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당신의 책을, 나는 나의 책을
얼마 전 방콕을 다녀왔다. 비행기에서 출입국 신고서를 쓰는데, 직업란에 굳이 ‘잡지 기자’라고 썼다. 난 내가 잡지 기자인 게 좋다. 잡지 기자라는 게 부끄러운 순간은 “기자니까 책 진짜 많이 읽으시겠네요”라는 말을 들을 때뿐이다. 아, 이 문장을 쓰는 순간 부끄러워졌다. 기왕 부끄러워진 김에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책을 지지리도 안 읽는다. 그래서 매년 새해 계획 1번은 ‘책 30권 읽기’다. 상반기 15권, 하반기 15권. 물론 단 한 번도 성공한 적 없다. 하지만 안 될 걸 뻔히 알면서도 포기할 수 없는 것이 있지 않은가. 내게 ‘책 30권 읽기’는 그런 존재다.
그래도 올해는 조금 희망적이다. ‘묵독 파티’란 걸 알게 됐기 때문이다. 도서 추천 서비스 ‘플라이북’에서 진행하는 ‘묵독 파티’는 같은 책을 읽고 여러 명이 토론을 하는 식의 부담스러운 자리가 아니다. ‘고정 멤버들 사이에 끼지 못해 쭈뼛대진 않을까’ 하는 걱정을 할 필요도 없다. 그냥 정해진 시간과 장소에 각자 읽고 싶은 책을 한 권씩 들고 모여 자신의 책을 묵묵히 독파하면 된다.
거기서 지켜야 하는 약속은 단 하나다. 책을 읽는 두 시간만큼은 전자 기기를 끄고 오롯이 활자에만 집중하는 것. 이러다간 올해 누군가 취미를 물으면 얼굴 빨개지지 않고 ‘독서’라 말할 수 있는 날이 올지도 모르겠다. 물론 아침에 일어날 수만 있다면…. 매주 토요일 아침 10시부터 12시까지 상수와 논현의 카페에서 진행. 플라이북 채널 통해 사전 참여 신청.
김슬 dew@univ.me
행복의 시작은 귀 호강으로부터
화제가 됐던 안정환, 김성주의 MBC <마리텔> 생방송. 안정환은 나이트클럽에서 남녀가 귓속말하는 상황을 이야기하며 “귓볼에 말하면 훅 달아오르죠!”라고 말해 빅웃음을 줬다. 나는 귓속말은 아니었지만 이 녀석 덕분에 훅 달아올랐다. 몇 달 전 회사 동료가 경매로 내놓은 블루투스 스피커 ‘UE MINI BOOM’. 한 손에 쏙 들어오는 여행용 스피커를 찾고 있었던지라 냉큼 득템했다.
크기가 워낙 작아 음향의 퀄리티는 기대하지 않았다. 오직 휴대하기 편리한 점만 생각하고 샀다. 그러다 저번 주에 휴가를 떠나며 이 요물을 챙겨 갔다. 호사를 부려 빌린 널찍한 실외 공간에서도 스피커는 자연의 소리에 묻히지 않고 웅장함을 내뿜었다. 그러면서도 소리에 전혀 잡음이 끼지 않았다. 발리의 따뜻한 햇살을 받으며 스피커를 타고 흐르는 ‘최애’ 플레이 리스트를 들으니 이것이 바로 신선놀음!
좋은 소리를 실컷 들으며 귀 호강한 덕분에 여행 내내 행복했다. 기분 좋아지는 데 대단한 게 필요한 건 아니다. 좋은 소리로 내 귀를 간지럽힐 작은 스피커 하나면 더없이 충분하다.
이민석 min@univ.me
당신의 판타지를 시작할 차례
연말에 갑자기 마음이 바빠져서 지난 1년을 정리하고 다음 1년을 준비하는 데 소홀했다. 새해가 밝고 나서야 부랴부랴 야심찬 목표를 하나 세웠다. 영화 <해리포터> 시리즈 돌파하기. 그동안 책으로도 영화로도 호그와트 마법학교에 입학하지 못했던 건 판타지에 대한 거부감 때문이었다.
당장 이번 달 월세를 입금해야 하고, 이번 주 마감을 끝내야 하는데 무슨 뜬구름 잡는 소리냐고 투덜거리며 거부했다. 대신 <살인의 추억>, <박하사탕>처럼 구질구질한 영화를 몇 번씩 다시 보면서. 그러나 머글이 뭔지, 헤르미온느가 누군지 모르는 사람이 나뿐이라는 걸 깨닫고는 뒤늦게 만학도가 되어보기로 했다.
