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마라톤은 다음 생애서

 

‘인생에 한 번은 42.195km를 뛰어보라’ 이게 무슨 내성 발톱에 물집 잡히는 소리인가. 어디 쓰잘데기 없는 자서전 같은 데에 쓰여 있는 문구였던 걸로 기억한다. 아니, 걸어 다니는 것도 숨차죽겠는데 왜 쓸데없이 달리기를 뛰나. 그것도 돈까지 들여가면서.

 

일 년 전까지만 해도 마라톤 풀코스를 완주한다는 건 나와 전혀 상관없어 보였다. 뛴다고 해도 다음다음 생애쯤을 기약했다.

 

기자 일을 하면서 뭔가 간지 나는 취미를 찾고 있었다. 어디 가서 “나 기자인데 이런 것도 해. 죽이지”라고 으스댈 수 있을 만한 것. SNS에서도 뭔가 초식남이나 따도남 스멜이 풍기는 그럴듯한 것. 꼴에 허세는 잔뜩 들어가서 월급을 쪼개 나이키 한정판을 모으는 철부지. 그런 나에게 그럴듯한 취미거리가 눈에 들어왔다.

 

“완전 간지 나는 러닝 크루가 있어. 그 사람들은 나이키밖에 안 입어. 모델, 디자이너, 포토그래퍼 등 이쪽 일을 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심지어 홍대에서 모여.”

 

달팽이관이 씰룩거렸다. 그런 트렌디한 힙스터들이 있다니. 물론 예쁜 아가씨들도 많다는 정보는 이미 우선순위로 접수했다. 두말 않고 그 모임에 찾아갔다. 러닝화도 없어서 동네 마실용으로 신는 짚신 같은 신발을 신고.

 

2. 러닝 크루에 입문하다

 

버스 놓쳤을 때 말고는 평소에 뛰지도 않는, 그만큼 러닝에 무지한 내가 러닝클럽이라니. 큰맘 먹고 모임에 나갔다. 처음 간 그곳은 신세계였다. 이스라엘인가 착각이 들 정도로 예수님 헤어스타일을 표방한 남성들이 운동화 끈을 묶고 있었다. 뭐지. 동대문인가. 운동복을 예쁘게 빼입은 여성분들은 심장을 덜컹하게 했다. 잘 찾아왔다.

 

어쨌든 나도 그런 맵시를 탐하기 위해 러닝 크루에 가입하기로 했다. 첫 러닝은 한 5km 정도로 한강을 뛰었다. 마치 내 연애사처럼 형편없는 달리기였다. 막 교배를 끝마친 강아지처럼 헥헥거렸고 달리기 자세는 개구리처럼 허우적거렸다.

 

집에 가니 온몸이 욱신거려 걸을 수가 없었다. 결국 다음날 반차를 냈다. 오기가 생겼다. 매주는 힘들더라도 시간이 나면 달리기 모임에 참석하려고 했다. 뛰는 게 좋아서라기보단 사람들을 알게 되는 게 좋았고 끝나고 나서 맥주 한잔 하는 것이 그렇게 맛있었다.

 

치킨은 핵존맛이었고. 그렇게 달리고 치킨 먹고 달리고 치킨 먹고 하다 보니 어느새 뒤처지지 않을 만큼 실력이 늘었다. 그렇다고 완전 잘 뛰게 된 건 아니고.

 

3. 실력을 쌓다

사람 몸이라는 게 참 신기하다. 처음에는 5km만 뛰어도 다음날 반차를 내야 했는데 그 다음 주는 6km, 한 달이 지나고는 10km를 뛰어도 토하지 않을 정도가 됐다. 그렇게 첫 대회에 도전하기로 했다.

 

무슨 깡인지 한 번도 뛰어보지 않은 하프(21km)를 신청했다. 10km지 점을 지났을 때 눈앞이 하얘졌다. 15km 지점에서는 집에 가고 싶었다. 18km 지점에서는 몸의 모든 구멍으로 노폐물이 나올 것 같았다. 그리고 21km 완주. 기록은 2시간 1초였다. 그 자리에 드러누웠고 엄마가 너무 보고 싶었다. 집까지 절뚝거리면서 걸어갔고 다음 날 연차를 냈다.

