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싫어하는 단어지만) “헬조선”이라는 말이 목 끝까지 차오르는 순간들이 있어요. 쥐똥만 한 알바비에서 세금만 왕창 떼어 갈 때. 남들 하는 거 다 하고 성실하게 살았는데, 어느 회사에서도 날 받아 주지 않을 때. ‘아, 이 나라에서 더는 못 살겠다.’는 생각이 절로 들죠. 이럴 바엔 확 이민을 가 버릴까 싶기도 하고요. 왜 호주에서는 접시를 닦아도 지금보다는 넉넉하게 살 수 있다는 말도 있잖아요.
“아니 난 우리나라 행복 지수 순위가 몇 위고 하는 문제는 관심 없어. 내가 행복해지고 싶다고. 그런데 난 여기서는 행복할 수 없어.”
<한국이 싫어서> 61p
장강명 소설 <한국이 싫어서>의 주인공 계나는 우리처럼 생각만 하지 않고, 실제로 한국을 떠납니다. 그렇다고 계나의 상황이 우리보다 크게 나쁜 것도 아니에요. 번듯한 직장도 있고, 애인도 있거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나는 호주로 떠납니다. 왜냐고요? 한국이 싫어서요.
누군가는 계나를 비난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근성이 없다고. 뭐만 하면 나라 탓 한다고. 하지만 무턱대고 이 친구를 욕하기엔 그녀가 처한 상황이 좀 안쓰럽습니다.
일단 계나는 출퇴근을 너무 힘들어 해요. 아침에 지하철 2호선 타고 아현에서 신도림을 거쳐 역삼으로 출근하거든요. 이게 얼마나 지옥인지 그 시간에 2호선을 타 본 사람은 알 거예요. 사람에 부대껴서 몸이 끼이다 못해 뭉개지는 기분.
집은 또 어떻고요. 온 천지에 개미가 들끓고 겨울이면 추워서 방 안에서도 동상이 걸려요. 그래도 남자 친구가 있지 않냐고요? 걔네 부모님이 계나를 얼마나 업신여기는지 아세요? 못 사는 집 자식이라고 말 한 마디 안 걸고, 계나랑 헤어지라고 남친을 들들 볶아요.
내가 여기서는 못 살겠다고 생각하는 건… 난 정말 한국에서는 경쟁력이 없는 인간이야. 무슨 멸종돼야 할 동물 같아. 추위도 너무 잘 타고, 뭘 치열하게 목숨 걸고 하지도 못하고, 물려받은 것도 개뿔 없고. 그런 주제에 까다롭긴 또 더럽게 까다로워요. 직장은 통근 거리가 중요하다느니, 사는 곳 주변에 문화시설이 많으면 좋겠다느니, 하는 일은 자아를 실현할 수 있는 거면 좋겠다느니, 막 그런 걸 따져.
<한국이 싫어서> 11p
물론 앞서 말한 것처럼 계나의 상황이 남들보다 특별히 불행한 것은 아닙니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누군가는 “저 정도 가지고 엄살은.” 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어요. 우리 대부분이 계나처럼 살고 있을 테니까요. 그저 계나는 용기를 냈을 뿐입니다. 여기서는 아무래도 행복하긴 틀린 것 같아서 어디로든 가 보는 거죠. 거기 가서 어떻게 될 지, 정말 한국보다 나은 지는 살아 봐야 알겠지만요.
“한국에서는 딱히 비전이 없으니까. 명문대를 나온 것도 아니고, 집도 지지리 가난하고, 그렇다고 내가 김태희처럼 생긴 것도 아니고. 나 이대로 한국에서 계속 살면 나중엔 지하철 돌아다니면서 폐지 주워야 돼.”
<한국이 싫어서> 44p
남자 친구와도 헤어지고, 부모님 마음에 대못을 박으면서 떠난 계나. 하지만 안타깝게도 호주에서의 삶은 한국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일단 영어가 안 돼서 뭘 할 수가 없어요. 언어가 능숙하지 않으니 구할 수 있는 직장도 한정적이죠. 영어 못하는 워홀러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최저 시급도 받지 못하는 주방 보조뿐입니다.
계나는 태어나서 한 번도 혼자 방을 써 본 적이 없어요. 늘 자매들이랑 한방을 써야 했죠. 호주에 오면 좀 나아지려나 싶었는데 이것도 그대로에요. 워홀러들은 흔히 ‘닭장쉐어’라고 부르는 주거 방식을 선택하거든요? 이게 뭐냐면 젊은 남자 서넛, 젊은 여자 서넛이 집 한 채를 빌려서 같이 사는 거예요. 혼자 써야 할 방을 3명이 나누어 쓰는 거죠.
