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태 같아 보일 수도 있지만, 사연 있어 보이는 사람을 특별히 좋아합니다. 그 사람이 입을 열고 고이 감춰 둔 이야기를 꺼내려고 할 때. 가까워지는 그 한 뼘의 거리가 좋아요.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낄낄거리는 사람들 틈에서도 꾹 다문 입과 슬픈 눈을 찾아내는 묘한 재주가 생겼습니다.

 

사연은 가끔 사람이 아니라 장소에서 발견되기도 합니다. 우여곡절을 알고 나면 왠지 감정 이입이 되어 그 장소가 애틋하게 느껴져요. 성북동 언덕에 있는 절, 길상사도 그런 곳 중 하나입니다.

 

 

길상사는 김영한이라는 여자가 자신의 전 재산이었던 한식집 ‘대원각’을 법정 스님에게 통째로 시주해 지은 절이에요. 무슨 사연이 있는 사람이길래 자신의 전 재산을 내어놓았을까요. 궁금해하다, 그 여자가 시인 백석의 애인이었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오늘부터 당신은 나의 마누라야. 죽기 전에 우리 사이에 이별 따위는 없을 거야.”

시인 백석의 대표작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는 김영한을 위해 쓴 시라고 합니다. 두 사람은 첫눈에 반해 연애를 시작하게 됐어요. 때는 백석이 시를 잠시 접고 함흥에 와서 학생들에게 영어를 가르치고 있을 시절. 외진 곳에 갑자기 나타난 ‘서울 시인 총각’, 모던보이 백석의 존재는 단연 돋보였습니다.

 

백석

 

그러던 어느 날. 동료 선생의 송별회 자리에서 백석과 김영한은 손님과 기생의 관계로 만납니다. 이런 자리가 낯선 듯 머뭇거리는 김영한에게 백석은 호감을 느껴요. 그리고 그녀에게 적극적으로 다가갑니다.

 


술기운에 얼굴이 불콰해진 백석이 남들 몰래 진향(기생 김영한의 예명)의 손목을 덥석 잡았다. 얼큰하게 취한 백석이 진향의 귀에 대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부터 당신은 나의 마누라야. 죽기 전에 우리 사이에 이별 따위는 없을 거야.”

 

안도현, <백석 평전> 中


 

술에 취해 기생 손목을 잡으며 한 고백. 남들이 보면 가벼워 보일 수 있는 이 행동에 당사자 영한의 마음은 크게 흔들립니다. 백석과의 사랑을 추억하며 쓴 책 <내 사랑 백석>에서 그녀는 그때의 상황을 이렇게 이야기해요. “성급한 당신의 그런 모습이 나에겐 오히려 사랑스러웠다.” 사실 그녀도 백석에게 반했던 거에요.

 

나중에 밝혀진 것이지만 백석은 평소 술을 즐기는 편이 아니었다고 합니다. 영한을 보고 흥분해서 그 마음을 가라앉히느라고 난생처음 과음을 했던 거래요. (그 이후로 다시는 술에 취한 모습을 보인 적이 없다고 하네요!) 영한이 그런 백석의 마음을 오해하지 않고 봐준 덕에 둘은 사랑을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내 이름을 불러 줄 수 있는 분은 이 세상에서 오직 당신뿐”

 

사랑에 빠진 이들은 금세 둘만의 세계를 만듭니다. 백석은 김영한에게 ‘자야’라는 아호를 지어 줘요. 지금으로 치면 애칭인 셈이죠.

 


그날부터 ‘자야’는 이 세상에서 우리 둘만이 알고, 오직 우리 둘만이 서로 통하는 나의 애칭이 되었다. 그 이름을 불러 줄 수 있는 분은 이 세상에서 오직 당신뿐이었다.

 

김자야, <내 사랑 백석> 中


 

춥기로 유명한 함흥의 겨울밤. 둘은 헤어지기 싫어 서로의 집을 오가며 밤을 지새웁니다. “당신 말고 다른 여자는 아예 눈도 주기 싫다.”며 사진관 진열장도 쳐다보지 않는 유난을 떨기도 하고요. 세상에 다시 없이 닭살스러운 연인. 하지만 이들의 사랑에는 치명적인 장애물이 있었습니다.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그의 부모님은 기생이었던 자야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았어요. 더군다나 그 시절은 부모님이 정해준 사람과 결혼해야 하던 때였습니다. 백석은 모던 보이를 자처했지만, 사실 봉건사회에서 완벽하게 자유롭진 못했고요. 부모님과 사회를 저버릴 용기를 내는 것이 쉬운 일을 아니었겠죠. 결국, 그는 부모님의 부름에 서울로 돌아가고, 그곳에서 다른 여자와 결혼까지 합니다.