 

첫 하프마라톤

 

4. 풀코스에 도전하다

계속 뛰다 보니 욕심이 생겼다. 언젠가는 풀코스를 뛰어야 할 것 같은 느낌. 그래야만 날이 갈수록 쌓여가는 나이키 제품을 보더라도 양심의 가책이 덜해질 것 같았다. 참 웃긴 게 달리기처럼 돈이 들지 않는 스포츠가 없다고 생각했는데, 예쁜 옷이 출시되면 바람의 저항을 덜 받을 것 같았다.

 

새로 나온 신발을 신으면 더 빨라질 것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지금은 일상복보다 트레이닝복이 더 많다. 그래서 풀코스를 신청하기로 했다. 그것도 우리나라 3대 메이저 대회 중 하나인 ‘동아마라톤대회’로. 그때까지만 해도 몰랐다. 내가 스스로를 X되게 만들고 있다는 것을.

 

일주일 동안 이렇게 세 번 뛰었다

 

대회가 한 달 앞으로 다가왔다. 그때까지 탱자탱자 놀고 있었다. 일주일 중 하루도 뛸까 말까. 야근이 많을 땐 귀찮아서 안 뛰었다. 날씨가 추워지니 더 밖에 나가기 싫었다. ‘역시 이불 밖은 위험하다.’ 이 생각으로 겨울 달리기는 세탁기에 돌려놓은 빨래처럼 까맣게 잊기로 했다.

 

2주 정도 남았을 때 누군가 그랬다. “너 풀코스 준비 안 해?” 모르겠다. 될 대로 되겠지. 1주일이 남았을 때, 그때야 똥줄이 탔다. 그래도 몇 번은 뛰어보기로 했다. 길바닥에서 쓰러지면 창피하니까. 그래서 일주일 동안 풀코스 뛰기 전날까지 7km씩 세 번 정도 뛰었다. 그게 전부다.

 

5. 마라톤 대회 당일

 

대회 날이 밝았다. 세상에, 달리기를 뛰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은 줄 세상 처음 알았다. 광화문 광장이 수만 명의 사람으로 꽉 찼다. 모두가 풀코스에 도전하는 사람들이었다. 어쨌든 달리기도 장비 빨이다. 온몸에 테이핑 질로 도배를 하고 에너지 젤에 블루투스 이어폰까지 챙겼다.

 

당일 날까지 ‘뭘 신을까?’ 고민하다 로고에 잉크도 안 마른 나이키 신상을 선택했다. 물론 뒤꿈치가 까질 것을 대비해 까짐 밴드까지 두 겹 붙여서.

 

보통은 10km 지점까지 비닐 우비에 예식용 장갑을 장착하고 달린다. 비닐 우비는 몸이 달궈지고 체온이 밖으로 나가는 것을 막기 위함이다. 10km 지점이 지나면 찢어서 쓰레기통에 버리면 된다. 예식용 장갑은 땀이 흐르면 닦기 편하기 위함이다. 그런데 아침에 늦잠을 잤으므로 둘 다 사놓고 챙기지 못했다. 헤헤

 

6. 지옥을 달리다

출발! 소리는 한 3분 전에 울린 것 같은데 계속 광화문 광장에 서 있었다. 사람이 너무 많아서 선두 그룹부터 보내려면 시간이 오래 걸린다. 물론 에디터는 당연히 꼴찌 그룹이다. 처음 10km 지점까지는 천천히 조깅하듯 사뿐사뿐 달렸다. 이렇게 천천히 달려도 되나 싶을 정도로.

 

15km를 넘어서면서부터 무릎이 아파오기 시작했다. 발목도 조금 아픈 것 같았다. 삔 건지 상체가 돼지라서 발목이 하중을 못 견디는 건지. 아무튼 아팠다.

