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교’는 우리에게 우연히 왔다. 교복을 입은 말간 얼굴을 하고서. 하지만 김고은과 이야기를 나눈 뒤 알게 되었다. 김고은에게 ‘은교’는 우연히 온 것이 아니었다는 걸. 신비로운 마스크, 재능, 행운 뒤에 가려진 김고은의 욕심이 그 모든 것을 필연으로 만들어냈다는 걸.
머리카락이 아주 짧아졌네요! 무슨 심경의 변화라도…?
평소에 미용실 가면 주문이 그래요. 머리 감고 탈탈 털면 나갈 수 있는 머리 해달라고. 제가 손질을 잘 못 하거든요.
<치즈 인더 트랩> 할 때는 머리를 붙였어요. 원래 제 머리 길이는 어깨 정도였는데, 붙인 상태에서 한 달에 한두 번씩 염색을 하니까 두피가 다 뜯어질 것 같더라고요.
촬영 끝나니까 진짜 개털이 됐어요. 애들이 힘이 하나도 없어서 미역 줄기처럼.(울상) 자신감이 없어져서 맨날 모자 쓰고 고개 조아리게 되고…. 스트레스 받아서 잘라버렸어요.
짧은 머리가 혼자서 스타일링 하기 더 어렵지 않아요?
그래서! 지금도 모자 쓰고 다녀요. 하하. 전 귀에다 꽂고 다니고 싶었는데 생각보다 너무 짧아진 거예요. 지금은 피스도 꽂고 예쁘게 해주신 건데, 아무것도 안 하면 진짜 옛날 남자 아이돌 같아요.(씁쓸)
귀여운데요, 되게! 그나저나 <계춘할망> 시사회 때 가족들이 많이 오셨다면서요. 이례적으로.
전작들이 다 ‘청불’이어서….(소곤소곤) 이번엔 할머니께도, 사촌 동생들한테도 보여줄 수 있어서 기뻤어요.
<계춘할망>은 할머니와 손녀딸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인데요. 실제로 고은씨는 스무살 때부터 할머님과 같이 살고 있다고 들었어요.
부모님이 지방에 사시고 할머니가 서울에 혼자 계셔서 자연스럽게 그렇게 됐어요. 초반엔 제가 학교에서 늦게까지 연습하면 할머니가 걱정 때문에 잠을 못 주무셨어요.
자꾸 그러면 할머니가 너무 스트레스를 받고, 병나실 것 같아서 말씀드렸죠. 난 앞으로도 이런 생활을 할 건데 할머니가 그렇게 신경 쓰고 힘들어하시면 내 마음이 얼마나 아프겠냐고. 이젠 되게 쿨한 사이가 됐어요. 서로 터치도 안 하고, 밥을 챙겨줘야 한다는 강박관념도 없고요.
영화 속 혜지는 좀 무뚝뚝한 손녀인데, 고은씨는 실제로 어때요?
음… 같이 살다 보면요.(웃음) 살가움의 방식이 좀 달라지는 것 같아요. 1년에 몇 번 만난다면 더할 나위 없이 살갑게 하겠지만 함께 생활을 하는 거니까요.
<계춘할망> 시나리오를 보면서도 혜지의 감정이 많이 공감됐어요. 저도 할머니가 주는 관심이나 걱정이 부담이 됐던 시기가 있었고, 이제는 제 방식대로 할머니를 위하게 됐거든요.
혜지는 할머니를 만나고 미술부에 들면서 자신의 꿈을 찾게 됐어요. 고은씨는 예술학교를 다니면서 일찌감치 진로를 찾은 것 같은데, 수많은 표현 방법 중에 ‘연기하는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결심한 이유가 있나요?
흔히 ‘끼가 있다’고 하는 친구들은 뭘 시키면 그 자리에서 굉장히 잘 하잖아요. 저는 로봇이 돼요.
예고를 다닐 때도 1학년 땐 영화 파트를 전공했어요. 2학년 때 ‘연기를 한번 해볼까?’ 하다 오디션을 봤는데 덜컥 주연이 됐어요. 연극 평론가 역할이었는데 대사가 어마어마하게 긴 거예요.
