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라는 호칭보다는 ‘선배’가 익숙하다. 「대학내일」에 들어와 처음 만난 나의 선배. 따끈한 빵을 나눠먹는 사람. “네게 잘 어울리겠다”라며 새 원피스를 내미는 사람. 잉여로운 시간을 즐기면서도, 할 일에 무섭게 몰입하는 사람. 나의 가슴 사이즈를 나 대신 걱정해주는 사람. 좋고 싫음에 꾸밈이 없고, 상대의 예쁜 점을 발견하려는 사람.
에세이집 『별로여도 좋아해줘』의 저자이자, 「대학내일」 콘텐츠팀 부팀장인 정문정 작가를 만났다. 잡지기자로 20대와 소통해온 작가는, 이 책에서도 20대와 할 얘기가 많다. 솔직하고 예민하며 따뜻한 그녀의 책장을 열어본다면,갓 구운 빵 한 조각을 나눠먹는 기분이 들 거다.
몸에도 마음에도 많은 흉터를 가지고 살아가는 나라서 좋아한다.
흉터가 있어서 흉터 있는 사람을 잘 알아보게 된 나를 좋아한다.
언젠가 자식을 낳게 된다면 그 아이에게도 너라서 사랑한다고 말해 주고 싶다.
책 『별로여도 좋아해줘』는 ‘나의 진짜 사이즈’로 시작합니다. “한동안 내 가슴 사이즈가 A컵인 줄 알았다.” 작가님의 내밀한 정보(!)로 화제가 된 글이기도 했죠.
사람들은 쉽게 말해요. “네 피부는 쿨톤이야”, “너 A 컵인 것 같아.” 저도 그 말을 믿으면서, 불편함을 참고 살았죠. 결국은 20대 후반이 되어서야 제가 A컵 이 아니란 사실을 알았어요. 그러니까 ‘나의 진짜 사이즈’가 무엇인지를 알기 전에, 다른 사람 말을 믿어버리면 안 돼요. 내가 생각하는 나는 누구인가를 아는 게 더 중요하다는 글이었어요.
얼굴도, 몸무게도 누구든 조금씩 바뀌잖아요. 변화를 체크하지 않으면 자기를 미워하게 돼요. 만약 누군가가 “너는 이런 사람이야”라고 말한다면, 그 말을 의심하세요.
남의 말을 의심하는 과정은 쉽지 않아요. 다 나를 생각해서 해주는 말이겠거니, 생각하죠. 작가님은 남의 말을 믿고 지내다가, 이건 아니라는 걸 깨달았던 경험이 있어요?
“여자는 반장하면 안 돼”, “여자는 기자 못 해.” 어릴 때 이런 말을 많이 듣고 살았어요. 하지만 커가면서 깨달았죠. 저는 조신한 사람이 아니라는 걸. 사람들은 제게 목소리를 줄이라고 했고, 여성스러워지라고도 조언했어요. 하지만 저는 그렇게 될 수 없었어요. 여성스러운 사람들을 따라해 보기도 했지만 아무리 해도 안 되더라고요.
그래서 단점을 없애기보다는, 장점을 키우는 사람이 되겠다고 생각했죠. 여전히 저는 조신한 사람이 아니지만, 그 덕에 지금은 제가 원하는 일에 조금씩 다가가고 있다는 걸 느껴요.
‘단점을 없애려하기보다는 장점을 키우겠다는 말에 공감해요. 하지만 저는 평소 단점을 없애고 싶다는 생각을 하거든요. 옆 사람에게 피해를 안 주기 위해서라도.
<K팝스타>를 보면서 느꼈는데, JYP와 YG는 달랐어요. JYP는 사람을 깎고 다듬으려고 해요. “너는 이건 좋지만, 이건 나쁘니까 없애.” 반면 YG는 “너는 이게 좋으니까 이걸 최대한 끌어올려보자”고 말하죠. 저를 돌이켜 봐도 단점은 안 바뀌더라고요. 사람마다 타고난 게 있으니까요. 까무잡잡한 제가 아무리 미백크림을 발라도 원래 하얀 사람을 이길 순 없는 것처럼, 장점을 극대화하는 게 제일 좋으면서도 현실적이라고 생각해요.
그러면 작가님이 가장 극대화하려고 했던 장점은 무엇인가요?
어릴 때부터 글쓰기를 좋아했어요. 그때마다 사람들은 조언했었죠.“이 정도로는 전업 작가가 될 수 없어”, “고등학교 때 신춘문예에 등단했어야지”. 비록 사람들이 말하는 루트를 그대로 따르진 못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글쓰기를 계속했고, 잡지 기자가 되고도 계속 글을 썼어요. 그나마 잘하는 일이었으니까요.
