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 4등! 너 인생 꾸리꾸리하게 살 거야?” 수영대회만 나갔다 하면 4등을 하는 준호를 보며 엄마는 복장이 터져 이렇게 소리친다.

 

그 말은 곧 엄마의 입을 빌려 사회가 우리에게 하는 말 같다. 순위권 밖의 인생이란 패배자의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그래서 결승 벽을 짚는 순간 가쁜 숨을 몰아쉬며 전광판을 돌아보는 어린 선수들의 얼굴은, 12년간 입시 경쟁의 레인만을 달려온 우리의 표정을 닮아 있다.

 

뒤틀린 교육열, 부모의 보상 심리, 성과 만능주의에 기인한 체벌과 폭력까지…. 영화 <4등>은 우리 사회에서 그간 결과를 위해 무시되어온 온갖 ‘과정의 상처’를 다룬다.

 

그럼에도 이 영화는 어둡지 않고 아름답다. 상처 입은 소년이 레인 끝의 기록이 아닌, 레인 바닥의 빛을 좇기 때문이다. 그게 어떤 의미인지는 더 많은 사람들이 영화 속에서 발견했으면 좋겠다.

 

어둑한 극장 안에서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갈 때, 이 이야기를 만들어낸 정지우 감독을 만나 소년의 이야기를 더 하고 싶어졌다. (이 인터뷰는 <4등>에 관한 스포일러를 일부 포함하고 있습니다.)


세상에 맞을 짓은 존재하지 않는다

 

1등만 기억하는 세상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이 영화는 2등도 3등도 아닌 4등에 주목합니다. 사실 우리 대부분은 4등으로 대표되는 순위권 밖의 존재들이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어떤 의미로든 뒤에 꼬리처럼 이야기를 더 달고 있는 제목인 건 맞는 것 같아요. 말한 대로 꼴찌들의 합창, 같은 방식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을 테고요.

 

저는 그보다는 이도 저도 못 하는 어중간하게 낀 사람의 기분을 표현하고 싶었어요. 그만두자니 조금만 더 하면 될 것 같아 아깝고, 계속하기에는 성적이 안 나와서 힘든 그런 의미로의 4등 말이에요.

 

폭력에 대한 이야기도 하지 않을 수 없는데요. 아마 관객들 마음이 가장 아픈 장면이 맞는 게 싫어 수영을 그만둔 준호가 동생을 때리면서 코 치인 광수가 자신을 때리며 했던 말을 그대로 따라 하는 장면일 거예요.

 

대학가에서도 후배들 불러 모아놓고 야구방망이로 내려치는 일이 거의 봄맞이 행사잖아요. 왜 그럴까 생각했고, 이 영화를 준비하면서 그 생각이 정리됐어요. 제 결론은 한 문장이에요. ‘세상에 맞을 짓은 없다.’ 그 말에 사람들이 동의해주길 바라며 만든 영화고요.

 

때리는 사람이 “몇 대 맞을래? 네가 잘못했으니까 직접 정해”라고 하는 것, “지금은 원망해도 나중엔 나한테 고맙다고 할 거다” 하는 것, 또 맞는 사람이 그 폭력에 대해 “내가 잘못해서 맞은 거예요” 말하게 만드는 것. 정도의 차이는 있을 테지만, 이런 대사를 주고받아본 적 없는 사람이 더 드물 거예요.

 

저는 체벌로서의 폭력은 어떤 순간에도 옳지 않다고 생각해요. 그 순간에는 마치 합당한 벌칙인 것 같은 착각이 들 수도 있지만, 그렇게 시작한 폭력은 피해자의 내부에 각인되고 변형되어서 결국 사회에 다양한 방식으로 전염되거든요.

 

영화 초반에 광수가 유망한 선수였던 시절, 도박을 하느라 국대 연습에 불참해 체벌을 당하는 장면이 나오는데요. 이 부분을 보고 많은 사람들이 ‘맞을 짓’이라고 표현했다고요. 우리가 그런 말을 참 서슴없이 쓰고 있다는 자각도 들더라고요.

