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초에 부풀어 오르는 건 여러 가지다. 올해는 운동할 수 있을 거란 믿음, 전보단 외국어를 잘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 책도 영화도 많이 보고 읽겠다는 다짐, 술 덜 마시고 건강한 음식을 먹겠다는 약속, 더 좋은 글을 쓰겠다는 희망 등등. 그중에 제일은 일 년 치 새 달력을 펼쳐놓고 꿈꾸는 여행에 대한 상상(혹은 몽상)이다.

 

어쩌면 내 속에는 ‘떠나고 싶은 욕구’를 담는 그릇이 있다. 살다보면 이런저런 이유로 욕구들은 마일리지처럼 차곡차곡 쌓이고, 결국엔 가득 차게 된다. 그 순간, 그릇은 폭발물로 변한다. 당장에 떠나지 않으면 뻥하고 터져버리는 폭탄! 그래서 늘 꿈꾸던 내 여행은,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 다급하게 완성되기 일쑤이다.

 

평소에 하릴없이 ‘가고 싶다’고만 되뇌던 여행지들이 죄다 후보로 오른다. 여행 가능한 날짜를 쭉 끌어모으면, 후보지 중 몇 곳이 탈락한다. 일정이 넉넉하면 가까운 나라가, 일정이 빠듯하면 먼 나라가 물러나는 거다.

 

좁혀진 선택지 중 최종 목적지를 고르는 건 동행하는 사람이나 내 지갑 사정의 몫(…)으로 남는다. 그리고 선택한 장소를 내 멋대로 흠모하며 여행 계획을 짠다.

 

서점으로 달려가 여행 책을 두어 권 사고, 인터넷을 뒤지고, 그 나라가 배경인 영화를 챙겨 보고, 어설픈 여행 회화를 열심히 외운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순간, 어쩌면 여행 그 자체보다도 더 달콤한 시간이다.

 

작년 여름에 홍콩 여행을 떠났을 때도 비슷한 흐름이었지만, 동행하는 친구의 단순함 덕분에 빠른 진행이 가능했다. 게다가 그녀는 여행을 떠나기도 전에, 훌륭한 여행 메이트 자질을 뽐냈다. 나보다 3.2배는 빠른 항공권과 숙소 검색, 예약 능력. 느린 의사결정과 우유부단함으로 나를 거의 여행사 직원으로 만들어버리곤 했던 뭇 동행인들과 달랐다. 올레!

 

그러나 그 누가 장점만 있으랴. 그녀가 지도를 보고 길 찾는 게 서툰 건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았다. 누구와 여행하든 길 찾기는 나의 몫이었으니까. 당황스러운 부분은 다른 데있었다. 나보다 체력도 지구력도 좋은 그녀가, 너무 일찍 지쳐버렸던 것이다….

 

몸의 문제가 아니었다. 알고 보니 친구는 여행을 굉장히 느슨하게 하는 스타일이었다. 계획 같은 것도 없이, 심지어 숙소도 정하지 않고 여행길을 나선 적도 있다고 했다. 그런데 나처럼 하고 싶은 것도 가고 싶은 곳도 많은 여행자와 함께하려니 얼마나 피곤했을지. 그 마음 아는데도 나는 또 내 스타일을 못 버리고 발만 동동거리다가 시큰둥한 친구 때문에 입이 삐쭉 나오다가 했다.

 

다음 날에는 오전 11시에 예약해둔 프렌치 레스토랑에 브런치를 먹으러 가기로 했다. 골동품 가게가 죽 늘어서 있어서 고풍스러우면서도 올드한 느낌을 주는 캣 스트리트, 그 사이에 위치한 가게였다. 새빨갛고 번쩍번쩍 금빛이 나는 중국풍 가게들 사이를 지나면서 ‘이런 데 프렌치 레스토랑이 있다고?’ 의아했다.

 

레스토랑이 얼마나 숨어 있던지 근처 골목을 세 번쯤 뱅뱅 돌고 난 후에야 벽인 척서 있던 입구를 찾아냈다. 레스토랑에 들어서자 탄성을 삼켜야 했다. 분위기는 완벽했고, 식사는 환상적이었다. 창밖 풍경은 올드한데 가게 내부는 그래피티와 유명 아티스트들의 작품으로 흡사 미술관 같아 묘한 조화를 만들어냈다.

 

코스 요리에서 는 식전 빵부터 데니쉬, 크루아상, 바게트 등이 잔뜩 담긴 바구니가 등장했다. 우리는 금세 황홀해졌다. 가장 좋았던 건, 와인과 칵테일을 마음껏 마실 수 있다는 것. 바닥을 보일 새 없이 재깍재깍 잔에 채워지는 프랑스산 로제와인은 어렴풋한 장미향이 풍겼고 특별 레시피로 만들어진 칵테일들은 오렌지, 석류, 카시스등 상큼한 맛이 났다.

