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을 위한 그림책’이란 표현을 심심치 않게 만난다. 왜 아이들을 위해 그린 동화가 어른들에게 감동을 줄까? 특정한 내용이 담겨 있어서가 아니라, 구름으로 빵을 구워낼 수 있는‘상상력’이 사막이 된 마음에 작은 꽃 하나 피워주기 때문 아닐까.
녹아내린 달을 샤베트로 만들어 이웃끼리 나눠 먹는 착한 심성을 우리가 잊고 있었기에, 그들의 이야기를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행복한 기분이 드는 걸 테고.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있는 ‘맑음’은 타고난 것이겠지, 내 멋대로 짐작하며 그녀의 작업실을 찾았다. 백희나 작가의 대답은 이랬다.
“저는 염세주의자예요.”
작가님의 작품에는 ‘악인’이 거의 등장하지 않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 읽었던 동화는 ‘기승전권선징악’인 경우가 많았는데…
전지적 작가 시점’이라고 하죠.이야기 안에서 신이 되는 거예요. 캐릭터를 만들고 운명을 결정짓고. 그래서 감히 “얘는 나쁜 사람이야. 이런 행동을 했으니까.” 절대적인 진리처럼 단정 짓고 싶지 않아요. 보는 사람들이 그런 생각에 영향을 받고, 자기 현실에 반영하는 게 되게 위험한 일 같아서요.
분명히 선과 악은 존재하지만, 사람에 대해 ‘좋다’ ‘나쁘다’ 말하는 건 거의 상대적이잖아요. 이 사람한테는 좋은 사람이고 예쁜 행동을 했지만 나하고의 관계에선 나쁠 수 있고, 그렇게 탄력적인 것이 사람 사는 세상이니까요.
작가님의 작품 중 『어제저녁』을 인상 깊게 읽었는데요. 이웃들의 사소한 행동이 작은 변화를 물고 오고, 결국 담백한 해피엔딩을 맞아요. 작가님은 사람 간의 돌고 도는 ‘선한 연결 고리’ 같은 걸 믿으시나요?
저는 사회와 많이 소통하는 사람이 아니에요. 혼자 일만 하고 싶어 하는 스타일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즘 우리 사회가 돌아가는 모습을 보면 굉장히 무섭고 결말은 멸망밖에 없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어요.(웃음) 하지만 우리가 멸망하든 세상이 계속 발전하든 어찌 됐든 답은 같이 살아가는 것밖에 없단 생각이 들어요.
누군가 달라이 라마에게 “종교란 뭡니까?” 물어봤더니 ‘상냥한 마음’이라고 했대요. 그 말이 맞는 것 같아요. 싫건 좋건 다 유기체처럼 연결돼 있어서 같이 살아가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 서로를 친절하게 대하는 것.
요즘 인터넷을 하다 보면 느끼는 게, 착한 이야기보다는 나쁜 이슈에 반응이 훨씬 큰 것 같아요. 자극적인 콘텐츠에 더 열광하고요.
살면서 경험에 의해 실망했기 때문일 수 있죠. 저도 혼란을 많이 겪었거든요. 착한 일을 하면 복을 받는다고 배웠는데. 나쁜 일을 한 남을 용서하고 친절하면 복을 받나? 그런데 사실 복을 바라고 친절한 건 옳지 않은 일인데…. 그래서 더욱 절대악과 선이 뭔지 이야기하고 싶지 않은 거예요.
그래도 선한 이야기라고 무조건 빤한가, 묻는다면 그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제가 『구름빵』을 만들 땐 반 입체 기법을 썼고, 『달샤베트』에선 달빛을 잘 표현하기 위해 미니어처 세트에 조명을 다 달았어요. 『장수탕 선녀님』과 『이상한 엄마』는 현실적인 이야기기 때문에 찰흙으로 사람과 최대한 비슷하게 빚어냈고요. 어떻게 만들었느냐에 따라 울림을 줄 수 있다고 믿기 때문에, 이야기에 어울리는 그림을 찾아서 방식을 계속 바꿨던 거예요.
엄청난 공을 들여 만든 작품들이기에 애착도 남다를 것 같은데요.우여곡절도 많으셨어요.『구름빵』 매절 계약(일정 금액을 지불하고, 이후 발생하는 저작물 수익을 출판사가 모두 독점하는 계약. 『구름빵』은 수출과 2차 콘텐츠 제작으로 4400억을 벌어들였으나 백희나 작가가 받은 인세는 1850만원이었다.)은 큰 화제가 됐죠.
『구름빵』이 그렇게 되고 7년간 창작을 못 했어요. 돈도 돈이지만, 사람에 대한 신뢰가 떨어지고 자신감이 바닥을 쳐서 어떤 피드백도 듣질 못하겠더라고요. 그런 시간을 보내다가 혼자 책을 만들어서 인터넷 서점 MD들과 미팅 하고, 독립출판으로 『달샤베트』를 내놨어요. 그 책이 잘됐는데 이번엔 연예 기획사에서 걸 그룹 이름을 ‘달샤벳’으로 붙여서 나온 거예요. 너무 속상했어요. 상표 등록까지 했는데, 그건 저작권의 보호를 받을 수 없는 영역이라고….
그 뒤로 책을 내는 시점이 오면 겁이 나더라고요. 또 뺏길까봐. 하나하나 디자인 등록을 다 했어요. 상표권 등록도 몇십 가지 해놓고. 작가가 작품을 한다는 건 남에게 보여주고 싶은 욕망이 있다는 건데 오픈 자체가 두렵더라고요. 그런 경험들이 치명적인 트라우마가 된 거예요.