이것도 갑갑한데 방을 쓰는 사람은 그나마 형편이 좋은 거라네요? 거실에 커튼처럼 천막을 치고 작은 공간을 만든 후에, 거기에 침대를 놓고 사는 사람도 있대요. 바로 계나처럼요. 다른 사람들 떠드는 소리가 그대로 들리고, 누군가 천을 들추고 안으로 들어올 것 같은 두려움에 늘 시달리면서 계나는 살아갑니다.
뭐 그래도 우리 계나 호주 가서 연애는 실컷 합니다. 타국 생활이라는 게 기본적으로 외롭고 쓸쓸하거든요. 별것도 아닌 일에 갑자기 감정이 북받치고 서러워 져요. 외국에 나와서 마음은 붕 떠 있지, 아는 사람 없으니 외롭지, 젊지. 사랑이 싹트지 않는 게 이상하죠.
문제는 그 어떤 놈도 한국에서 만났던 남자 친구 ‘지명이’보다 나은 놈이 없다는 거예요. 계나의 동양적인 외모만 좋아한다거나, 비즈니스용 부인으로 계나를 원한다거나.
댄은 내 몸이 예쁘다고 칭찬했지. 그런데 좀 그 칭찬이 핀트가 안 맞아. 내가 발을 꼬고 앉아 있을 땐 이렇게 말했어. “넌 다리가 짧아서 귀여워.” 니미 썅, 그게 칭찬이냐?
(중략)
나랑 헤어진 다음에도 또 다른 아시안 여자애를 사귀더라고. 나 참, 어이가 없어서. 걘 그냥 취향이었던 거야. 쟤가 지금 사귀는 애랑 나랑 얼굴은 구별할까?
<한국이 싫어서> 71p
그에 비하면 지명이는 예의 바르고, 허세 부리는 것 없고, 다정하고, 책임감 있고. 좋은 놈이었어요. 그녀는 자신이 나이가 조금만 더 많았더라도(현재 27세) 지명과 결혼해 한국에 남았을 거라고 말합니다.
호주에 온 지 4년째. 계나는 한 걸음 한 걸음 호주 정착에 가까워져 갑니다. (영양가 없는 연애 사업은 계속되고, 여전히 고생은 고생대로 하지만^^) 돈도 좀 모았고, 착실히 영어 공부해서 아이엘츠 점수(영주권을 따려면 일정 점수 이상이 필요함)도 잘 받았고, 드디어 그렇게도 바라던 영주권도 취득하게 됐어요.
이제 좀 인생이 풀리나 싶던 차, 계나는 잘못된 사건에 휘말리게 됩니다. 1년만 더 있으면 시민권까지 딸 수 있었는데. 그동안 모은 돈도 다 날리고 전과까지 남게 생긴 거예요.
행복해지려고 무리해서 호주까지 왔는데. 뭐 하나 변한 게 없어요. 4년 동안 뼈 빠지게 일해서 간신히 ‘닭장 셰어’ 신세를 면했는데, 이제 다시 그 지긋지긋한 곳으로 돌아가야 하죠. 알거지가 됐으니까! 셰어 하우스로 이사 하던 날. 고장 난 이민 가방을 옆에 두고 계나는 목 놓아 웁니다.
버스에서 내 이민 가방을 들고 내리는데 버스 계단에 이민 가방 바퀴가 걸려 툭 부러졌어. (중략) 나는 다리에 힘이 풀려 그냥 바닥에 주저앉았어. 그때까지 참고 있던 눈물이 주룩주룩 흘러내렸어. 흐물거리는 이민 가방, 트렁크, 그리고 백팩. (4년 전) 호주에 처음 왔을 때와 짐이 똑같아. 가방이 문제가 아니라 그사이 제대로 된 정착지조차 얻지 못한 내가 문제지.
<한국이 싫어서> 129p
지친 계나에게 방송 기자가 된 전 남친 지명의 연락이 옵니다. 그녀 없이는 못 살 것 같대요. 당장 한국에 돌아오라는 건 아니니, 기다리겠다고. 평생을 기다려도 괜찮다고. 사랑한다고 고백해요. 그 순정에 감동한 계나는 지명을 보러 잠시 한국으로 갑니다.
하지만 계나를 책임지겠다던 지명이는 자신도 지탱하기 힘들어 보여요. 새벽 6시에 일어나서 자정이 돼야 겨우 퇴근하는 삶. 그의 말로는 기자 생활이 ‘원래’ 그렇답니다. 나이 들어도 계속 그렇게 바쁘고 시간이 안 날 거래요.
우리는 뭐랄까, 전래 동화의 의좋은 형제 같은 처지에 빠져 있었지. 지명이는 나를 아껴. 나도 걔를 위하고. 그런데 시간이 지나도 우리 사이에 개선되는 건 아무것도 없고, 밤에 서로 상대 몰래 볏짚을 나르느라 몸만 피곤한 상황이었지.
