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야흐로 연애가 제철이다. 과일이나 해산물에만 제철이 있는 게 아니다. 연애의 제철은 가을에 시작되어 크리스마스 및 각종 데이가 포진한 겨울, 꽃비가 우수수 쏟아지는 봄까지 간다. 찬바람이 불면 박씨 물고 오는 제비처럼 소개팅이나 수작도 슬슬 불어오기 마련이고, 가을의 초입인 9월 17일은 그날부터 사귀면 크리스마스가 100일이라는 이유로 고백데이의 자리를 꿰찼다. 그렇다. 그때 사귄 커플이 있다면 푸처핸접? 당신들 곧 100일이네요. 크리스마스가 코앞에 닥쳤다는 뜻이다.
이 시기가 되면 사람들은 팔 한쪽, 다리 한쪽을 내주는 한이 있더라도 두 손을 맞부딪쳐 애인을 연성할 만큼 절박해진다. 아니 도대체, 크리스마스가 뭐기에? 어릴 때는 울면 산타 할아버지가 선물 안 준다고 협박하더니, 이제는 그날을 애인과 보내는 것이 지상 과제인 양 제시된다. 크리스마스에 뭐하느냐는 질문은 주로 오지랖이나(어휴, 애인도 안 만들고 뭐했어), 연민(아~ 그럼 케빈이랑 보내요?)으로 수렴된다.
그러다보니 인터넷에는 “수면제를 먹고 3일 뒤에 일어나겠다.”, “이번 크리스마스도 케빈과 함께” 같은 자조 섞인 한탄이 넘쳐난다. 그렇다고 연애하면 크리스마스가 반드시 할렐루야인가 하니, 그건 또 그거 나름대로 아니라서 더 환장. 애인과 보낸다고 하면 높은 확률로 성희롱이 돌아오거나(오, 뜨거운 밤?) ‘어떻게’ 특별한 날을 보낼 것인지 읊어야 하는 상황에 놓이기도 한다.
‘하필’ 크리스마스에 싸우거나 뻥 차이는 비극의 주인공이 되지 않으려면 크리스마스에 맞게 그 날의 일정을 기획하는 것도 필요하다. 이를테면 식당이나 숙박업소를 미리 예약하는 신속함이나, 크리스마스 한정이랍시고 제공되는 단일 메뉴를 기꺼이 즐길 수 있는 쿨함 같은 것들 말이다.
김애란의 소설 「성탄특선」에는 한 커플이 크리스마스를 맞아 큰 맘 먹고 ‘기분’을 내려다 낭패를 보는 과정이 나타난다. 평소 얄팍한 지갑 사정으로 호텔 등을 이용해본 적 없던 이들에게 크리스마스의 숙박업소 대란은 예상치 못한 변수이다. 그들은 이렇게나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나 일사분란하게, 특정 날짜의 특정 시간에 특정 공간으로 특정 행위를 하러 들어간다는 사실에 위화감을 느끼며 헤맨다.
결국 발이 퉁퉁 부어 허름한 여인숙에 들어가지만, 지저분하고 남루한 그곳은 로맨틱한 크리스마스의 풍경과는 거리가 멀어도 너무 멀다. 건너편 방에서는 이주 노동자들이 시끄럽게 떠들며 술을 마시고, 치고받고 싸운다. 그들은 결국 울먹이며 그곳으로부터 달아나듯 도망치고, 여자는 집으로 돌아간다.
여자가 외박할 줄 알았던 동거인은 만신창이가 되어 돌아온 여자를 보고 의아한 표정을 짓는다. 크리스마스의 낭만적이고 풍요로운 이미지는 이렇게 획일화되어 있고, 자본주의와 밀접하게 결탁해 있다.
그리고 그것은 삶의 결만큼이나 무수한 크리스마스‘들’을 은폐한다. 수능시험 날 세상의 모든 열아홉은 고3으로 호출되고, 모든 고3은 수능 응시생으로 소환되듯이, 크리스마스가 유효하지 않은 누군가의 ‘12월 24일’ 역시 지워지는 것이다.
기념일은 평범한 하루에 의미를 기입해서 특별함을 생산한다. 크리스마스는 아기 예수의 탄생을 축하하는 의미가 깊으므로 그날의 테마가 ‘사랑’이라는 것에는 별 이의가 없다. 그러나 문제가 되는 지점은, 그 사랑이 연애의 형식으로만 작동하는 경우이다. 그래서 묻는다. 연애, 혹은 데이트하지 않는 크리스마스는 애인과 보내는 크리스마스보다 열등한가?그렇다면 애인 없이 지내온 당신의 무수한 크리스마스들은 단지 그 이유만으로 청승맞고 부끄러운가? 가족이나 친구, 혹은 당신 스스로는 애인보다 덜 귀한 존재인가?
