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 말도 맞고, 니 말도 맞고, 니 말ㄷ…
– 카피라이터 김하나

분야에서 성공을 거둔 사람들에게는 자기만의 방식이 있기 마련이다. 좋은 결과물을 가능케 한 그들만의 방식은 ‘스타일’이라는 이름으로 장려되곤 한다. 그러나 <SK텔레콤-현대생활백서>, <네이버-세상의 모든 지식> 등 굵직굵직한 히트 광고에 참여한 카피라이터 김하나는 바로 그 ‘스타일’이 스스로를 가둔다고 말한다. 자기 스타일을 깨는 농담을 만날 때마다 붙인 태그들, 그 결과물이 지난 10월 출간한 책 『내가 정말 좋아하는 농담』이다. 얘기를 나누는 내내 마음이 편안했다. 말을 더듬을 때마다 “기자 분 말이 느려 참 좋다”는 위로를 들었고, 약간 멍청한 질문을 했다 싶어 눈치를 보면 ‘오, 그렇게도 생각할 수 있네. 재밌다’는 눈빛을 돌려받았다. 책 속 한 문장처럼 “냉소주의자가 아닌 정신승리자만이 폐허에서도 희망을” 본다.

 

카피라이터 김하나

카피라이터 김하나

 

원칙을세우지 않겠다는 원칙

보통 저자들은 편집부에서 붙인 책 제목에 불만이 많던데 작가님은『내가 정말 좋아하는 농담』이라는 제목이 마음에 쏙 들었다면서요? 본인이 붙인 제목은 뭐였기에….

어떤 지식이든 쌓아두지만 말고 꿰어 연결해보자, 거기에서 창의성이 나오지 않겠느냐는 얘길하고 싶었거든요. 그래서 ‘지(知)의 연결’이었어요. 지금이 40년대도 아니고.(웃음) ‘내가 좋아하는 농담’이라는 제목에는 내가 하려던 말이 훨씬 유연하게 반영돼 있잖아요. 뉘앙스도 부드럽고. 제목뿐 아니라 편집자님과의 갈등이 거의 없었어요. 원고를 훌훌 읽으셨대요. 저도 표지를 보자마자 맘에 들었고. 제 그림을 넣은 것도 편집자님의 제안이었어요. 그림을 배운 적도 없고 낙서만 가끔 한 건데. 내부 디자인도 너무 맘에들어요. 결국 내 책 칭찬인가….

 

책을 읽으면서 가장 놀라웠던 게 사례의 다양함이에요. 요즘 정보가 워낙 많아서 기록하고 정리하는 게 쉽지 않을 텐데, 주제에 딱 들어 맞는 이야깃거리들이 페이지마다 살뜰히 들어 있더라고요.

깊숙하게 파질 못하고, 얕고 넓게 찔러 보는 스타일이에요. 제가 원래 그런데 카피라이터 일을 꽤 오래 했으니 더 발달이 됐겠죠. 같이 일하는 친구 말이, 너는 아주 사소한 것에도 태그를 붙이고 있는 것 같다, 그래요. 얼마 전에 ‘안과 겉’이라는 테마로 글을 하나 썼는데, 시작은 깻잎이었어요. 아는 국장님이랑 고기를 먹는데, 깻잎을 반대로 싸먹으면 털이 입에 안 닿아서 더 맛있다고 하시더라고요. 재밌잖아요. 그래서 뒤집었을 때 더 좋은 것들을 더 떠올리고, 글까지 쓰게 된 거예요. 이를테면 양면 잠바나 누드김밥 같은 거. 재밌는 걸 보고 태그를 붙일 땐 꼭 감탄사가 나와요. 오! 오!

 

첫 챕터의 테마가 ‘배제’예요. 뭔가를 배제했을 때 의미가 더 풍부해진 사례들. 그러다보니 오히려 작가님이 절대 배제하고 싶지 않은 것이 무엇일지 궁금해졌어요.

배제하고 싶지 않은 건 너무 많고요, 원칙을 굳이 정하자면 원칙을 정하지 않는 게 원칙이랄까요? 좀 더 유연하게 생각하는 습관은 계속 유지하고 싶어요. 조훈현 9단이 “그래 봤자 바둑. 그래도 바둑”이라고 하셨다던데, 전 “그래 봤자 인간. 그래도 인간”이라고 생각해요. 이 미물들은 항상 실수를 반복하고 세상을 타락시키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꼭 어딘가에는 남의 불행을 외면하지 못해서 자기 인생을 던지는 사람들이 있잖아요. 그 양쪽을 항상 같이 생각하려 해요.