 

첫 손님으로 가게에 들어섰던 우리는, 브런치 타임이 끝날 때까지 아주 천천히 식사를 즐기며 끊임없는 대화를 나눴다. 주제는 엄청나게 중구난방이었지만 계속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그 모든 게 하나로 이어져 있다고 느껴졌다.

 

식사가 끝나고 생글거리는 백발의 홀 매니저의 배웅을 받으며 문 밖으로 나왔다. 뜨거운 햇빛이 우리를 잡아먹을 것처럼 덮쳤다. 하지만 취기가 부른 괜한 흥분감 덕분에 아랑곳하지 않고 아무 방향으로나 걸었다.

 

그다음 일정은 잊은 지 오래였다. 향냄새가 풍기는 방향으로 걸어 오래된 사원을 기웃거리고, 외국인들을 따라가다 뒷골목에 괜찮은 와인바도 찜해뒀다. 정처 없이 휘적거리며 걷다가 로컬의 대형 슈퍼마켓에 들어설 때쯤 취기는 슬슬 가라앉고 있었다.

 

귀여운 패키지의 우유, 아무렇게나 포장된 치즈를 둘러보다 맥주 코너 앞에 섰다. 처음 보는 외국 맥주들이 늘어서 있었다. 아…. 넋을 빼앗긴 나를 보고 친구가 속삭였다. “이거 잔뜩 사서 마실까? 숙소 가져가서 마시면 되겠다!”

 

시계를 보니 아직 3시 반. 여행이 한창 계속되어야 할 시간이었다. 그런데 숙소로 돌아가다니? 그제서야 잊고 있던 계획들이 다시 떠올랐다. 홍콩 오면 사려고 했던 물건들, 꼭 들르려 했던 홍차 가게, 무슨 무슨 영화에 나왔다는 거리….

 

스마트폰 속 구글맵에 찍혀 있는 장소들을 다 들르려면 하루가 모자랄 판이었다. 그렇지만 결국 30분 후의 나는, 친구와 함께 호텔로 돌아가 창가에 맥주와 안주를 죽 늘어놓고 널브러져 있었다. 커다랗게 틀어놓은 음악과 낯선 맛의 맥주들, 멀리 보이는 항구와 빽빽한 홍콩 거리가 가까우면서도 아득하게 느껴졌다. 그냥, 좋았다.

 

어쩌면 나는 깨달은 것이다. 길을 잃지 않기위해 길을 찾아두는 것보다, 길이란 것 자체를 잊어버리는 게 훨씬 자유롭다는 것을. 한국에서, 서울에서, 일상에서 살아가며 방황하지 않기 위해 면밀히 계획을 세우고 수정하던 나를, 이국의 땅에서도 벗어나지 못했었구나. 낯선 곳에서는 무엇이든 던져버려도 좋을 것이다. 아마도 그러기 위해 떠나온 것일 테니.

 

이후에는 계획 따위 곱게 접었다. 미련이 남는 곳 몇 군데를 빼고는 미적미적 다녔다. 예전엔 쓱 보고 지나쳤던 미드레벨 에스컬레이터도 시간이 많으니까 끝까지 가봤다.

 

예상했던 것보다 3배는 길어서 후회할 뻔했지만, 그럴 때마다 에스컬레이터 양옆으로 펼쳐지는 로컬 레스토랑들, 스페인 바, 아이스크림 가게들이 눈을 번쩍 뜨게 만들었다. 꼭대기로 올라갈수록 홍콩 사람들의 일상이 묻어 있는 풍경이 보였는데, 그게 또 좋았다.

 

남의 맨션에 기웃 기웃거리면서 구석에 핀 꽃들 사진도 찍었다. 물론 계획 없이 다녔다고 운 좋은 일만 생긴 건 아니다. 덕분에 마지막 날 저녁엔 캄캄해지도록 식사도 못하고 헤맸다.

 

포기하고 라면이나 사다먹자, 하며 호텔 근처 편의점에 가던 길에 푸드코트 간판을 봤다. 싸늘하게 생긴 철문이라 별 기대 없이 문을 열었는데, 맙소사. 현지인들과 외국인들이 섞여 북적북적한 게 파티라도 열린 분위기였다.

 

우리는 거기서 이름도 모르는 베트남 생선 요리를 먹었다. 어떻게 이렇게 맛있는 걸 이런 허름한 곳에서 팔지? 친구와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물론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아서, 나는 여전히 계획 없인 불안하고 벼락치기는 꿈도 못 꾸는 소심쟁이다.

 

하지만 무계획이 나쁜 게 아니란 걸 알았으니까. 오히려 더 좋을 수 있단 것도 알았으니까. 언제든 아무렇게나 살 기회를 노리고 있다. 2016년은 특히, 자주 그렇게 살려고 한다.

 

Illustrator 전하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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