 

준호가 동생에게 가한 폭력의 시작이 뭐였을까 따져보면, 그런 식으로 우리가 ‘맞을 짓’이라고 마음으로 동의해준 것들이거든요. 그것이 광수의 코치에게서 광수에게, 광수에게서 준호에게, 준호에게서 동생에게까지 전염되고 대물림되는 거죠.

 

‘맞을 짓’이란 건 너무 자의적이고 주관적인 문제예요. 폭력이 아닌 더 좋은 방법이 있을 테고, 이런 논의를 테이블 위로 올려 함께 얘기하고 싶었어요.

 

학생을 체벌하는 선생님이 그 학생이 자신보다 힘이 약한 동급생을 때렸다고 혼내는 것은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해요. 자기부터 고쳐야죠. 우리 사회가 폭력에 대해 관용적이고, 그걸 훈육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아니란 거예요.

 

‘때려선 안 된다’가 아니라 ‘맞을 짓은 없다’. 거기에 어떤 예외도 두지 않는 거죠. 그런 인식이 있으면, 그다음번, 그다음번으로 이어지는 식으로 폭력이 대물림되지 않을 것 같아요.

 

다시 찾아와서 수영을 가르쳐달라는 준호에게 광수가 “거짓말 마라, 너 한 번이라도 1등을 하고 싶었던 적이 있냐” 묻는데 준호가 조그맣게 “아니요”라고 해요.

 

저는 그 말이 참 예뻤어요. 준호는 끝내 자기 방식으로 수영을 하잖아요. 광수가 자신이 신기록을 냈던 수경을 선물로 주지만, 그것을 방에 그대로 두고 시합에 나가고요.

 

고맙고 대견하죠. 고맙다는 말이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는데, 만든 사람으로서도 그렇게 이겨내준 게 고마운 거예요.

 

이 영화에 도저히 용서하고 싶지 않은 많은 어른들이 등장하지만, 그럼에도 영화가 희망적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었던 이유는, 그 장면으로부터 시작된 것 같아요.

 

준호가 수경을 내려놓고, 내가 이 연속성에 포함되지 않겠다고 선언한 순간. 아이 입장에서야 그런 거창한 단어로 자기를 규정하지 않았겠지만, 광수와 같은 어른들의 방식을 인정하지 않으면서 혼자 버스를 타고 대회에 가는 힘.

 

그런 마음을 가진 아이라면 저는 꼴등을 한들 무너지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럼 된 거죠. 어떻게 매번 1등을 하겠으며, 죽을 때까지 선수 생활을 이어갈 수가 있겠어요.

 

하지만 어떻게 되든 간에, 내가 좋아하는 일을 좋아하는 방식으로 끝까지 해냈던 힘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보다 건강할 거라는 거죠. 그게 중요해요.

 

 

준호가 연습 중에 수영장 바닥의 햇빛을 보고 레인을 벗어나는 장면이 무척 아름다워요. 한편 좀 슬프기도 했는데 우리가 분명 어렸을 땐 저렇게 즐거움을 좇을 줄 알았는데, 이젠 레인을 가로지르는 방법을 영영 잊어버린 게 아닌가 싶더라고요.

 

그런 즐거움을 까맣게 잊고서, 이젠 누가 시키지 않아도 정해진 길로만 가잖아요. 그러다 보니 20대의 흔한 고민 중에 하나가 “저는 좋아하는 거 없어요, 제가 좋아하는 게 뭔지도 모르겠어요”가 되었어요.

 

그게 왜 그러냐면, 클 때 어른들이 좋아하는 게 뭔지 물은 적이 없거든요. “정답이 뭐니?”, “이해했어?” “너 이거 알아?”하는 질문만 들었지,좋아하는 게 뭔지 대답하거나 그것이 귀중하게 다뤄진 경험이 없는 거예요. 무언가를 좋아하는 마음이, 마치 써본 적 없는 도구 같은 거죠. 그러니 모르는 게 당연해요.

