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좀 쉬고 싶으시죠?

당신이 취준생이라고 상상해 봅시다. 서류 탈락만 몇십 번 째. 정말 힘들게 얻어낸, 어쩌면 다시는 안 올지도 모르는 면접 기회는 조금 전 시원하게 날려 먹었습니다. 오랜만에 신은 구두 때문에 발이 아파 더 걸을 수도 없습니다. 할 수 없이 공원에 주저앉아 망연자실하고 있는데, 웬 수상한 남자가 나타나 이렇게 묻습니다.

 

 

김영하의 소설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에는 자살을 원하는 사람을 찾아, 그를 돕고 그 대가로 돈을 받아서 생활하는 일종의 ‘자살 안내자’가 등장합니다. 그는 앞서 말했던 상상 속의 당신처럼 지친 사람을 찾아다닙니다. 그리곤 자살의 의향이 있는지 은근슬쩍 떠보죠. 고민을 들어 주면서, 좋아하는 영화나 음악에 관해 이야기하면서, 상대가 자살하고 싶은 욕망이 있는지 없는지 알아봅니다. 그리곤 그에 응하는 사람에겐 원하는 대로 스스로 죽는 법을 안내해 줘요.

 

이 소설은 ‘자살 안내자’의 도움을 받아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책을 읽기 전엔 이 설정부터가 말도 안 되는 소리 같이 느껴져요. 요즘 세상에 어떤 세상인데, 낯선 사람이 저런 식으로 접근하는 걸 받아 줍니까. 그런데 소설을 읽다 보면 그 사람들이 어떤 마음으로 자살안내자에게 유혹에 응했는지 알 것도 같아집니다.

 

삶에 지쳐 쉬고 싶은 이라면 흔들리는 마음을 꼭 붙잡고 이 소설을 읽으시길 권합니다. 작가 김영하는 이 소설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더라고요. “자기 자신을 파괴하고 싶어 하는 독자가 일년에 1-2천 명은 꼭 있는 것 같다”고. (1996년에 출간된 이 소설은 2015년에 3판 12쇄를 찍었습니다. 매년 잘 팔리고 있다는 소리죠. 하하.)

 


1. 자신을 신이라고 믿는 남자

자신을 신이라고 믿는 남자가 있습니다. 앞서 말한 ‘자살 안내자’입니다. 자살을 원할 만큼 충분히 절망한 사람을 찾아다녀요. 자신에게 자살을 도와달라고 부탁할 고객을 찾는 거죠. 그로부터 돈을 받아 여행을 다니고, 또 고객을 찾는 것이 이 남자의 삶입니다.

 

신기한 것은 이 이상한 남자에게 실제로 자살을 의뢰하는 사람이 있다는 거예요. 작가 김영하는 이 ‘자살 안내자’라는 직업(?)을 만든 배경 대해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어떤 사람의 가장 진솔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이가 필요했다.”

 

 

 

작가의 의도대로 소설 속 사람들은 이 남자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해줍니다. 애인에게도 가족에게도 하지 않던 마음속 깊은 욕망이나 고민을 낯선 이에게 술술 털어놔요. 하긴 죽음을 앞두고 못 할 말이 뭐가 있겠어요. 그리고 의외로 너무 가까운 사람보다는, 낯선 사람에게 속마음을 털어놓기가 더 편한 법이죠.

 


2. 사는 게 지겨운 여자

이 남자는 의뢰인 중 자신이 생각하기에 아름답고 의미 있게 죽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골라, 글로 씁니다. ‘세연’은 그 중 하나에요.

 

그녀는 어릴 적 집에서 나왔습니다. 가장 역할을 하는 폭력적인 엄마와, 술만 마시면 세연의 교과서를 찢는 아빠. 그들에게서 처음 도망쳐 나왔을 때, 바깥세상은 천국이었습니다. 간섭하는 인간도 없고, 술도 마시고, 옷도 사 입고, 남자애들과 잠도 자고.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 인생은 내 뜻과는 상관없는 곳으로 흘러가 버리곤 합니다. 세연의 인생은 어느새 웃음을 팔고 몸을 파는 업소로 흘러갑니다. 그 이후로는 희망도 변화도 없는 지루한 일상이 반복되고요.

 

 

그녀는 남자들과 섹스를 하면서 추파춥스를 먹습니다. 사탕을 먹는데 하도 집중을 해서 섹스를 하는 건지 사탕을 먹는 건지 구별하기 어려울 정도로요. 남자들은 그런 그녀를 무서워하기도 하고 화를 내기도 합니다. 추파춥스 막대기에 눈이 찔려 다칠뻔한 남자도 있었어요. 하지만 세연은 꿋꿋합니다. 추파춥스는 그녀에게 지루한 삶을 그나마 견딜 수 있게 하는 진통제였던 것 같아요.


3. 왜 멀리 떠나가도 변하는 게 없을까

세연은 남자들에게 주문진에 데려다 달라고 말합니다. 그녀에게 생활이란 따분하기 그지없는 것이라서 일탈이라고 해봐야 고작 차를 타고 멀리 가는 것 정도예요. 주문진은 서울에서 먼 곳이지요. 그냥 어디로든 떠나고 싶은 마음에 주문진에 가자고 했는데, 막상 떠나보니 별게 없습니다. 궁상스러운 현실도 전혀 변하질 않죠.