 

20km를 넘어서면서 온몸이 맞은 것처럼 아파오기 시작했다. 폐가 목젖까지 올라온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숨이 찼다. 물이 너무 먹고 싶었다. 분명 나는 종로 5가를 달리고 있는데 사막 한가운데처럼 느껴졌다. 외롭다. 집에 가고 싶다는 생각뿐.

 

에너지 젤은 이렇게 생겼다.

원래 이런 멍청한 생각이 들 때쯤 에너지 젤을 먹어줘야 한다. 열량은 100kcal 정도로 부족한 체력이나 당을 보충해준다. 사람들이 왜 약 빨면서 달려야 한다고 말해줘야 하는지 그때야 실감이 났다. 쫄보라서 이 에너지 젤을 무려 4개나 챙겼다.

 

신기하게도 빨아먹으면 정신이 번쩍 들면서 온몸이 낫는 느낌. 순간 회복력으로 따지면 당장 마인부우와 싸워서 이길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10분이 지나자 다시 원상태. 결국 의지할 수 있는 건 음악밖에 없었다. 음악은 합법적인 대마초니까.

 

그만큼 엄선해서 준비했다. AOA. 에이핑크, 트와이스, 프로듀스101 노래를 섞어 배치했고 군데군데 빅뱅 노래를 섞었다. 그리고 40km 지점에서 소녀시대의 ‘다시 만난 세계’가 나올 수 있도록 짰다. 군대에 있을 때 아주 힘이 됐던 노래다.

 

38km 지점부터 이렇게 응원해주는 사람들이 있다

 

35km 지점이 되자 온몸이 굳어왔다. 온몸에 깁스를 한 기분. 한 발짝 한 발짝 때기가 어려웠다. 합법적인 마약에 몸을 맡길 뿐.

 

38km 지점부터는 응원하는 사람들이 많다. 뛰는 사람이 어느 소속이든 상관없이 하이파이브를 해주고 파이팅을 외쳐준다. 그들이 없었다면 절대 완주할 수 없었을 것이다. 보는 눈이 너무 많아서 퍼질 수가 없었으니까. 진짜 쓰러져서 울고 싶었는데 그냥 뛰었다. 쪽팔리기 싫어서.

 

40km를 지나자 내가 뛰고 있는 건지 다리가 자동으로 움직이는데 내가 따라가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이미 정신은 집 전기장판에 누워있었다. 기왕 뛴 거 끝까지 가야겠다는 생각으로 마지막 에너지 젤을 하나 더 먹었다. 그리고 그때쯤 소녀시대의 ‘다시 만난 세계’가 울려 퍼졌다.

 

‘수많은 알 수 없는 길 속에 희미한 빛을 난 쫓아가♬ 언제까지라도 함께하는 거야 다시 만난 나의 세계♬’

 

인생을 살면서 행복했던 순간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어느새 눈앞에 결승점이 보였다. 완주. 내가 완주라니. 내가 완주라니! 같이 뛰는 러닝 크루에서 현수막을 만들어줬다. ‘충남의 아들’. 눈물이 눈 앞을 가려서 한번 깜빡이면 눈물이 뚝 하고 떨어질 것 같았다.

 

어쨌든 완주했다. 미치게 힘들었고 뒤질 것 같았는데 결승선 안에 서 있었다. 끝나고 눈앞에서 보쌈 中자 두 접시를 해치우고 한숨 자고 일어나서 또 치킨을 시켜먹었다.

 

사진을 찍어준다면 밝게

 

‘마라톤에는 인생이 담겨 있다’ 이 말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다. 에디터는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뛰었다. 3일이 지난 지금, 아직도 절뚝거리면서 걸어 다닌다. 계단을 내려갈 때는 고래를 잡은 초등학교 3학년처럼 난간을 잡지 않으면 거동이 힘들다.

 

처음엔 ‘다신 안 해야지’ 했는데 며칠이 지나니까 또 뛰고 싶다. 뭐지. 이 맛에 달리는 건가. 아무튼 세상엔 두 가지 사람으로 나뉜다. 마라톤 풀코스를 뛴 자와 안 뛴 자. 물론 난 전자다.

 

기록은 허접했지만 좋은 경험이었습니다. 다들 고생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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