느낌이었다.
그래, 돌이켜보면 ‘얼음 땡’ 놀이만큼이나 하찮은 추억의 한 조각일 수 있다. 하지만 그 ‘얼음’ 안에서 몇 달을 견뎌야 했던 나는 외롭고 추웠다. 살면서 누구에게도 그 일을 말하지 않았다. 그때의 감정을 떠올리면 아파서가 아니다. 누군가에게 ‘왕따 당했던 애’라고 기억되는 게 싫어서였다.
어쩌다 포착되는 나의 모난 행동이, ‘그래서 그런 일을 당했던’ 이유이자 단서로 규정될까 봐 두려웠던 것이다. 사람들은 자꾸 사건의 원인을 피해자에게서 찾는다. “대체 어떻게 했으면” “근데 걔도 잘한 거 없어” “부풀린 거 아니야?” 가해자가 합당한 벌을 받길 바란 피해자는 이런 말을 듣는다. 그게 무서워서 침묵하는 이들에겐 동정과 찜찜함이 뒤섞인 시선이 따라붙는다.
<마을-아치아라의 비밀>에는 이런 장면이 나온다. 혜진은 지숙을 성폭행해 자신을 낳게 한, 괴물 같은 생물학적 아버지에게 복수를 하러 간다. 그런 혜진을 붙들고 지숙은 애원한다. 그냥 조용히 돌아가자고. 그깟 진실이 뭐가 중요하냐고. 그냥 ‘살자’고. 이미 피해자가 돼버린 그 날을 돌이킬 수 없는 한, 중요한 것은 앞으로의 생이다.
손가락질, 낙인, 어떤 특수한 존재로 규정되는 것. 그로부터 자유롭기 위해 지숙은 그날의 일을 몇십 년 동안 침묵하고 부정했다. 추문이 빠르고 단단하게 뿌리내리는 작은 마을에서 보통의 인간으로 살기 위해. 어쩌면 피해자들을 더 두렵게 하는 것은 그들 곁에 있는 사람들일지도 모른다.
같은 커뮤니티에서 관계를 맺는, 사건의 주인공이 된 이후에도 얼굴을 보며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 “거짓말 아냐?” “자기도 책임이 있는 거지.” “그렇다고 연인 사이에 신고를 하냐?” 한 마디씩 툭툭 내뱉고, 그들에게 끈적한 눈길을 보내는 바로 우리.
Editor 김슬 dew@univ.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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