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정말 왜 이런 걸까? 정신 차리고 살아야 하는데…”

스무 살 이후 썼던 다이어리 다섯 권에는 슬픈 얘기만 가득했다. 기쁜 날엔 기숙사 책상 스탠드 아래에서 이따위 다이어리에 뭘 쓸 생각도 못 했다. 나쁘게 차인 얘기, 더럽게 차인 얘기, 사랑받지 못해 안달 난 얘기, 불안한 미래가 구구절절 적혀 있었다. 나름 재밌었다. 즐거운 일기는 그냥 넘겨버릴 정도로.

 

때론 실패담이 듣고 싶을 때가 있다. ‘다들 불행해서 다행이다. 아 불쌍해’식의 자기 위안과 동정 때문이 아니다. 행복한 이야기가 있으면, 그 뒤엔 그것을 위해 간절히 빌며 고생하는 시간이 있기 마련이다. 그걸 생략하는 게 탐탁지 않았다. 특히 TV 드라마의 개연성은 이야기의 명암, 사랑의 양면을 보여주는 데에 있다고 생각한다. 지금 방영 중인 드라마 <한번 더 해피엔딩>은 그 명암의 비율이 적절하다.

 

 

과도한 설정

과거 잘나갔던 걸그룹 출신 한미모(장나라)는 한 번 ‘갔다 온’ 돌싱으로, 재혼 커플 매니지먼트 대표다. 남자 주인공 손수혁(정경호)은 싱글대디다. 대학생 때 만난 사랑이 자신의 아이를 낳다 세상을 떠났다. 그래서 13년간 아무도 사랑하지 못했다. 둘과 삼각관계를 이루는 구해준(권율)은 수혁의 친구이자 머리부터 발끝까지 완벽한 의사(드라마 단골직업)다. 물론 그도 돌싱.

 

미모와 수혁은 알고 보니 초등학교 동창(썸탔던, 심지어 로미오와 줄리오 연극까지 함께한)에다 앞집 뒷집 이웃사촌이다. 안 사귀는 게 더 이상할 정도. 잘생긴 서브남주 해준은 전 부인과 같은 병원에서 일한다. 시시때때로 마주치고, 눈알에 들어간 먼지도 밖에서 불어주는 친구 사이다. 다시 정분이 안 나면 이상할 정도.

 

둘은 첫 회에 술 먹고 혼인신고 할뻔함. 본받아야 할 모습.

 

주축을 이루는 캐릭터를 요약하자면, 억지스럽다. 다른 캐릭터도 마찬가지. 인터넷 쇼핑몰 대표 애란(서인영), 어린 나이에 재벌과 결혼했지만 이혼에 임박한 다정(유다인), 남자에게 늘 당하는 패션테러리스트 동미(유인나)다. 이 세 명은 한미모의 옛 걸그룹 동료이자 친구다.

 

나이가 느껴지는 언니들..

 

그러나 평범한 이야기

‘현실과 동떨어진 설정’은 더이상 드라마를 까는 무기가 될 수 없다. 드라마이기 때문에 억지스러운 캐릭터가 탄생하고, 판타지 같은 주변 환경이 만들어진다. 설정 안에서 무슨 이야기를 하느냐가 중요하다. 인물의 감정선과 갈등 관계가 공감을 줄 수 없다면 누군가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한다. <한번 더 해피엔딩>의 유별난 캐릭터들은 ‘실패한 사랑’이라는 소재 안에서 평범한 메시지를 던진다.

 

미모는 해준에게 말한다. “다칠 걸 알아도 맘껏 사랑한다”고. 조심스레 이리저리 재고 계산하는 해준과 다르다. 물론 그녀도 전남편과의 관계에서는 해준과 같았다. 상처받지 않으려 애쓰고, 징징대고, 무작정 사랑받으려 했다. 이혼 후, 그녀는 생각했다. ‘할 만큼 다 했는데 왜 실패했을까.’ 그리고 그녀는 깨달은 것이다. 마치 우리가 충분히 사랑받았던 연애가 끝난 후, 내 것을 놓지 않고 받으려고만 했던 걸 후회하는 것처럼.

 

다정 또한 꿈 같은 신혼 후 이혼 서류를 들이미는 남편과 함께 산다. 아이가 생기지 않아 힘들었던 그녀. 겨우 아이를 낳아 잘 키우고 있지만, 힘든 시간 동안 서로 할퀸 상처들 때문에 관계는 겉잡을 수 없을 만큼 상해버렸다. 어떻게 돌이켜야 할 지 이제는 엄두도 못 내는 부부. 게다가 다정은 유방암 판정을 받고 가슴 절제수술을 받는다. 수술 전, 용기를 내 그에게 안아달라 말하지만, 돌아오는 답은 ‘네가 안아달라고 하면 내가 안아줘야 하니?’라는 분노다.

 

솔직하게 ‘요즘 나 아프다’고 말하지 못한 다정은 그제야 이혼 서류에 도장을 찍어준다. 내가 준 상처가 어떤지 알고 있어서, 누구보다 사랑했던 사람에게도 쉽사리 내 고통을 털어놓을 수 없는 그녀. 연애도 마찬가지다. 감정이 앞서 일부러 상처 주려 하는 말과 행동은 오히려 내게 더 큰 상처를 입힌다. 더이상 그때의 우리가 아닌 걸 깨달았을 때, 보이는 건 돌아갈 수 없는 까마득한 길뿐.

 

 

처음 드라마를 봤을 땐 결혼도 안 한, 애도 없는 싱글녀가 드라마에 공감할 수 있을까 싶었다. 하지만, 매회 그들이 보이는 고민과 눈물은 어디선가 봤던 익숙한 것이었다. <한번 더 해피엔딩> 이라는 제목 자체도, 지금 사랑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언제나 간절히 원하는 것이니까. 나는 주인공이 아닌데, 이상하게 내 얘기를 하는 드라마임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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