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승옥 소설 <무진기행>을 추천하면 항상 돌아오는 대답이 있어요. “고등학교 교과서에서 본 것 같아. 제목만.”
저도 <무진기행>을 수능 지문으로 봤을 땐 어렵고 난해하다고만 생각했습니다. 소설 전체를 읽은 게 아니라, 문제 풀이를 위해 조각조각 잘린 부분만 봐서 그랬겠지요. 그런데 소설 전문을 책으로 읽으니 그때와는 사뭇 달랐습니다. 여러분도 그러실 거에요. 특히 지금 어딘가로 도망치고 싶은 사람이라면 크게 와 닿을 겁니다.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무진기행>은 화자 ‘희중’이 무진을 여행하는 동안에 겪은 일입니다. 그가 무진에 도착하면서 시작되고, 무진을 떠나면서 끝이 나죠.
희중에게 무진은 특별한 도시입니다. 6•25전쟁이 일어났을 때. 그는 홀어머니의 강압에 못 이겨 군대에 가지 않고, 무진의 골방에 숨어 있었습니다. 이웃집 젊은이의 전사 통지가 날아 올 때. 그 수치심을 떠올리면, 차라리 전장에 나가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했지만 끝끝내 그러지 못했죠.
또 4년 전 일자리를 잃고, 동거하던 여자 ‘희’마저 달아나 버렸을 때도 희준는 무진으로 왔습니다. 서울에서의 실패로 도망해야 할 때. 새 출발이 필요할 때. 그는 무진을 찾았습니다.
이번에 무진에 오게 된 건, 전무 승진을 앞두고 입니다. 새 출발을 앞두고 있어요. 되는 일 없던 과거와는 달리 현재 서울에서의 삶은 너무도 안정적입니다. 부잣집 딸을 아내로 맞은 덕이죠. 이전과는 조금 다른 상황. 이번 무진 여행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극 중 안개의 도시로 설명되는 무진은 신비롭고 비밀스러운 분위기를 풍깁니다. 도시를 겹겹이 둘러싼 안개가 원래 있었던 곳으로부터 단절된 느낌을 주지요. 실제로 우리나라 지도 한 켠에 존재할 것만 같은 도시 무진은 가상의 공간이에요. 작가가 워낙 생생하게 묘사해 놓은 통에, 소설이 발표됐을 당시, 많은 문학도들이 서울역에서 ‘무진행 기차표’를 찾았다는 비하인드 스토리도 있습니다.
가상의 공간이기에 무진은 읽는 사람에 따라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습니다. 화자 ‘희준’은 무진을 “그 곳에 가면 나를 숨길 수가 없고 온전히 드러내야만 하며, 끝내 수치스러워지기도 하지만 또다시 찾을 수밖에 없는 곳”이라고 설명하는데요. 사실 모두가 그런 공간을 하나쯤 안고 살아가는 것 같아요. 누군가에겐 고향이, 다른 누군가에겐 유럽이. 그래서 다들 떠나고 싶어 하는 거겠죠.
그곳에서 희준은 인숙을 만납니다. 무진에서 중학생들에게 음악을 가르치는 인숙은 말끝마다 “대학 다닐 때”라는 말을 붙입니다. 그녀는 서울에서 성악을 공부하던 시절을 그리워해요. 그럴 법도 한 게 여자는 푸치니의 ‘어떤 개인날’을 좋아하는데, 이곳 남자들은 그녀에게 ‘목포의 눈물’을 불러 달라고 조르거든요.
인숙은 자신을 무진에서 꺼내 줄 사람을 기다려요. 그런 그녀에게 서울에서 온 남자 (그것도 지위가 있는), 희중은 좋은 상대죠. 인숙은 희중에게 노골적으로 작업(?)을 겁니다. 우연히 함께하게 된 술자리에서 나오자마자, “조금만 바래다 달라”고 말하고 “오빠”라고 부르겠다 합니다. 낯선 도시에서 남자와 여자가 하루밤 사랑에 빠진다. 여기까지는 여행지에서 흔히 일어날 수 있는 스토리입니다. 비슷한 설정이 다른 영화나 소설에서도 자주 등장하고요. <무진기행>이 재미있는 건 희준과 인숙 두 인물이 닮았다는 거예요.
