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빠져서 다리 부러지면 내일 출근 안 해도 될까?”
지하철 문이 열리고, 문과 바닥의 간격이 넓으니 조심하라는 방송이 나올 때였다. 친구는 그 사이로 뛰어드는 시늉을 하며 웃었다. 하루 종일 까칠한 선배의 비위를 맞추느라 너덜너덜해졌다는 마음이 내 눈에도 보이는 것 같았다.
다른 사람에게 이런 이야기를 들은 적도 있다. 프로젝트 준비 때문에 며칠 밤을 샜는데, 그날도 언제 퇴근할지 기약이 없었다. 몽롱한 정신으로 횡단보도를 건너는데 멀리서 차가 달려오는 걸 보고 ‘차라리 차에 치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단다. 정말 무서운 생각이라는 걸 알지만 그렇게라도 좀 눕고 싶었다는 말을 들으며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일을 시작하면서 깨달은 것은, 세상엔 슬픈 연애담만큼이나 힘겨운 ‘노동담’이 많다는 것이었다. 저녁이 없는 삶, 야쿠자 사회를 벤치마킹 한 듯한 위계질서, 시험에 들게 하는 인간관계…. 어쩜 그리 소재도 무궁무진한지. 주말 점심에 시작되는 불행 배틀은 쉬이 끝나질 않는다.
하지만 그 배틀장에서 가장 눈여겨봐야 하는 사람은 목에 핏대를 세운 참가자들 사이에 서 홀로 초연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이다. 과열된 분위기를 가라앉히며 그에게 이야기를 청해본다. 첫 문장부터 모두의 얼굴이 숙연해진다.
“행복하질 않아.”
왜? 진짜 좋아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젠 아닐지도 모른다는 예감 때문에. 하면 할수록 이 일과 안 맞는다는 생각이 커져서. 일이 내 삶을 좀먹고 있는 것 같아서 등등. 조건의 문제가 아니라 이 일이 나와 안 맞는 짝이란 걸 느껴버린 거다.
그럴 때 대다수 사람들이 택하는 방법은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는 것이다. 더 쉽게 말하면 좋게 생각하는 것. 어떻게 들어온 회사인데, 복에 겨웠구나. 그래도 이만한 곳이 없잖아. 이 정도도 못 버티면 사회생활 못 하지. 지금 괴로운 마음만큼이나 여기까지 오기도 힘들었기에, 어릴 때부터 인이 박히게 들어왔던 논리를 체화하길 택한다.
물론 ‘버틴다’는 건 어떤 이유에서든 대단하다. 힘겨워도 주어진 일을 열심히 해내고, 때론 부당한 것들까지 끌어안으며 밥벌이를 한다는 것. 그 자체로 박수 받아 마땅한 일 맞다. 하지만 그 자리에서 버티는 것만이 정말 최고의 미덕이냐고 묻는다면 ‘글쎄’다. 오히려 되묻고 싶다. 떠나길 택한 사람에게 ‘버티지 못했다’고 딱지 붙이는 사회의 시선이 우리를 버틸 수밖에 없게 만드는 건 아닌지.
몇 달 전, 삼성전기 성희롱 사태(2005년)에 맞서 싸워 화제가 됐던 이은의 변호사를 인터뷰한 적이 있다. 그녀는 회사와의 소송에서 승리한 후 퇴사하고 로스쿨에 들어가 변호사가 되었다. 아무리 회사 생활이 어려워졌어도 적지 않은 나이에 퇴사하는 게 두렵지 않았느냐고 묻자 그녀가 대답했다. 직장에, 학교에 연연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고. 소중히 여기지 않는 게 아니라, 거기에 연연하고 매몰되는 순간 정작 ‘나’는 사라져버린다고. 인터뷰가 끝나고도 한참 동안 그 말이 머리에 맴돌았다. 마음에 지워지지 않는 펜으로 기록해놓고, 틈날 때마다 들춰보고 싶은 이야기였다.
그래, 힘들게 시작한 일이 나를 불행하게 만들 수 있다. 죽어라 버텨보려 노력했지만 결국 ‘고’인지 ‘스톱’인지 결정해야 하는 순간이 있는 것이다. 어쩌면 그럴 때 결단을 내릴 수 있는 힘은, 넉넉한 비상금이 아니라 여기가 아닌 곳에서도 살아갈 수 있다는 ‘용기’에서 비롯되는 걸지도 모른다. 글을 쓰는 나, 아이스크림을 파는 나, 게스트하우스에서 청소를 하는 나 모두 같은 사람이고, 나의 의미는 무엇을 하느냐에 따라 결정되지 않는다는 자명한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에서부터.
그렇게 생각하면 두 손으로 가리고 있었던 다른 가능성들이 희미하게나마 보이기 시작한다. 막연히 동경해왔지만 엄두를 못 냈던 것들, 원래 하던 일과 접점이 있는 다른 분야에 눈길이 가 닿고, 잠깐 상상해봤던 나의 이런 저런 모습을 구체적으로 그려보게 되는 것이다. 여행을 갔을 때 목적지 주변을 헤매다가 마음에 쏙 드는 골목길을 만나게 되는 것처럼 나는 우리의 세상도 그런 식으로 확장되는 것이라 믿는다. 처음에 발을 들였을 땐 상상도 못 했던 변화를 맞으면서 꼬불꼬불 자기만의 길을 그려나가는 거라고.
그런 의미에서 요즘 목이 빠져라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 3년쯤 회사를 다니다가 그만두고 스페인 산티아고로 날아간 Y. 아름다운 풍경을 보며 900km 거리를 걸었더니 결국 도가니가 나갔다고 연락이 왔다. 일정 내내 비가 내려 무거운 배낭 위에 척척한 비구름까지 얹고 다녀야 했던 그녀. 발을 찍은 사진을 보내주었는데, 여기저기 왕방울만 한 물집이 잔뜩 잡혀 있었다. 순례길에서의 고난이 좀 더 정직하게 표출됐을 뿐, 그녀가 돌아와 새롭게 마주할 일상도 결코 천국은 아닐 것이다.
다만, 여기가 아닌 다른 곳에서의 어려움을 맞닥뜨리기로 결심한 순간 펼쳐진 세계는 이전의 것과 다르리라. 일을 그만둔 사람들이 약속이라도 한 듯 여행을 떠나는 이유는, 휴식의 목적뿐만이 아니라 오랜 시간 잊고 있었던 다양한 세계를 상기시키기 위함이 아닐까. 두려워했던 것과 달리 나는 어디든 갈 수 있고, 어디에서든 살아갈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기 위해 굳이 낯선외국을 찾는 건지도 모르겠다.
기나긴 길을 완주한 Y는 이제 포르투갈로 넘어가 일주일간의 귀국 전야를 즐길 거라고 했다. 카미노를 걸으며 그녀는 어떤 미래를 그렸을까. 앞으로 그녀가 써 내려갈 또 다른 이야기가 매우 기대되므로 당분간 밤마다 포르투갈로 독촉 메시지를 보낼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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