작년 12월, 「계간홀로」 6호에서는 크리스마스 계획을 익명으로 제보 받아 무작위로 게재했다. 다양한 크리스마스의 풍경들이 거기 있었다. 가족이나 친구와 하는 파티, 혼자서 조용하게 취하는 휴식, ‘최애캐’와의 모니터 데이트, 오빠들과의 1대 5000 미팅(콘서트), 짧은 여행, 단기 아르바이트, <해리포터> 영화 1편부터 달리기…. 이 크리스마스들은 그 자체로 잘만 굴러갔다.
비단 크리스마스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특별한 날의 솔로는 언제나 커플 옆에 소외된 형태로 희화화되어 나타난다. 그날의 특별함이 선사하는 기쁨을 만끽하려면 옆에 누구 하나는 껴야만 하는 것처럼 보이고, 이쯤 되면 애인은 게임의 물약 같은 ‘템’인가 하는 의심이 든다.
우리에게 아주 익숙하고 진부한 이미지들이 있다. 꽃놀이를 하는 커플 옆의 외로운 솔로, 우산 하나를 나눠 쓴 커플 옆에서 비 맞는 솔로, 캐럴이 울려 퍼지는 거리에서 데이트하는 커플과 혼자 트리 밑에서 ‘TV나 보고 있는’ 솔로들 말이다. 단지 연애를 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함께할 사람이 없는 ‘혼자’로 환원되고, 세상 외로움과 청승은 혼자 다 짊어진 꼬라지로 그려지는 것이다.
아오 진짜, 쫌! 이러한 공포는 효율적으로 배제와 편입의 욕망을 자극한다. 그 속에서 연애하지 않는 삶은 그 자체로 존재할 수 없고, 존재해서는 안되며, 하루빨리 ‘탈출’해야 하는 ‘짠한’ 상태이다. 지난 12월 18일 신촌 메가박스 M관에서는 일명 ‘솔로관 시즌 2’를 진행했는데, 이것도 결국 ‘솔로 탈출’이 콘셉트로, 취향 테스트를 거친 남녀 100명이 로맨틱한 영화를 보며 새로운 만남을 추구하는 기획이었다. 이처럼 솔로는 언제나 연애 상비군이거나 구제 대상으로 호출된다.
자유는 비단 ‘~할 자유’에만 해당되지 않는다. ‘~하지 않을 자유’ 없는 자유는 ‘~해야 하는 강요’에 불과하다. ‘짠한’ 솔로의 상태를 벗어나 어서 ‘분홍분홍’한 커플의 세계에 진입하라는 요청은, 핑크 빛을 띠고 있지만 엄연한 강제이자 연애 이외의 삶을 평가하고 재단하는 폭력이다. 연애하는 이들에게는 크리스마스에 데이트할 자유가 있다. 그 날 만나지 않는 커플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연애하지 않는 이들이 그날 데이트를 하지 않는 것은 짠하거나 슬픈 일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생활의 양식일 뿐이다.
봄이든, 여름이든, 가을이든, 겨울이든, 하다못해 메리 크리스마스든, 전혀 특별하지 않은 365일 중 어느 하루든, 반드시 무언가를 해야 하는 당위는 없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연애나 데이트를 선택하지 않을 자유가 있다. 제철 과일이라고 해서 반드시 먹어야 할 필요는 없듯이.
단지 연애가 당신의 삶에서 비켜나 있다는 사실만으로, 벚꽃이나 해수욕장의 수평선이나 크리스마스트리의 불빛이 왜 눈물 젖은 풍경이 되어야 하는가? 착각하지 말자, 그 계절을 만끽할 감수성과 감각은 애인이 한 명이든 백 명이든 상관없이 공평하게 분배되어 있고, 연말의 빨간 날을 즐기는 방법은 사람마다 제각각이기 마련이다.
그러니 솔로여, 이 연애의 한복판이 그대를 발로 찰지라도, 크리스마스 계획을 불라며 오지라퍼가 머리채를 잡더라도 기죽지 말고, 울지 말고, 억하심정으로 나랑 안 만나주는 뫄뫄 욕하지 말고, 아무나 걸리라는 심정으로 여기저기 ‘자니…?’ 카톡 난사하지 말고, 씩씩하게 맛있는 거 먹으면서 2015년을 돌아보도록 하자.
아무 계획 없이 실컷 늦잠을 자고 빈둥거린들 어떤가. 어떤 억압에 대해서는 때때로 심드렁하게 불참을 선언하는 것이 효과적인 저항이 된다.
크리스마스가~ 별거냐?(후비적)
Freelancer 『계간홀로』 편집장 이진송 alone.is.nothing@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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