 

책을 보면 작가님에게는 주변의 모든 것이 아이디어의 소재가 되는 것 같아요. 그런데 일상에서 아이디어를 발견한다는 건 말처럼 간단하지 않아요. 더 잘 발견하기 위해 무엇부터 시작하면 좋을까요?

일을 하다가 어떤 방식이 통한다 싶으면 그게 자기 스타일이 돼요. 스타일대로만 하다보면 자기한테 갇히는 거죠. 저도 그럴 무렵, 안 좋은 일이 겹쳐 힘든 시기를 보내다가 커뮤니티를 만들었어요. 여러 명이 모여서 영화도 보고 술도 마시는. 살려고 만든 거죠. 그 전까지 저는 말 몇 마디 해보고 속으로 사람을 판단했어요. 넌 내 과는 아니다, 넌 아웃이다, 이런 식으로. 근데 이 모임이 살아야 내가 사니까 오히려 제가 사람들에게 다가가서 얘기를 많이 했어요. 그렇게 모임을 운영한 게 3년인데, 그때 체질 개선이 된 것 같아요. 다양한 사람들의 얘기를 자꾸 듣다보니 재밌고, 재밌으니까 마음이 활짝 열린 거예요.

멕시코 현대미술을 좋아하는 사람이랑은 같이 전시를 보러 가고, 또 다른 친구랑은 대학로 극장에 승무를 보러 가고. 그러면서 조금씩 열린 거예요. 그때 친했던 친구 중 한 명이랑 배스킨라빈스에 갔어요. 전 늘 초콜릿만 먹거든요. 그게 제일 맛있으니까. 근데 이 친구는 괴이한 아이스크림이 새로 나오면 엄청 흥분하면서 그걸 먹어요. 얼마나 이상한지 먹어봐야겠다고. 아이디어도 그런 것 같아요. ‘구려’ 하고 바로 돌아서는 게 아니라 감탄할 수 있는 거. ‘저렇게구릴 수 있다니!’

 

전 “그래 봤자 인간. 그래도 인간”이라고 생각해요.

전 “그래 봤자 인간. 그래도 인간”이라고 생각해요.

 

함부로 충고하지 말라는 충고

책에 유난히 ‘하하’, ‘푸하하’가 많이 나와요. 전 사실 황희 정승이 생각났어요. 작가님은 A를 보고는 ‘아 이거 재밌네’, B를 보면 ‘어라, 이것도 재밌네’라고 하실 것 같아서. 평소에도 비관보단 낙관의 비율이 높으실 것 같아요.

예전보단 지금이 훨씬 더 낙관적이죠. 세상이 좋아지고 있다고 보긴 힘들지만, 나빠지고 있기만 한 것도 아니잖아요. 세상은 그냥 그렇게 흘러가는 거지. 옛날 함무라비 법전에도 “요즘 것들 버릇없어”라고 적혀 있다면서요.(웃음) 예전엔 불합리한 것을 보고 많이 분노했다면, 지금은 어떻게 개선할 수 있을지 생각해요. 조금 다르게 생각해보게 되는 거죠. 앞서 말한 모임의 힘이 커요. 다양한 사람들의 별의별 짓들을 들여다보면 또 나름의 재미가 있다는 걸 알았으니까요. 다른 세계를 인정하다보면 더 많은 것들을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 같아요. 그러고 나니 오히려 제가 더 편안해졌어요. 누구를 만나든 어떤 책을 읽든 조금 더 유연해진 것 같아요, 황희 정승처럼.

 

저는 원래 늘 ‘열린 사람’이라고 자신해왔는데, 요즘 점점 내 안에 갇히고 있다는 느낌을 받아요. 유연한 작가님도 가끔은 스스로를 가둘 때가 있을 텐데요.

그럼요. 이를테면 이런 거예요. 실연 뒤엔 꼭 연락을 하고 싶어지잖아요. 그럴 땐 주변 친구들이 다 말려요. 나중에 이불킥한다고. 그걸 어떻게 알까요? 자기도 해봤으니까. 꼰대들이 자주 하는 실수 있잖아요. “내가 해봐서 아는데….” 내가 해봐서 알면 남들도 해보고 깨달아야죠. 충고를 한다는 건 내가 너보다 더 많이 안다는 건데 그것도 결국 갇힌 지식이에요. 갇힌 지식이 잘못은 아니에요. 여기까지가 A고 여기부터는 B야, 이런 벽이 있어야 지식을 받아들일 수 있거든요. 근데 그 벽을 바삭 하고 부수는 힘이 농담에 있어요. 꼬마들은 머릿속에 벽이 없어서 “화장실 가고 싶으면 오른손을 드세요”라는 말에 “그럼 안 마려워져요?”라고 묻는단 말이죠. 내 지식의 벽이 부서지는 게 재밌어서 쓴 책이 『내가 정말 좋아하는 농담』이에요.

