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넌 실없이 웃지 좀 마.” 예전에 한 선배로부터 그런 핀잔을 들은 적 있다. 어색하면 어색한 미소, 곤란하면 곤란한 미소, 별일 없으면 그냥 미소… 그런 내가 좀 얄미워 보였었나. 하지만 ‘웃는 상’에게도 고충이란 게 있다. 늘 기본 값처럼 웃어왔기 때문에, 울상을 입력하기가 어렵다는 것.

 

누구나 그런 날이 있을 것이다. 몸이 아프거나 안 좋은 일이 있는 것도 아닌데, 내 머리 위로만 비구름이 낀 듯 우울이 내내 따라 다니는 하루가. 처음엔 그것을 그저 기복이라 여겼다. 가라앉은 기분의 이유를 제대로 찾아보려 하지도 않고, 친구들 앞에서 우스개로 나는 ‘김기복’씨라 곧 괜찮아진다며 실없는 농담을 하면서.

 

그런 말에 와르르 같이 웃고 나면, 내가 정말 남보다 ‘예민해서’ 혹은 ‘괜히 이유도 없이’ 이러는 것 같았다. 그러니 그런 나를 마땅히 탓하는 것으로 우울을 밀어내곤 했다. 한편 그런 어느 날, 잔뜩 풀이 죽어 있는 친구의 전화를 받게 되면 경우가 좀 달라진다.

 

무슨 일이냐고 물어보면, 아무 일도 없다는 대답이 돌아올 뿐이다. 그럴수록 한 번 더 물어 본다. 무슨 일이 있느냐고. 잠시 침묵하던 친구가 그럼 지금 중간에서 만날까? 한다. 해야 할 일도 쌓여 있고, 종일 에어컨 아래서 찬 바람을 쐰 탓인지 목도 부어오지만, 아무래도 무슨 일이 있는 것 같아 알겠다고 한다.

 

전철역 근처 카페에서 만나, 유난히 길었던 친구의 하루에 대해 듣는다. 그렇다고 내가 해줄 수 있는 일은 없지만, 나쁜 놈 이야기엔 맞장구도 치고, 그런 기분 나도 느껴봤다며 공감도 하고, ‘그래도’로 시작하는 응원의 말도 한다. 헤어지기 전, 얘기하고 나니 좀 낫다며 빙긋 웃는 친구를 전철역 입구에서 한 번 안아준다.

 

손 흔들며 헤어지고 돌아오는 길, 멀리서 반짝이는 도심의 불빛들을 보다가 문득 깨닫는다. 내가 지금 잘하고 있는 일과, 전혀 못 하고 있는 일을. 그러니까 친구를 위로할 때 쉬이 하는 말들을, 나는 나에게 전혀 해주지 못하고 있었다. 좋은 친구 일지는 몰라도, 좋은 자신은 아닌 셈이다.

 

 

남에겐 열심이면서 나에겐 무심한

 

늦은 밤이라도 가까운 친구가 힘들다 하면 나가면서, 내 우울은 그저 잠으로 덮어버리려 한다. 어떤 날엔 전화기가 뜨거워지도록 길어지는 친구의 이야기를 끝까지 듣는다. 하지만 내 이야기는 스스로 생각의 코드를 뽑듯 끊어버린다.

 

오늘 무슨 일이 힘들었고, 누구의 어떤 말이 상처가 되었으며, 그럴 때 어떤 감정을 느꼈는지, (남의 이야기만큼도) 찬찬히 들어주지 않는다. 아무래도 자신은 틀렸다고 좌절하는 친구의 가능성은 차분히 믿어주면서, 실수하거나 실패한 나에겐 쉽게 실망만 한다. ‘나’니까 당연히 나에게 제일 잘해줄 것 같지만, 우리는 생각보다 자신을 돌보지 못하고 산다.