 

뭘 좋아하는지를 알려면 두서없이 해보는 수밖에 없어요. 하다보니까 이건 아니구나, 내 몸이 이건 별로 안 좋아하는구나, 알아가야 되는데 지금 세상은 그런 것을 끈기가 없고 싫증을 빨리 낸다고 규정하지, ‘모색을 하고 있다’라고는 받아들여주지 않거든요.

 

제가 대학 다닐 때만 해도, 대학에서의 그런시간은 약간 유예해주는 분위기가 있었어요. 한눈도 팔고, 이것저것 해보면서 방황도 하다가 마음을 얼추 정해서 졸업을 하면 직장을 구할 수 있었던 시기였죠.

 

그런데 지금은 학점을 관리하지 않은 상태로 졸업을 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고, 등록금은 너무 비싸다보니 다들 그 시기를 힘들게 살잖아요.

 

지금의 20대가 좋아하는 게 뭔지 모르겠다고 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모색의 과정을 거치지 못한 필연적인 결과예요. 그러니까 학교 다닐 땐 졸업하고 뭐 해야 될지 모르겠다, 직장을 구하고 난 다음엔 이 일이 내 일인지 모르겠다, 라고 문장이 계속 이어지는 거죠.


레인을 벗어나는 순간의 아름다운 유영

 

그런 입장에 있는 관객들은 영화를 보며 이렇게 말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근데 준호는 재능이 있잖아.” 극 중에서의 준호는 어쨌든 남다른 재능이 있는 선수인데, 그런 정도의 재능도 없는 우리 대부분은 어떡하나 하는 한탄이랄까요.

 

그런데 저는, 재능이라는 너무 신비화된 단어를 두고 그것이 있니 없니 고민하는 건 다 부질 없는 짓이라고 생각해요. 제가 연극영화과를 나왔는데, 재능이란 단어만 믿고 그것만 찾았다면 가장 먼저 상처 받고 지쳐서 그만뒀을 거예요.

 

그렇다고 “그래, 끝까지 하는 놈이 이기는 거지, 끝까지 하는 놈이 프로야” 이런 얘기를 하려는 게 아니에요. 저는 재능이란 걸 이렇게 생각해요.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찾아내는 것이 재능이라고.
우리가 흔히 말하는 재능이라는 신기루 같은 말에는, 자기가 주체로서 능동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부분이 없어요. 마치 피부 색깔처럼 날 때부터 타고나는 것처럼 여기니까 그 단어 앞에서 무기력해지는 거예요.

 

그런데 재능을 그렇게 규정하지 않고, ‘내가 좋아하는 것을 포기하지 않고 찾는 능력’이라고 바꿔 번역을 하면 더 많은 사람들이 “나는 재능이 있다”고 말할 수 있는 범위에 들어올 거예요.

 

나한테 그게 있는지 없는지 누가 평가하는 게 아니라, 내가 직접 찾아내고 선택할 수 있는 문제가 되거든요. 괜한 덕담으로 하는 말이 아니라, 저는 이게 진짜 같아요. 좋아하면 더 하게 되고, 더 하면 좀 나아지고, 그것이 반복되면, 잘해요. 그건 만고불변의 진리예요.

 

무언가를 좋아하는 것이야말로 재능이네요!

 

그럼요. 물론 그것을 넘어서는 영역도 있겠죠. 박태환 선수처럼 정말 DNA가 갖고 있는 어떤 것. 근데 우리한테 그런 일이 일어나는 경우는 정말 드물잖아요. 그리고 박태환 선수도 지금의 박태환 선수가 되기 위해서는 피나는 노력을 했을 거예요.