 

좋은 컨디션을 오래 유지하는 것만큼 컨디션이 나쁠 때 무너지지 않고 버티는 게 중요하잖아요. 작가님은 힘들 때 어떻게 이겨내시나요?
축척을 달리하려고 노력해요. 내 마음을 종일들여다보는 대신 서울, 한국, 아시아 대륙, 지구, 우리 은하, 이런 식으로 위에서 내려다보는 거죠. 난 사실 개미 떼보다도 더 작은 개체다, 내 우울함은 이 우주에서 아무것도 아니다, 생각하다보면 좀 나아질 때가 있거든요. 근데 정말 힘들 땐 서울, 한국쯤 가다가 ‘으으윽’ 하고 무너져요. 어쩔 수 없어요. 무너져야 해소될 때가 있기 마련이니까.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천천히 들여다보고 생각하는 것만으로 삶이 윤택해질 수 있을 거라 생각해요.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천천히 들여다보고 생각하는 것만으로 삶이 윤택해질 수 있을 거라 생각해요.

 

작가님은 많은 사람들의 얘기를 들어보고 거기서 새로운 의미를 찾으시는 것 같아요. 그런데 전 마음이 자꾸 조급해져요. 워낙 볼 것도 많고 많은 지식이 요구되는 세상이라, 좋다고 인정받은 것들만 골라 봐야 할 것 같아서요.

저도 조급해요. 좋다는 영화는 다 보고 싶고, 좋다는 곳은 다 가보고 싶으니까. 그런데 미국시인 에밀리 디킨슨은 평생 한 마을 안에서만 살았어요. 나중에는 집에서도 안 나오고. 그 사람의 세계는 그 집과 책, 그리고 정원뿐이었거든요. 정원을 굉장히 열심히 가꿨는데 햇빛이 어디를 비추는지, 식물들이 매일 얼마만큼 자라는지를 관찰했대요. 그 사람은 정원에서 소우주를 느끼고 그게 아름다운 시로 나타난거예요. 단순한 삶 속에 창의적인 의미들이 가득했던 거죠. 그러니까 내가 보려고만 한다면 시간에 쫓길 필요 없이, 남들이 하는 거 다 할 필요 없이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천천히 들여다보고 생각하는 것만으로 삶이 윤택해질 수 있을 거라 생각해요.

 

맞아요! 그런데 다른 사람이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하찮게 여기면 속상해요. 회사에서는 또 나름의 평가 기준이 있으니까 그걸 무시할 수도 없고.

그래서 제가 회사를 못 다녀요. 회사 다닐 때는 한 브랜드를 맡으면, 이미 성격·역사·이름이 다 정해져 있고 그에 맞는 아이디어와 카피를 쓰는 게 제 일이었어요. 가장 가까이서 소비자를 만나는 지점. ‘현대생활백서’의 300개가 넘는 카피 중에 많은 것들을 제가 썼거든요. 지금은 브랜드 이름을 만드는 친구 한 명이랑 둘이서 브랜드의 콘셉트를 설정하는 것에서부터 소비자에게 전달하는 것까지 도맡아해요. 광고라기보다는 브랜딩에 포커스가 맞춰져 있죠. 사실 의뢰인이 저희한테 무엇을 요구하느냐에 따라 어떤 일을 할지가 달라져요. 최근엔 영화제 작업도 했는데, 뭔가의 성격을규정해나간다는 게 더 재밌는 것 같아요. 급하지도 않고.

 

많은 사람들이 스페셜리스트와 제너럴리스트를 구분하잖아요. 본인이 둘 중 무엇에 더 가깝다고 생각하세요?

저는 항상 스페셜리스트가 되고 싶어요. 광고회사에서도 전체적인 것을 조율하는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보다는 카피라이터로 끝까지 남고 싶었거든요. 근데 스페셜리스트가 되려면 스스로 제너럴리스트처럼 살아야 하는 것 같아요. 좋은 광고 캠페인만 보고, 좋은 글만 읽는다고해서 좋은 카피를 쓰는 게 아니거든요. 온갖 잡다한 것들을 얇고 넓게 훑어봐야 돼요. 제가 하는 일 자체는 아주 좁은 영역이지만 저를 통해 수많은 것들이 흘러갈 수 있으면 좋겠어요.

 

Editor 기명균 kikiki@univ.me Photographer 킴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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