 

폭설 속에 갇혀 그녀는 한탄합니다. “왜 멀리 떠나가도 변하는 게 없을까” 그리고 생각하죠. 이렇게 눈에 파묻혀 죽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눈 속에 고립된 자동차 안에서, 그녀를 주문진까지 데려다준 남자와 하는 길고 지루한 섹스. 세연은 섹스 후 잠든 남자를 두고 홀로 차 안을 빠져나갑니다. 홀로 남은 남자는 잠에서 깨어 어리둥절할 겁니다. 그녀는 도대체 왜 주문진에 데려다 달라고 했으며, 왜 자기를 혼자 두고 사라졌고, 어디로 가버렸는지. 하지만 남자는 겨울이 지나고 봄이 와도 그녀에 대해서 아무것도 알 수 없을 거예요. 그렇게 사라진 그녀는 서울로 돌아와 자살 안내자를 만났거든요.

 


사람들은 누구나 봄을 두려워한다. 겨울에는 우울해도 이상하지 않다. 그러나 봄은 우울을 더 이상 감출 수 없게 만든다. 자신만이 고립되어 있다는 느낌이 커지는 것은 당연하다. 겨울에는 누구나가 갇혀 있지만 봄에는 갇혀 있을 수밖에 없는 자들만이 갇혀 있는다.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54p


 

4.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자살 안내자는 사람들이 평소에는 감추고 있는 내면의 충동을 끌어내는 데 능숙해요. 북극에 가 보고 싶다는 세연의 말을, 북극행 유람선에서 몸을 던진 할머니 이야기로 적당히 맞받아치면서 그녀의 마음을 열죠. 아무것도 이야기하고 싶지 않아하던 세연은 그 남자에게 많은 것을 털어놓습니다. 그리고 결국 그의 고객이 되기로 하죠.

 

 

세연은 그와 함께 자신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자살법을 찾습니다. 마치 여름 휴가로 스페인에 갈까 발리로 갈까 고민하는 것처럼 그들의 대화는 유쾌해요. 세상 모든 것에 흥미를 잃어버린 듯, 무기력해 보이던 그녀의 표정에는 사뭇 생기까지 돕니다. 이제껏 그녀의 인생은 자기 마음대로 되는 것이 별로 없었거든요. 근데 지금은 어쨌든 자기 인생의 방향을 스스로 결정하고 있으니 신이 났나 봐요.

 

세상의 밑바닥에 있는 사람들이 행사할 수 있는 권리는 많지 않습니다. 이들이 가장 쉽게 해칠 수 있는 건 자기 자신이에요. 벼랑 끝에 있던 여자, 세연은 자신에게 남은 마지막 권리, 자기 자신을 파괴할 권리를 행사하며 들뜹니다.

 


미세하게 들뜬 유디트(세연)을 바라보면서 나는 다시 한 번 내가 하는 일의 의미를 되새길 수 있었다. 그녀는 이제 더이상 입에 추파춥스를 물고 있지 않았다. 마치 컴퓨터를 처음 배우려는 학생처럼 내 노트북 화면에서 눈을 뗄 줄 몰랐다.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72p


 

5. 아무도 다른 누구에게 구원일 수는 없어요

세연은 여러 방식을 두고 고민하다 결국 가스를 선택합니다. 후에 자살안내자의 증언에 따르면 편안하게 갔다고 하네요. 소설에는 그녀 말고도 다른 의뢰인 한 명이 더 등장합니다. 당당하고 자신만만해 보이는 서른 살 즈음의 행위예술가. 외견상으로는 세연과 조금도 닮지 않았지만 그녀도 자살안내자의 고객이 됩니다.

 

둘 사이에는 어떤 공통점이 있었을까요? 소설에 등장하지 않는 자살 안내자의 수많은 고객에게는 대체 어떤 사연이 있었길래 그토록 많은 사람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던 걸까요?

 

 

자살 안내자는 의식이 희미해져가는 고객들을 향해 이렇게 말하곤 합니다. “좋은 여행이 되기를 바랍니다.” 휴식이 간절했던 고객들에게 자살 안내자는 구원이었을까요?

 

죽은 자는 말이 없기에, 자살을 택한 사람들이 지금 만족하고 있는지, 후회를 하고 있는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어느 날 문득 ‘나를 파괴하고 싶은’ 충동을 느꼈을 때, 나는 어떻게 대처하면 좋을 지 미리 생각해 볼 수는 있겠죠. 나를 파괴할 권리를 행할 것인가, 아니면 참을 것인가.

 


이 글을 보는 사람들 모두 일생에 한 번쯤은 유디트와 미미처럼 마로니에공원이나 한적한 길모퉁이에서 나를 만나게 될 것이다. 나는 아무 예고 없이 다가가 물어볼 것이다. 멀리 왔는데도 아무것도 변한 게 없지 않느냐고. 또는, 휴식을 원하지 않느냐고. 그때 내 손을 잡고 따라오라. 그럴 자신이 없는 자들은 절대 뒤돌아보지 말 일이다. 고통스럽고 무료하더라도 그대들 갈 길을 가라.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134p


 

illustrator li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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