 

유부남이 되어 다시 함흥으로 돌아온 백석은 자야에게 만주로 도망가서 살자고 해요. 그것이 그가 찾은 해결책이었을 겁니다. 하지만 자야는 그 제안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어요. 그러다 낯선 땅에서 낙오자라도 되면? 그녀가 생각하기에 만주행은 앞길이 창창한 남자의 출세를 막는 일 같았어요. 자야는 백석 몰래 서울로 떠나버립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앞날을 위해 그를 놓아주기로 한 거에요.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중략)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 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백석,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中


 

어디로 간다 말도 없이 떠난 자야 앞에, 어느 날 백석이 쪽지 한 장을 가지고 나타납니다. 그 쪽지에 쓰인 시가 바로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에요. 깊은 산골로 도망가 살자는 마음을 담은 시. 오직 백석만이 할 수 있는 로맨틱한 고백. 자야는 시를 읽고 감격합니다. 그 후 두 사람은 자야의 서울 집에서 잠시 같이 살아요. 꿈만 같던 시절이었죠.

 


당신은 내 입술에 당신의 입술을 포개어
말문을 콱 막아 버린다.
한참 동안 나는 꼼짝도 못 하며
발버둥질만 치다가 드디어 풀려나서,
“왜 당신은 내가 말만 하려고 하면 입을 막아 버리는 거에요?”
하고 뾰로통해진다.

 

(중략)

 

이처럼 우리는 이런 사랑의 입씨름을 하면서도
오순도순 재미있게 살았다.

 

김자야, <내 사랑 백석> 中


“돌아서는 구두 소리가 뚜벅뚜벅 들리다가, 그 소리마저 점점 희미해져 갔다.”

 

좋은 건 왜 계속 되는 법이 없을까요? 행복하던 시절도 잠시. 백석은 부모님의 성화에 못 이겨 두 번째 결혼을 하고, 자야는 자신이 가정을 파괴하는 존재가 되었다는 생각에 소름이 끼쳐 또 도망칩니다. 백석은 다시 그녀를 찾아내 만주로 떠나자고 조르고요. 부모님의 끝없는 압박과 일제 치하에 있는 답답한 현실. 그 반복 속에 두 사람은 지쳐갑니다. 결국 백석은 자야를 설득하는 데 실패하고 혼자서 만주로 떠나요.

 


“그런 불측한 행동을 나로서는 차마 할 수 가 없어요.
이번만큼은 제발 혼자 가주셔요”
“정히 혼자 가라면 혼자 가지!”

 

잠시 후 자리에서 부리나케 일어선 당신은
일체 뒤를 돌아보지 않고 훌쩍 떠나갔다.
돌아서는 구두 소리가 뚜벅뚜벅 들리다가,
그 소리마저 점점 희미해져 갔다.

 

김자야, <내 사랑 백석> 中

 


“내가 평생 모은 돈은 그의 시 한 줄만 못하다.”

 

그렇게 헤어진 후 둘은 다시는 만나지 못했습니다. 자야는 백석이 발표하는 시에서 둘의 사랑의 흔적을 찾아가며 평생 그를 그리워해요.

 


어느 사이에 나는 아내도 없고, 또,
아내와 같이 살던 집도 없어지고,
그 어느 바람 세인 쓸쓸한 거리 끝에 헤메이었다.

 

‘아내와 같이 살던 집’ 당신이 시 속에서 말한 이 집은 우리들의 청진동, 바로 그 집인 것이다. 당신과 함께 따뜻한 등을 붙이고 살던 우리들의 보금자리, 바로 그 사랑의 보금자리였음을 나는 금방 알 수 있었다.

 

김자야, <내 사랑 백석> 中


 

7천여 평의 으리으리한 한식당을 운영하고 있으면서도, 백석과 함께 살던 단칸방을 매일 떠올렸던 그녀. 22살의 예쁜 처녀였던 그녀가 할머니가 됐을 무렵. 자야는 법정 스님의 무소유를 읽고 큰 감명을 받습니다. 그리곤 자기 생에 가장 아름답던 시절으로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스님에게 자신의 한식당을 절로 만들어 주기를 청합니다. 그때 그 절이 지금의 길상사에요.

 

 

그녀에게 한 기자가 1조 원이 넘는 돈을 기부했는데 아깝지 않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니 “내가 평생 모은 돈은 그의 시 한 줄만 못하다. 나에게 그의 시는 쓸쓸한 적막을 시들지 않게 하는 맑고 신선한 생명의 원천수였다”고 답했다네요.

 


 

그들의 사연을 알게 된 후, 길상사를 다시 찾았습니다. 전에는 몰랐는데 맑게 울리는 풍경 소리가 왠지 슬프게 들렸어요. 어떻게 한 사람을 그렇게 오랫동안 사랑할 수 있을까요? 그곳에서 저는 애인이 며칠만 사라져도 흐려지는 제 마음을 질책하고 싶어 졌습니다.

 

 

길상사
위치 서울시 성북구 선잠로5길 길상사
전화번호 02-391-7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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