<한국이 싫어서> 154p
그런 지명이가 아무리 맛있는 걸 사주고, 좋은 걸 해 준들. 계나의 마음은 편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일하다가 암에 걸리는 건 아닌가 싶고. 그 모습을 10년이고 20년이고 보다가는 “그냥 얘는 매일 이렇게 열 몇 시간씩 일하는 애다.”라고, 그렇게 당연하게 여기게 될까 봐 무서워해요.
결국 계나는 지명이와 헤어지고 호주로 돌아가기로 합니다. 여기서는 아무래도 안 될 것 같대요. 아직 행복해지는 방법은 잘 모르겠지만, 호주에서라면 더 쉬울 거라는 직감이 들었답니다.
지명과 두 번째 이별을 결심할 때 고민을 많이 했지. 내가 얘랑 헤어진 다음에 후회하지 않을까 하고. 아마 후회할 거야. 내가 만난 남자들 중 지명이가 제일 괜찮은 애였는데, 하고.
(중략)
사람은 가진 게 없어도 행복해 질 수 있어. 하지만 미래를 두려워하면서 행복해 질 순 없어. 나는 두려워하면서 살고 싶지 않아. 내가 호주에서 산다고 해서 죽기야 하겠어? 기껏해야 괜찮은 남자 못 만나고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면서 사는 거지. 그런데 호주에서는 알바 인생도 나쁘지 않아. 방송 기자랑 버스 기사가 월급이 별로 차이가 안 나.
(중략)
이제 내가 호주로 가는 건 한국이 싫어서가 아니라 내가 행복해지기 위해서야. 아직 행복해지는 방법은 잘 모르겠지만, 호주에서라면 더 쉬울 거라는 직감이 들었어.
<한국이 싫어서> 161p
도대체 어떻게 해야 행복해 질 수 있을까요? 사실 계나가 뭐 대단한 걸 바라는 건 아닙니다. 큰 집도 명품 백도 다 필요 없대요. 그냥 돈 걱정 안 하고 치킨 먹고, 한 달에 한 번 데이트하고. 그게 단데. 매일 웃으면서 살고 싶고, 자존심 지키며 살고 싶다는데. 그게 어찌나 어려운지.
행복을 돈이라고 생각해 봅시다. 크게 두 가지 종류로 나눌 수 있어요. 자산성 행복과 현금 흐름성 행복. 용어가 좀 어려우니 쉽게 말해 볼게요. 자산성 행복은 뭔가를 대단한 것을 성취하는 데서 와요. ‘엄청나게 뿌듯한 기억’ 1개에서 계속 행복이 흘러나오는 거죠. 이자처럼. 이건 통장에 300만 원이 들어 있는 것과 같습니다. 반대로 현금 흐름성 행복은 매일 생기는 자잘한 행복입니다. 매일 10만 원씩 들어오는 수입 같은 거죠.
계나는 현금 흐름성 행복이 아주 중요한 사람입니다. 무슨 대단한 명예나 부가 필요한 게 아니라, 매일 맛있는 것 먹고 웃으며 사는 걸 원해요. 접시를 닦고 살더라도 사람답게 살고 싶어서 호주로 떠난 계나. 그녀는 행복해 질 수 있을까요?
<한국이 싫어서> 결말입니다. 6년 동안 호주에서 고군분투한 계나는 결국 시민권을 획득합니다. 이 시민권의 가치가 한국 돈으로 10억 원쯤 된대요. 놀고 있어도 실업 연금 따박따박 나오고, 큰 병 걸리면 병원비 다 지원되고. 하여튼 좋대요. 그리고 드디어 접시 닦기, 서빙 말고 본격적인 회계 일을 할 수 있게 됐어요.
불행 끝, 행복 시작인 걸까요? 그게 꼭 그렇지만도 않습니다. 회계 일 해서 버는 급여는 알바하던 데서 받던 기본급에 팁 합친 것과 비슷하고요. 여전히 영어는 어려워요. 아마 계나가 호주에서 30년을 더 산다고 해도 네이티브 스피커처럼 영어를 하게 되는 날은 안 올 거예요. 그리고 살다 보니 호주라는 나라도 그리 착한 나라는 아니더랍니다. 최근에는 어린 호주 애들이 한국 사람을 노려서 공격하는 ‘묻지 마 폭행 사건’이 계속되고 있대요. 참, 전 남친 지명이는 같은 방송국 아나운서와 결혼했습니다.
그래도 계나는 또 결심합니다. “해브 어 나이스 데이.” 오늘 하루도 행복하기로. 이제부터 진짜 행복해 지기로.
물론 한국을 떠나는 것이, 호주가, 이민이 답은 아닐 겁니다. 그래도 행복하기 위해 발버둥 치는 계나의 모습이 저는 개인적으로 멋있어 보였어요. ‘이번 생은 틀렸다’, ‘나는 왜 헬조선에 태어났는가’ 절망하고 있는 친구들에게 이 책을 권하고 싶어요.
illustrator li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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