무대 위에서 너무 떨려서 제 혀를 막 깨물었어요.(웃음) 무대는 끝까지 마쳤지만 ‘난 못하겠다’ 싶더라고요. 선생님께 다음 학기엔 영화 파트에 가겠다고 말씀드렸더니 “연극 한 번만 더 해봐” 하시는 거예요.
너무 자신 있게 말씀하시기에 다음 작품에 날 또 시키시려나보다 했는데, 총 3막 중 1막에만 등장하는 아주 작은 역을 주셨어요. 사실 기분이 안 좋았죠. 굳이 잡으시더니…. 하하. 대사가 너무 없어서 연습도 10분 만에 끝나고, 나중엔 요령이 생겨서 몰래 자고 그랬어요.
근데 어느 날 선생님이 그러시는 거예요. “고은아, 내가 널 잘못 본 것 같다.” 돌멩이로 머리를 팍 맞은 느낌이었어요. 내가 뭘 하고 있지? 싶더라고요.
그때 맡은 역할이 열 살짜리 꼬맹이였는데, 그동안 배웠던 것과 제 어린 시절을 대입해서 나름 독특한 캐릭터를 만들어 냈어요.
무대 위에서 그 연기를 했더니 관객들이 빵빵 터지더라고요. 암전이 됐는데 너무 내려가기가 싫었어요. 2막엔 제가 안 나오니까. 하하. 그 희열이 주체가 안 되더라고요. 그런 기분을 태어나서 처음 느껴봤어요.
그게 배우 김고은의 시작이었군요. 대학도 한예종으로 진학했으니 정식 교육과정 안에서 연기를 배운 셈인데, 뭐든 학교에서 배우면 재미가 좀 없지 않나요?
‘호흡과 발성’ 같은 과목을 들으면, 태극권을 하고 몸의 움직임에 집중하고 척추뼈를 내리고… 그런 걸 해요. 그때는 사실 누구도 그걸 왜 하는지 몰라요. 도움이 될 거란 것도요.
그게 필요한 과정이었단 건 일을 하면서 알았어요. 어떤 캐릭터를 설정해놓고 어떻게 걷는지, 몸을 어떻게 움직일지 고민했던 시간들이 은연중에 제게 쌓여 있는 것 같아요.
잘하는 또래 친구들에게 둘러싸여 있으면 자존감이 떨어지기도 하고 열등감을 느낄 것 같기도 해요. 고은씨는 어땠어요?
부러운 것과 샘은 너무 다른 감정인 것 같아요. 샘은 미움으로 가는데, 부러움은 저를 배울 수 있도록하고 다른 방향으로 생각하게 만들잖아요. 열등감은 개인적으로 정말 안 좋은 감정이라고 생각해서, 느낄 때면 바로 떨쳐버리려고 해요.
실제로 지금 한예종 출신 배우들이 활약을 많이 하고 있는데, 서로의 연기에 대해서 소통을 많이 하는 편인가요?
아… 신랄하죠.(웃음) 티저 예고편 나오면 그것부터 단톡방에 올려요. “재밌겠는데?” 이렇게 얘기하면 되게 성의 없는 거예요. 디테일하게 얘기해야 돼요. 뭉뚱그려서 얘기한다 싶으면 당장 전화하죠. “감정이 좋았어” 하면 “어떤 감정?” 이렇게요.
시나리오를 백날 봐도 내 것만 보면 시야가 좁아지거든요. 이것밖에 안 보이고, 이 이상 가면 틀린 것 같고. 그런데 제3자가 쓱 보면 경우의 수가 너무 많아요. 이렇게 할 수도 있지 않아? 이럴 거 같은데? 그 말들이 딱 꽂히는 경우도 많고요.
예전 인터뷰에서 캐릭터 분석은 촬영 전에 다 끝내고, 현장에선 감정에만 집중하는 게 철칙이라고 했어요. 해석이 잘 안 되거나 연기가 어려울 땐 어떻게 해요?