동화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어른들의 세계가 참 가혹하네요.
이제 알아요. 참는 게 정답은 아니에요. 반격을 하거나 할 말을 해야 해요. 다음에 걸어갈 사람들을 위해서 조금이라도 이 길을 바르게 잡아놓는 게 제 몫인데, 어떻게 행동해야 올바른 걸까. 그 판단이 제일 어려워요. 사실 싸움을 할 수 있는 상황이라는 건 오히려 다행스러운 일이거든요.
처음에 『구름빵』은 어떻게 할 도리가 없었어요. 혼자 삭이는 거 외엔 할 수 있는 게 없었는데, 결국엔 재판이라도 했잖아요. 그 과정이 되게 힘들었어요. 하나하나 내가 했다는 걸 증명해야 되고 같이 일했던 사람과 싸워야 하니까. 사람이 할 짓이 못 된다 싶은데, 그렇게라도 할 수 있는 게 침묵하고 있어야 했던 때보다는 훨씬 나은 거죠.
그 시기, 작가님에게 그나마 위로가 됐던 것은 무엇일까요?
위로 같은 거 없죠. 애들이 있으니까, 돈을 벌어야 하니까 일을 계속 했던 거죠. 사실 창작을 못 했을 뿐 그림책 일은 계속 하고 있었어요. 출판사에서 의뢰받은 그림을 그리는 식으로요. 알고는 못 가는 길이 인생인 것 같아요. 다시 그 길을 지나오라고 하면 못 해요. 모르니까 계속 미련하게 걸어왔던 거지.
전 기본적으로 염세주의자예요. 인생은 행복한 게 아니라고 생각하고요. 어쩌면 그래서 아이들의 세상이 좋았는지도 몰라요. 보호 받아야 마땅하고 평화롭고 맑은 세상. 하지만 현실은, 아이들이 초등학교에 들어간 순간부터 힘들어지죠. 부당한 것도 겪어야 되고 이해할 수 없는 것도 받아들여야 하고. 그럴 때 위로가 돼주고 싶은 게 저의 목표예요. “희망이 있는가?” 그건 모르겠지만, 누군가가 옆에 있다는 정도. 작은 것 하나라도 즐기면서 힘을 얻을 수 있는 뭔가를 주고 싶고요.
전 유리 멘탈이라서 그런지, 그런 모든 일을 겪고도 ‘동화 작가’라는 일을 포기하지 않으신 게 참 대단하게 느껴져요.
‘팔자가 센가…’ 싶긴 해요.(웃음) 그러면서도 천직을 찾았다는 게 참 감사해요. 자기가 정말 좋아하는 일을 잘할 수 있다고 자신하면서 돈 버는 사람이 세상에 몇이나 되겠어요. 전 맞춤형으로 태어났다고 느낄 정도로 이 직업이 잘 맞기 때문에, 책 때문에 내가 힘들어졌다고 ‘그만하고 싶다’ 생각해보진 않았어요.
저희 엄마 말론 제가 태어날 때부터 경주마처럼 양 옆을 다 가리고 나왔대요. 뭔가를 하기로 했으면 해야 하는 거야. 내가 이 일을 해야 하는 사람인데 하지 않았다면, 아마 스스로 ‘인간 하자’라고 생각했을 것 같아요. 제겐 일이 자존감을 찾을 수 있게 해주고 현실에서 상처 받았을 때 구명줄이 돼주는 존재예요.
일할 때 가장 힐링이 되시는 거예요?
숨통이 트여요! 제가 하고 싶었던 말을 이 안에다 하거든요. 아쉬운 게 있다면, 이제 예전처럼 체력이 좋질 않다는것. 『구름빵』 이후로 오랫동안 창작을 못 했잖아요. 원래 30대에 다양한 작품을 해보고, 40대가 되면서 자기만의 스타일을 만들어나가는 건데… 원기왕성한 시기를 놓친 게 굉장히 속상하죠.
요즘엔 어른들도 그림책을 많이 읽어요. 더 이상 아이들만의 문화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아요. 그림책 종사자로서 어떠세요?
그림책은 사람이 태어나서 가장 처음 접하는 예술작품이고,죽을 때까지 계속 즐길 수 있는 예술이라고 생각해요. 쉽게 소장할 수 있고, 언제든지 볼 수 있고, 이해도 쉽죠. 무엇보다 기본적으로 아이들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장면 하나, 글자 하나 허투루 넘어가는 법이 없어요. 그때의 경험이 평생 간다고 생각하니까요. 아이들은 뭔가에 꽂히면 그걸 질리도록 하잖아요. 무섭게 각인이 되고 놀랄 만큼 여러 번 읽힐 수 있다는 가정 하에 만들어요.
그런데 이 장르가 멸시되는 대상이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어요. 『달샤베트』 이름을 걸그룹이 썼을 때 가장 속상했던 건 제가 만든 이름을 마음대로 써서가 아니었어요. 섹시 걸그룹의 이미지가 이 동화에 악영향을 줄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그림책 따위 그렇게 해도 된다는 사회적 분위기였어요.
물론 누군가가 그런 생각을 할 수도 있어요. 하지만 사회적으로는 ‘아이들 것은 지켜주자’는 합의가 돼 있어야죠. 아이들의 장르가 소중하게 여겨지지 않는다는 건 우리가 그만큼 아이들을, 우리의 어린 시절을 소중하게 여기지 않고 있다는 뜻이나 마찬가지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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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grapher 배승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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