인숙은 희중의 어두운 과거를 떠올리게 하는 여자예요. 생전 처음 본 사람에게, 서울에 데려가 달라고 말할 정도의 절박함. 그 다급한 감정은 과거에 무진을 떠나고 싶었던, 골방 속 희중과 닮았습니다. 인숙과 관계를 맺는 건, 과거의 가장 아팠던 자기 자신과 만나는 것과 같아요. 그녀와 잠깐의 대화를 나눈 후 희중은 밤새 뒤척입니다.
“무진에서는 누구나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다.
타인은 모두 속물들이라고.
나 역시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다.
타인이 하는 모든 행위는
무위와 똑같은 무게밖에 가지고 있지 않은 장난이라고.”
<무진기행> 中
희중은 인숙에게 강렬한 감정을 느꼈지만, 그는 이미 알고 있습니다. 일단 무진을 떠나면 그녀를 쉽게 잊을 거라는 것을요. 제약 회사 전무라는 직책. 든든한 부자 장인어른과, 아내. 그 안락하고 권태로운 삶에 당분간 안주하겠죠.
두 사람은 관계 끝을 뻔히 알고 있었던 것 같아요. 희중은 서울로 돌아 갈 거고, 인숙은 무진에 남게 될 거라는 걸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함께 바다에 가기로 합니다. 어린 아이처럼 희중을 따라오는 여자의 손 잡고 방죽을 걸어요.
“나는 그 방에서 여자의 조바심을,
마치 누군지가 자기의 손에서 칼을 빼앗아 주지 않으면
상대편을 찌르고 말 듯한 절망을 느끼는 사람으로부터
칼을 빼앗듯이,
그 여자의 조바심을 빼앗아 주었다.
그 여자는 처녀는 아니었다.”
<무진기행> 中
“나는 이모에게 소주를 사 오게 하여
취해서 잠이 들 때까지 마셨다.
새벽녘에 잠깐 잠이 깨었다.
나는 이유를 집어낼 수 없이 가슴이 두근거렸는데
그것은 불안이었다.
‘인숙이’하고 나는 중얼거려 보았다.”
<무진기행>中
인숙을 만나고 난 후 남자는 또 불안해 합니다. 죄책감, 자기혐오가 섞인 감정이겠지요. 여행지에서 누군가와 관계를 맺고, 그것에서 불안과 허무함을 느끼는 것. 소설 <무진기행>은 그 내적 갈등 상황을 섬세하게 그려 냅니다.
다음날 희중은 아내로부터 전보를 받습니다. 회의에 참석해야 하니 서울로 급히 복귀하라는 내용이에요. 남자는 아내의 연락을 받고 급하게 현실로 돌아옵니다.
그녀의 메시지를 “당신의 감정은 여행자에게 흔히 주어지는 자유다. 모든 것이 세월에 의해서 잊혀질 것이다”라고 해석해요. 그는 무진에서의 일과 현실 사이에서 갈등하다 타협안을 냅니다. 일단 상경은 하고, 인숙에게는 편지를 남기고 가는 것으로요.
“사랑하고 있다. 서울에 가서 연락하겠다. 그때 와 달라”는 내용의 편지. 그는 편지를 쓰자마자 찢어 버립니다. 부끄러웠던 거죠. 서울에 가서 인숙을 부를 리가 없다는 걸 본인도 알 테니까요.
주인공이 여행을 떠나는 로드 무비나 소설의 전형적인 결말은 성장입니다. 위기에 처한 사람이 여행을 통해 깨달음을 얻고 더 나은 사람이 되는 것.
희중의 무진행은 무엇을 남겼을까요? 아무것도 남지 않았습니다. 굳이 이야기하자면 부끄러움 정도. 무의미했다고 평가할 수도 있어요. 아마 희중은 또다시 무진에 가게 될 겁니다. 그리고 또 다른 ‘인숙’을 만나 같은 질문을 듣겠지요. “특별한 용무도 없이 여행하시면서 왜 혼자 다니세요?”
illustrator li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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