“넌 이미 늦었다”는 말을 들을 때, ‘그래도 괜찮지 않을까’라고 생각하는 훈련을 많이 했죠. 언젠가는 할 수 있지 않을까. 계속 하다 보면 언저리에라도 닿지 않을까, 하고
작가님이 간직하고 싶은 단점은 무엇인가요?
‘예민함’이에요. 안 들키려고 노력할 뿐이지, 어떤 말들에 상처를 잘 받거든요. 이것을 고칠 순 없어요. 하지만 단점은 분명 도움이 돼요. 지난해 교통사고를 당해서 4개월 간 병원에 있었는데, 예민하기 때문에 느낄 수 있는 감정들을 경험했어요. ‘이럴 때 비참하구나’, ‘행복하구나’, ‘내 힘으로 어쩔 수 없는 것이 정말 많네’…. 이때 경험으로 ‘슬픔의 환산’이란 글을 썼어요. 단점은 어떤 식으로든 쓰인다는 걸 깨달았죠.
사진기자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예민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못 보는 장소와 빛의 디테일을 볼 수 있잖아요. 제가 가장 좋아하는 말 중 하나가 “너무 공감된다”는 말이에요. 공감되는 지점을 짚어내는 것도, 예민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니까요. 이 불편함이 어디서 왔는지 다들 잊어버릴 때, 전 그걸 기억하고 글로 써요. 버릴 수 없는 단점이자, 동시에 아주 큰 장점이죠.
냉철한 비판자를 주변에 두는 것도 필요하지만, 나를 진심으로 생각해주는 지원자를 옆에 두는 것이 꼭 필요하다는 생각을, 나이를 한 살 한 살 먹을수록 실감한다.
더 멀리 가려는 사람일수록 든든한 마음의 베이스캠프를 마련해야 한다.
제가 보아온 작가님에겐 서로 공존하지 않을 것 같은 두 가지 부분이 동시에 있어요.
예쁨과 귀여움?
…
…
회사 워크숍 때 ‘24시간이 모자라’를 추며 장내를 광란의 절벽으로 몰아넣었던 작가님. 다음날 출근하면 말없이 책을 읽고 있었죠. 그때 작가님의 말이 떠올라요. “조용한 절에 일주일만 있다 오고 싶다….” 저는 이 점이 재밌었어요. 누구나 자기 안에 여러 모습을 갖고 있지만, 보통은 한 가지 모습을 크게 발현하면서 살잖아요. ‘활발한 사람’이라든지, ‘차분한 사람’이라든지.
내가 누구인지 모를 날이 있다면, 우선 판단을 보류하는 게 좋아요. 우린 너무 복잡한 존재니까요. 저는 성당에 다니지만 절에 가는 것도 좋아해요. 예전엔 모든 것에 명확하게 대답하려고 노력했는 데,지금은 굳이 그렇게 하지 않아요. “넌 어떤 사람이야?”, “넌 뭘 좋아해?”라는 질문은, 어쩌면 별 뜻 없이 건넬 때도 쓰는 말이거든요. 킬링타임용 질문일 수도, 의례적인 인사일 수도 있어요.
그럴 땐 정성들여 답하지 않아도 돼요. 말이란 건 무서워서, “나는 이런 사람이에요”라고 말하기 시작하면 정말 그렇게 믿게 되거든요. 스스로‘이게 나의 전부는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 그리고 본인이 본인에게 질문하고 대답하는 게 중요해요.
방금 “본인이 본인에게 질문하는 게 중요하다”고 했는데, 어떤 질문을 던지는 게 도움이 될까요?
‘싫어하는 것’을 묻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예민보스’라는 말도 있듯, 가장 본능적인 감정은 ‘싫음’이거든요. ‘이게 왜 불편하지?’, ‘이 상황이 왜 싫지?’ 저마다 싫은 부분이 분명히 있어요. 그러면 내게 안 맞는 것을 걸러낼 수 있고, 자기를 조금씩 알게 될 거예요.
작가님은 어떤 점을 참을 수 없었어요? 지금의 모습에 영향을 끼친, 작가님의 ‘싫어하는 것’이 궁금합니다.
루틴한 것, 그리고 권위적인 게 싫었어요. 예를 들면 9시부터 6시까지 똑같은 일을 하면 못 참을 것 같았죠. 권위적인 분위기도 마찬가지예요. “어디 여자가 이렇게 해?” “어른한테는 일단 알겠다고 하는 거야.” 어릴 때부터 이런 말은 늘 불편했어요. 대학생 땐 신문사 인턴기자가 된 적이 있었는데요. 정규직 전환이 가능한 자리였지만, ‘병이 나겠구나’ 싶을 만큼 마음이 안 좋더라고요.