 

마음을 돌보는 데 있어서는 특히 그렇다. 나에겐 내가 너무 가까워서일까? 남과는 잘 지내고 싶어 고민하면서도 나와는 되는 대로 지내려 하고, 내가 하지 않으면 아무도 해 줄 수 없는 일인데도 (힘든 내가) ‘알아서 괜찮아지길’ 기다릴 때가 많다. 이상한 일이다. 내가 나인데도 그럴 수 있다니. 흔히 ‘남에게 엄격하고 자신에겐 관대한’이란 표현을 쓰곤 하는데, 실은 정작 남에게 친절하면서 자신에겐 무심한 사람도 많은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내가 나를 잘 돌보지 못하던 저 시절, 시시때때로 범람하던 우울의 이유도 알 것 같다. 그때 나는 여러 가지 문제들을 벽장 안에 구겨서 밀어 넣고선, 아무렇지 않은 듯 웃으며 손님을 맞는 주인처럼 굴었다. 마음이 이렇게 엉망인데도 괜찮아 보여야 할 것 같아서, 때로는 괜찮아 보이고 싶어서, 괜찮은 척했다.

 

그런 시간이 오래되면 마음 안쪽에 엉망인 벽장을 그대로 두었다는 것을 잊은 채로 살기도 했다. 그러나 언제고 벽장 속은 쌓인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고 터져 나오기 마련이었고, 그때가 되면 원래 상태로 되돌리는 일이 훨씬 힘들어지곤 했다.

 

 

다른 누구도 아닌, 나와 잘 지내는 연습

 

그래서 이젠 우울이 찾아올 때, 적어도 그것이 무슨 신호인지 안다. 내가 나를 너무 오래 방치했다는 이야기다. 안타깝게도 일상이란 건 내리막길에 놓인 돌처럼 마구 굴러가려 해서 스스로 멈추려 애쓰지 않으면 그저 속도에 묻어가게 된다.

 

멈춰서 주위를 돌아볼 틈도 갖지 않고, 내 마음이 어떤지도 모르며, 그저 아침에 일어나서, 버스 차창에 머리를 부딪치며 졸고, 사람들을 만나고, 식당 앞에 줄을 서서 밥을 먹고, 다시 집에 돌아와 잠드는 생활만을 반복할 때 우울은 꼬박꼬박 찾아와 문을 두드렸다.

 

그리하여 내가 찾은 방법은, 대단한 것이 아니라, 가끔씩 충분히 혼자인 시간을 보내는 것이다. 그리고 때로 일기를 쓴다. 무슨 일이 있었는 지가 아니라, 오늘 하루 동안 생겨났던 감정들과 문득 마음을 스치고 지나갔던 생각들을 붙잡고 앉아 써본다. 그러다 보면 (실없는 웃음처럼) 꾸미거나 에두르던 감정 속에 생각보다 많은 진실이 숨어 있단 것도 알게 되고, 오래 들 여다보아야 답을 구할 수 있는 문제가 있단 것도 알게 된다. 그럴 때의 일기는, 나라는 친구에게 마음을 터놓고 얘기하는 일이다. 나는 그저 나와 이야기를 나눌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치유심리학자 김영아 교수는 저서 『나와 잘 지내는 연습』에서, 우리 모두에게 제목 그대로의 연습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많은 사람들이 ‘남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하고 계속 남과 잘 지내는 방법만 고민할 뿐, 정작 나하고 잘 지내는 방법은 모른 채 살아간다고.

 

“나와 잘 지내는 첫 걸음은 나를 잘 대접하는 거예요. 정서적 단절인 채 나를 가두어 두는 건 나를 대접하는 게 아니에요. 방치일 뿐이죠. 부디 혼자 있어도 나를 잘 먹이고, 잘 입히고, 따뜻한 것 마시게 하고, 나에게 좋은 말 해 줄 곳을 찾아가세요.”
그걸 내 식으로 옮기면, 내가 나 자신의 가장 좋은 친구가 되어주는 일이겠다. 기쁨을 들어주고, 슬픔을 나눠주며, 언제든 속마음을 털어놓고 위로를 구해도 좋은 친구. 보잘 것 없는 현재를 탓하지 않고 끝까지 나의 가능성을 믿어주며 기다려줄 친구. 여태껏 나에게 잘해주지 못했다면, 친구가 되어주는 것도 방법이지 않을까?

 

다행스러운 것은, 우리 모두는 (어쩔 수 없이) 나 자신의 가장 오랜 친구라는 사실이다. 지금껏 가장 많은 시간을 함께했으며, 힘들었던 모든 일을 같이 겪어온. 멀리서 찾을 필요가 없으니, 다만 알아볼 시간이 필요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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