 

영화 초반에 어린 광수가 “넌 인마 천재잖아, 네가 뭘 그렇게 열심히 하려 그래. 넌 그냥 하면 돼”라는 주변의 얘기를 듣잖아요. 그래서 술 마시고 도박하다가 DNA가 허락한 잠깐의 시간이 지나니까 더 이상 안 되잖아요.

 

그걸 우리가 재능이라고 부르면 과연 합당한 걸까? 생각해보면 아니에요. 좋아하는 걸 포기하지 않고 찾아내는 게 재능이에요.

 

단, 어린 나이에 착각하기 쉬운 것 중에 하나가 ‘성공’하고 좋아하는 걸 섞어서 생각하는 거예요. 자기가 좋아하는 것이 성공한 삶인지, 그 일 자체인지 구분하지 못하는 면이 있어요. 많은 이들이 무엇을 좋아한다고 말하면서 실은 그것으로 이룬 ‘성공의 사례들’을 좋아할 뿐이거든요.

 

그것도 어떻게 보면 성과 위주의 사회에서 갖게된 가치관이겠죠?

 

그러니까 남들이 보았을 땐 실패 같고,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데 그럼에도 내가 그것을 왜 좋아하는지, 얼마나 좋아하는지 설명하는 말을 듣기가 어려운 거예요.

 

성공한 것이야 얼마든지 남들 앞에서 얘기할 수 있죠. 하지만 실패했는데도 이것을 좋아한다고 말하는 힘, 그런 중심을 가질 수 있는 게 중요해요.

 

준호가 몇 등을 하든 “이건 내가 좋아서 하는 거야” 말할 수 있으면 그건 괜찮아요. 어쩌겠어요. 좋아하는데, 단지 잘하지 못하는 걸.

 

그럼에도 그것을 계속 하는 게 행복하다면 그렇게 행복한 순간을 찾아낸 사람을 재능이 없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준호는 그래서 잘 살 거예요. 몇 등을 하든, 앞으로 어떤 일을 하게 되든.

 

비슷한 맥락에서 오디션 프로그램을 예로 들며 좋아하는 일을 하다가 실패하는 건 큰 일이 아니라는 말씀을 하신 적도 있어요.

 

맞아요. 오디션 프로그램을 보면, 정말 좋아해서 나온 사람은 열심히 한 후에 탈락하더라도 정신이 무너지지 않잖아요.

 

그런데 부모의 기대나 사회의 욕망에 끌려 다니다가 실패하면 무너지는 경우가 많아요. 이제부터는 무엇을 해야 할지 전혀 모르는 거죠.

 

준호는 여러 가지 일들을 통과하면서 스스로 버텨낼 수 있는 근력이 생긴 거예요.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하기 위해 상대방(부모)을 설득할 준비가 된 거죠.

 

준호의 엄마처럼 부모가 자식의 성공에 인생을 다 거는 경우, 부모에 대한 부채감 때문에 그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어 괴로워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럴 땐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냥 부모를 배신해야죠. 둘 다 하겠다는 건 세모 같은 네모란 말처럼 불가능하다고 봐요. 사회가 말하는 성공과 안정을 바라는 부모한테 “나 영화할 거야” 하는 것만으로도 아마 배신일 거예요. 그런데 또 영화를 만드는 과정에서 부모한테 칭찬받고 싶어서 만든 영화가 좋기도 어렵거든요.

 

하지만 다른 시대를 살고 다른 인생을 살 건데, 어떻게 부모가 갖고 있는 기준과 판단에 모든 걸 다 맞추겠어요. 상처가 되겠지만, 그 상처에 대해 서로 얘기하는 수밖에 없죠.

 

남에게 피해 주는 것만 아니라면, 마음 가는 대로 하고, 그렇게 마음 가서 한 일 중에 좋아하는 것을 찾아, 그 일을 재밌게 하며 사는 삶이 행복한 거라고 생각해요.

 

Photographer_김재윤 Ultra studi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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