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이 되고 나서 가장 어려운 문제는 나 자신이었다. 내가 어떤 사람이 될지 내가 정해야 한다는 사실이 무겁고도 무서웠다.

 

내 삶의 정답을 열심히 찾았다. 지난한 풀이 과정만 성공적으로 해낸다면, 원하는 정답에 다다를 수 있을 거라고 믿으면서.

 

스무 살 때는 대학에서 좋은 성적을 받고, 전공과 적합한 진로를 찾아 성공하고 싶었다. 내 전공은 경영학이었는데, 지금은 그 말을 들으면 모두들 깜짝 놀란다. 그만큼 누가 봐도 나와 썩 어울리지 않는 방향이라는 뜻이다.

 

그걸 나만 몰랐다. 몰랐다기보다 모른 척 했다. 이미 선택한 길이니 어떻게든 잘 해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금융권 회사에 다니는 멋진 오피스 우먼이 되겠어! 그게 당시 나의 꿈이었다. 돌이켜 보면 우습다. 그 꿈과 너무 어울리지 않는 모습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도서관에서는 실용서보다 문학을 더 많이 읽었고, 증권 동아리에 소속되어 있었지만 정작 노는 곳은 밴드 연습실이었다. 구두보다 워커를, 단정한 셔츠보다 그래피티가 그려진 티셔츠를 입었다.

 

혼자서 글도 많이 읽고 썼지만 그런 걸 내 미래로 삼으면 안 된다고 믿었다. 부모님을 비롯해 어른들, 선배들, 주변 사람들도 모두 그렇게 말했다.

 

순조롭게 학교를 다니고, 교환학생을 준비하다가 대학교 2학년 여름 방학 동안 작은 증권 회사에서 인턴을 할 기회가 주어졌다. 그때 깨달았다. 이건 아니라는 것을.

 

죽을 것 같았다. 몸이 힘들다거나 일이 고되서 그런 건 아니었다. 사람들은 친절했고 내게는 쉽고 단순한 업무들만 주어졌다. 하지만 매일 매일 우울했다. 무엇 때문이었을까?

 

시간이 많이 지난 후 깨달았는데, 업무 성격이 맞지 않기 때문이었다. 나는 내가 한 일을 내 눈으로 확인해야 직성이 풀린다. 사소하더라도 처음부터 끝까지 내가 관여할 수 있는 일을 할 때, 비로소 생기가 돈다.

 

하지만 그곳에서 하는 일은 정반대였다. 내가 담당한 부분만 훌륭하게 해내면 되었다. 나머지, 혹은 그 전과 후의 일은 내가 알아야 할 필요도, 알 수도 없었다.

 

반복적인데다 집중력을 요하는 일인 것도 문제였다. 집중력이 없는 대신 멀티태스킹이 가능한 게 몇 없는 내 장점 중 하나인데….

 

하지만 당시에는 무엇 때문에 괴로운지, 그 이유를 찾지 못했다. 그저 목표를 잃고 낙오자가 된 기분이 들었다. 나는 사회 부적응자가 되는 걸까?

 

그려뒀던 ‘목표’가 사라지자 마치 내가 사라진 것 같았다. 그 목표를 정했던 게 바로 나인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완전히 길을 잃은 기분으로, 어찌어찌 캐나다 시골에 위치한 대학교로 교환학생을 떠났다. 맥주를 한 병 사려고 해도 20분쯤 버스를 타고 마트로 이동해야 할 정도로 구석진 곳이었다. 창밖에는 하늘, 푸르고 끝없이 펼쳐진 잔디, 큰 나무, 청설모. 그런 것들만 보였다.

 

심심해서 미칠 것 같았다. 책이라도 읽을 수 있으면 좋을 텐데 도서관에는 (당연히) 영어로 된 책만 가득했다. 밥도 해 먹고 빨래도 돌리고 산책도 하고, 그러고 나서도 시간이 아주 많이 남았다.

 

혼자 묵묵히 속으로 잠기다 보니 나 자신을 자꾸 들여다보게 되었다. 그리고 깨달았다. 이러이러한 사람이 되고 싶다, 하고 꿈꿔왔던 것들이 사실은 별로 유효하지 않았음을.

 

“글쓰기에 영감을 주었던 생각이 완성된 글에 반드시 남아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전제 자체는 그렇게 값진 것이 아니다.

 

그것이 이야기의 발전에 기여하는 바가 있는 한은 머릿속에 가지고 있어야 하지만, 이야기에 급격한 전환이 이루어지기 시작할 때에는 이야기 자체의 진전을 쫓아가기 위해 원래의 생각을 버릴 수도 있다.”

 

시나리오 작가 로버트 맥키가 『시나리오 어떻게 쓸 것인가』라는 책에 쓴 문장이다. 글쓰기뿐 아니라 인생도 마찬가지다. 내게 영감을 주었던 꿈은 더 이상 내 삶에 남아 있지 않았다.

 

나는 그걸 인정해야 했다. 동시에 그게 실패가 아니라는 것도 이해해야 했다. 그건 단지 전제였을 뿐이고, 이제 내 삶의 진전을 쫓아가기 위해 그것을 버려도 좋을 타이밍이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내가 바뀌면, 내 꿈도 서서히 달라지는 게 맞다. 그것들이 나에게 영향을 주고, 나의 발전에 기여했다면 그걸로 충분하다.

 

가끔은 목표를 이루기 위해 노력했던 그 과정이 아쉽고 아까워서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는 생각이 든다.

 

그 순간 삶의 주인 자리에서 내가 물러나고 그곳을 ‘목표’가 차지하게 되어버린다. 내가 만든 목표가 나 대신 내 삶을 살게 두지 말아야지. 기회라곤 오로지 한 번밖에 주어지지 않는 생인데, 우물쭈물하고 겁낼 필요 없다.

 

만약 맞지 않는다는 걸 깨닫고도, 끝까지 내가 정했던 ‘금융권 오피스 걸’이라는 목표를 고집했다면 어땠을까. 몹시 불행했을 테고, 지금의 나는 없었겠지.

 

이후에도 나는 새로운 미래를 품었다. ‘출판사 에디터’와 ‘패션지 에디터’ 같은. 그리고 그 꿈들은 조금씩 모습을 바꿔, 나를 여기까지 오게 만들었다.

 

무엇을 위해 시작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목표는 언제든 바뀔 수 있다. 내가 어떻게든 바뀔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위의 인용 문단은 이렇게 끝이 난다. “문제는 글쓰기를 시작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글쓰기를 계속해 나가고 그 과정에서 끊임없이 새로운 생각들을 이끌어내는 데 있다. 어디를 향해 가는지 다 알고 길을 떠나는 경우란 드물다. 글쓰기는 발견의 과정이다.”

 

그러니 살아가고 있는 한, 무엇도 실패가 아니다. 물론 지금 나에게도 목표가 있고 꿈이 있다. 너무나 이루고 싶어서 매일 밤 일기장에 적고 또 적어보는 미래가 있다.

 

하지만 내가 죽을 때까지 그 꿈을 붙들고 있으리란 보장은 없다. 그래도 괜찮다. 우리가 어떤 사람이 될지, 우리 삶의 끝에 어디로 가게 될지 다 알고 있는 사람은 없다.

 

설사 안다 해도 그건 중요하지 않다. 뻔한 얘기지만 모든 건 결과가 아니라 ‘발견의 과정’에, 말하자면 지금 이 순간에 있으니까.

 

Illustrator_전하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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