저는 모두 짜장면을 시키더라도, 볶음밥을 먹고 싶으면 볶음밥을 시키는 분위기를 좋아해요. 그곳에선 윗사람이 짜장면을 먹고 싶다면 아랫사람들도 다 짜장면을 먹어야 했어요. 그런 식으로 싫은 것들을 걸러내기 시작했죠.
책 날개를 펼쳐보니, 인생의 롤모델로 ‘빨간머리 앤’과 ‘그리스인 조르바’를 꼽았어요. 두 사람은 다른 점이 있는 것 같아요. 조르바는 ‘현재’를 살고, 앤은 ‘미래’를 향한 꿈으로 꽉 찬 소녀니까요. 그들을 롤모델로 선택한 이유가 궁금해요.
사람은 누구든 상충되는 부분을 갖고 있지 않을까요. 한쪽으로 치우치면 돈키호테처럼 될 테고, 미래만 보고 달린다면 번아웃 될 거예요. 우리 모두 생계를 유지하려고 돈을 벌지만, 그렇게만 살다가는 삶이 각박해질지도 몰라요. 전 어릴 때 집안 형편이 좋지 않아서 늘 하날 선택해야 했어요. 하고 싶은 일을 다 미뤘고, 당장 가성비가 좋은 일만 했죠. 그러다보면 여유가 없어지고, 남에게 관대해지지도 못해요.
그럴 때 이 롤모델들이 영감을 줬나요?
『그리스인 조르바』를 보고 머리가 띵 해졌어요. 이 사람은 버찌가 먹고 싶으면 실컷 먹는구나. 다 먹은 다음엔 버찌에 눈도 안 돌리는구나. 예전엔 원하는 게 있으면 참아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이젠 원하는 건 다 해봐야 한다고 생각해요.
『빨간머리 앤』은 약간 다른 의미예요. 앤은 아주 사소한 곳에서 즐거움을 찾아내죠. 인생은 시궁창일지도 모르지만, 좋은 걸 발견하겠다고 마음먹으면 좋은 것들이 보여요. 제가 어떤 사람이 되겠다고 믿기 시작하면, 신기하게도 사람들이 그 모습을 봐주는 것 같아요.
우리가 과거를 아름답게 추억하는 건 쪽팔리는 일들 때문이다.
본전치기만 하는 세상에서 망신당하는 사람들은 잊지 못할 이야기를 만든다.
이건 비행기 타지 않고도 누리는 여행이다.
「대학내일」에 다니는 사람들에게, 기자님은 어떤 분인지를 물어봤어요. 그랬더니 일을 같이 하지 않는 다른 파트 분들도 “긍정적이다”, “밝다”, “에너지가 넘친다”고 하더라고요.
예쁘다는 말은 안하던가요?
긍정적인 분이라고 하셨습니다.
…
사실 밝은 에너지를 주고, 영향력을 끼친다는 점이 부럽기도 했어요. 그런데 책을 읽다보니 이런 구절이 눈에 띄었죠. “나는 긍정적인 말을 많이 하는 편이다, 내가 긍정적이어서가 아니라, 부정적인 인간이기 때문이다.” 많은 이들은 작가님의 어두운 모습을 짐작하지 못해요.
어떤 모습이 강조된다면, 반대의 모습도 분명 있어요. 자신에게 없는 걸 갖고 싶어 하니까요. 그래서 결핍된 걸 크게 말하죠. 만약 제가 한없이 긍정적인 사람이었다면, 말 안 해도 긍정이 퐁퐁 솟아낫겠죠. 하지만 가만히 있으면 저도 쓰레기처럼 느껴질 때가 있어요. “저 사람은 왜 저렇게 예쁠까?” “즐거워 보일까?” 하면서.
책을 읽다 보니까, 실패담이 여럿 나오더라고요. 초등학교 때의 왕따 경험부터, 연애에서의 실패까지. 20대 가운데에도 지난날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이들이 많잖아요. 이럴 때 상처를 완전히 털어내긴 어렵더라도, 의식하지 않으면서 사는 법이 궁금해요.
맞아요. 이 부분 저도 고민 많이 했어요. 잊고 싶은 기억은 왜 꼭 자기 전에 떠오를까? 어떤 의사 선생님이 이렇게 말하더라고요. “나는 풍선이 싫지만, 이유는 안 알아본다. 알아봤자 좋을 게 없으니까.” 그래서 상처나 흑역사는 그냥 놓아두려고 해요. 그냥 거기 있겠구나, 하면서.
저는 ‘생활 기스’란 말을 좋아해요. 뭔가를 하다보면 ‘기스’가 생길 수밖에 없어요. 하지만 그 흠에 집중하다보면 거대한 금으로 느껴지잖아요. 그러니까 그 안으로 깊이 들어갈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요. 그대로 놓아두는 거예요. 나의 못난 부분이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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