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 취미가 뭐냐고 물어오면 쉽게 대답하지 못한다. 취미가 없어서가 아니다. 취미가 많아도 너무 많아서다. 게다가 단발성으로 하다 만것들이 수두룩하다보니 ‘취미가 뭐다’라고 딱 집어 말하기 애매한 것이다.

 

한때는 그림을 그리겠다며 드로잉북과 색연필을 장만했고, 컬러링북을 사들였다. 갑자기 캘리그라피가 하고 싶어서 만년필을 샀다. 루피망고 모자도 뜨고, 길가다가 뭔가에 홀린 듯 나노블럭을 사기도 했다. 그리고 이번에 꽂힌 건, 다름아닌 ‘커팅북’.

 

 

드라마 <치즈인더트랩>을 보던 중 유정 선배가 꺼내든 그것을 보고는 당장 검색을 해봤다. 미술고자들도 손쉽게 할 수 있다는 블로거들의 설명에 ‘에이 이거 너무 쉬운거 아냐?’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리고 그자리에서 책을 주문했다.

 

주문할때까지도 뭔지 잘 몰랐지만 그냥 (주문자가) 내스타일이었다

 

 

배달의 민족답게 하루만에 책이 왔다. 허겁지겁 박스를 여니 책과 커팅매트와 커터가 뾰로롱 나왔다. 뭔가 고풍스러운 분위기가 풍기는 게 굉장히 고급스러운 취미생활을 하나 더 가지게 된 것 같아 뿌듯해졌다. 벌써부터 너무 들떠서 사진이고 뭐고 얼른 커팅아트를 하고 싶었다. (그래서 나중에 사진을 확인해보니 포커스가 다 나가있더라. 미안…)

 

 

첫 도전은 유정선배가 했던 그 ‘나비’. 생각보다 자잘한 무늬를 보고 당황했지만 이 정도 날카로운 커터라면 손쉽게 할 수 있겠지 라며 자기 위로를 했다. 평소 칼질로는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았기에 조금 자신만만하기도 했다. 현란한 손놀림으로 척사광이 된 에디터는 이참에 갈고 닦은 동방쌍룡을 구사해주리라 다짐하며 칼을 집어들었다.

 

 

그런데, 막상 종이에 칼을 딱 대자 척사광은 개뿔 이기광의 래핑보다 묵직한 커터의 느낌에 당황, ‘어 이게 아닌데’ 싶다. 생각보다 칼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깔끔하게 잘리지 않고 뭔가 지저분하다. ‘쉽게 할 수 있다’고 써놨던 블로거들이 원망스러웠다. 길태미들인가. 똥손도 할 수 있다며 나에게 근자감을 심어줬었는데….

 

 

고작 요거 하는 데 30분이 걸렸다. 울퉁불퉁하고 지저분해서 할 수 있다면 처음부터 하고 싶었다. 색칠은 지우면 되지만, 칼질이라는 건 이렇게 후회가 남는 일이었구나. 조금만 힘을 잘못 줘도 그대로 잘려나가니 고도의 집중력이 필요했다. 평소 안구건조증이 있는데 눈알이 심하게 아파왔다. 수시로 인공눈물을 넣으며 눈물의 칼질을 해댔다. 고개를 푹 숙이다보니 어깨가 결려왔고, 손에 하도 힘을 줘서 손가락도 아파왔다.

 

 

시간이 지날수록 칼질이 능숙해졌다. 이젠 이 커터로 나한일처럼 짚베기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끝처리도 깔끔하다. 요령이 생기다보니 훨씬 수월해졌고 재미도 있었다. 다만 저 지옥같은 동그라미들은 여전히 낯설다. 직선은 쉽고 빠르게 할 수 있는데, 동그라미는 어떻게 해도 깔끔하지 못하다. 펀치로 뚫고 싶은 욕구가 수도 없이 들끓었다. 없던 환공포증까지 생길정도였다.

 

 

그리고 드디어 날개 한쪽을 완성했다!! 약 3시간만에!!!!!! 어깨는 뻣뻣하게 굳어 있었고, 손에는 굳은살이 배길 것 같았다. 그래도 점점 나비가 모양을 찾아가는 과정을 보니 가슴이 벅차올랐다. 얼른 남은 날개도 만들어주고 싶었다.

 

 

그리고 또 3시간 뒤, 드디어 나비가 본 모습을 드러냈다. 어느새 퇴근 시간이 다가왔다. 평소에는 그렇게 시간이 안 가더니 커팅아트를 하니까 시간이 순식간에 흐른다. (요즘같은 날 날도 추운데 어디 나가지 말고 집에서 이것만 해도 좋을 것 같다.) 출근해서 하루 종일 칼질만 했다고 생각하니 조금 시간낭비 같기도 했지만 그래도 즐거웠다. (회사에서 업무시간에 업무 핑계로 취미생활을 당당하게 할 수 있는 좋은회사)

 

 

완성품을 보니 그 어느때보다 뿌듯했다. 사무실 곳곳을 돌아다니며 사진을 찍었다. 괜히 열심히 일하고 있는 에디터들한테 가서 “이거 만들었다”고 자랑을 하며 눈살 찌푸리게도 했다. 야! 신난다! 눈도 어깨도 손도 아픈데 이렇게 뿌듯하니 중독성이 장난 아니다. 나비를 완성하자마자 곧바로 다른 도안을 잘라냈다. 또 해야지!

 

작품명: 달리(feat. 백장미)

 

 

‘뭐시기 북’하면서 취미 조장하는 책들이 다 그렇지만, 아무 생각 없이 하기에 딱 좋다. 추워서 밖에 나가기 싫은 날이라던가, TV 보는 것도 귀찮을 때라던가. 병문안 선물로도 딱일 것 같다. 아니면 그냥 나처럼 시간 때우기로 써도 되고. 컬러링 북 보다는 훨씬 생산적인 활동이 될 거다. 하고 나면 예쁜 게 남거든.

 

아무래도 이번 취미생활은 조금 오래 갈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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