사무실을 제 집 드나들 듯이… 감독님을 괴롭히죠. 하하. 감독님과 대화를 진짜 많이 해요. 혜지의 성격을 처음 잡을 때도 감독님이 ‘가출팸’이란 캐릭터를 녹이고 싶다고 하셔서, 관련 다큐멘터리를 계속 봤어요.
그 친구들의 인터뷰를 보면서 캐릭터를 만들었고, 그런 성격에서 할머니를 만났을 때의 반응들이 자연스럽게 나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죠.
연기에 대한 욕심이 느껴지네요. <은교> 이후 선택한 작품들이 매우 강렬했는데, 이런 필모그래피도 고은씨의 의욕에서 비롯된 건가요?
첫 작품 때 학생 신분이었고 말도 안 되는 배려를 받으면서 촬영을 했어요. 그 결과물 때문에 칭찬 받았던 거지, 제가 잘해서 주목 받았다고 생각하지 않거든요.
전 원래 단편이나 독립영화를 많이 찍으면서 이런 저런 과정을 겪고 싶었는데, <은교> 이후 그 과정이 없어지고 바로 프로여야 하는 상황이 됐어요.
그렇다면 당장 또 칭찬을 들으려고 하지 말고 신인이라고 불릴 때 이것저것 다 부딪쳐봐야겠단 생각이 있었어요. 한계를 두지 말고 나를 내던져서 빨리 성장하고 싶었어요.
어때요? 많이 성장한 것 같아요?
솔직히 매 작품마다 두려움이 있어요. ‘내가 할 수 있을까?’부터 시작해서. 연기는 알면 알수록 어렵고 시나리오를 받으면 혼자 바다 위에 떠 있는 기분이에요.
그냥 서툴렀던 부분이 덜 서툴러지는 과정인 것 같아요. 그래도 매번 목숨 걸고 해요. 연기 기복을 없애는 게 20대의 목표거든요.
그러고 보면 김혜수, 전도연, 이병헌, 요번의 윤여정 선생님까지 대단한 선배들과 작업을 많이 했어요. 특별히 전수 받은(?) 조언 같은 게 있나요?
그냥 함께 호흡하면서 연기가 오고가는 순간이 너무 좋았어요. 저한테 너무 좋은 감정을 주시니까 자연스럽게 우러나오는 감정들이 있더라고요. 오히려 연기에 대해 터치나 조언을 해주시진 않았는데, 저도 나중에 선배가 되면 그러고 싶어요.
선배의 한마디가 후배에겐 굉장히 크잖아요. 그래서 굉장히 신중하신 것 같아요. 이 배역은 이 배우가 제일 잘 알 텐데 함부로 말하는 게 얼마나 조심스럽냐, 이렇게 말씀해주신 분도 있었고요.
연기 외적인 사회생활이 어렵다는 말을 한 적이 있어요. 5년 차 배우로서 이젠 어때요? 사회생활의 요령이 좀 생겼나요?
음, 그냥 무던해진 것 같아요. 전에는 속상할 일이 많았죠. 난 아닌데 왜 그렇게 생각하지? 이쪽 일이 워낙 소문이 무성하잖아요. 제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나 배우로서의 태도가 있는데, 그것에 반대되는 이야기가 진짜처럼 나오니까 해명을 해야 하나 싶기도 하고.
그런데 같이 일했던 스태프 분이 그러시는 거예요. “너랑 한 작품이라도 같이해 본 사람은 네가 그런 애가 아니라고 얘기해줄 거야.” 그거면 됐지. 마음이 편안해지더라고요. 지금은 좀 내려놨어요. 하하.
그동안 쉬지 않고 소처럼 일했는데, 다음 차기작까진 뭘 하면서 보낼 계획이에요?
여행도 가고, 친구들도 만나고, 드라마도 보고…?
연애는…?(음흉하게 묻는다)
십센티의 ‘봄이 좋냐?’를 즐겨 듣고 있습니다. 영원히 안 질릴 것 같아요. 몽땅… 망해라!
Photographer_배승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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