개봉한 지 15년이 훌쩍 지난 후 드디어 보게 된 <해리포터와 마법사의 돌>에 대한 감상은 ‘재미’라기보다 ‘감동’이다. 친척들에게 이상한 놈이라고 구박만 받던 해리포터가 호그와트에 들어와서야 비로소 본인의 특별함을 인정받는 순간, 올해 이 목표만은 꼭 지켜야겠다고 다짐했다. 당신도 어디선가 누군가에게는 특별한 사람이라고 말해주는 것 같아서. 판타지 영화처럼 생각한 대로 이루어지는 순간이 언젠가는 찾아올 거라는 믿음을 건네받은 것 같아서.
기명균 kikiki@univ.me
낯선 질문에서 출발하기
일상에서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을 묻는 낯선 질문은, 그 순간 우리 자신을 해체했다가 다시 구성하게 만든다. 만일 ‘아무 것도 가진 것 없이 낯선 도시에서’ 삶을 새로 시작할 수 있다면 무엇을 할 것인가? 망설임 끝에 우리가 입을 열게 된다면, 어쩌면 그 대답 속에 우리가 원하는 진짜 삶이 들어있을지도 모른다. 이곳이 아닌 저곳에서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희망, 아이러니하게도 그것은 결국 ‘이곳’에서의 삶을 새로이 쓰게 만든다. 이곳의 삶을 더 나아지게 하고 싶은 사람만이 그런 상상을 할 것이므로.
그렇다면 이런 질문은 어떨까? 우리 자신이 바로 우리가 이르고자 한 그 여행의 목적지라면, 우리는 그곳을 얼마나 걸어 보았을까? 어쩌면 하나의 골목만을 걷고서 그곳을 알 만큼 안다 여기는 것은 아닐까? 아직 우리가 탐험해보지 못한 수많은 가능성의 골목이 그곳에 숨어 있진 않을까? 이런 질문을 받은 마음으로, 그리하여 대답을 찾는 마음으로, 권나무의 ‘여행’을 듣는다. ‘다시, 시작’이란 게 있다면 그래야 하지 않을까. 내가 품고 있는 진짜를 고민하는 것. 아주 낯선 질문에서 출발해 ‘나’라는 세계의 가본 적 없는 구석에 이르는 것.
김신지 sirin@univ.me
나의 첫번째 슈즈
‘덕통사고’는 사소한 데서 시작하는 것 같다. 처음 마셨던 우도 땅콩막걸리. 비 내리는 제주도 게스트하우스에서 연거푸 마셨다. 처음 만졌던 피아노 건반. 혼자선 동전도 못 세는 코 찔찔이였지만 88개 건반만큼은 다 내 것 같았다. 지금도 술집에선 “여기 땅콩막걸리요~”를 외치고, 카페에 피아노가 있으면 “이거 쳐봐도 돼요?”라고 묻는다. 그러니까 좋은 시작은 삶을 바꿀 수도 있다는 얘기다.
무라카미 류의 『교코』에도 중요한 시작이 나온다. 교코가 ‘살사 슈즈’를 처음으로 선물 받는 장면이다. 어릴 적 미군부대 옆에 살았던 그녀는 호세라는 미군과 친구가 됐다. 호세는 교코에게 슈즈를 선물하고 살사도 가르쳐줬다. 교코의 말을 빌리면 “첫 박자를 들을 때부터 가슴이 두근거렸다.” 호세가 떠난 뒤에도, 교코는 십 년 넘게 혼자 살사를 췄다. 어른이 된 그녀는 호세를 만나려고 미국에 간다. “나 이렇게 살사 잘 춘다~”는 걸 보여주려고. 하지만 오랜만에 만난 호세는 에이즈가 악화돼 그녀를 기억하지 못했다. 교코는 호세를 고향 쿠바로 데려다주기 위해 다시 여행을 시작한다. 여행하면서 그녀는 더 강하고 아름다워진다.
좋은 시작은 나를 지금까지와는 다른 사람으로 만든다. 그래서 나는 다음주부터 OO을 시작해보려고 한다. 아직은 비밀이다. 진짜 좋아하게 된다면 다시 얘기해야지.
조아라 ahrajo@univ.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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