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삿짐을 싸던 중 옷장 한구석에 처박힌 가방을 발견했다. 한 눈에도 유명 브랜드의 로고를 엉성하게 모방한 일명 짝퉁 가방. 그를 보니 코트 자락으로 가방을 거듭 가리며 얼굴을 붉히는 스무 살 여자애가 떠올랐다. 내 모습이었으니 직접 볼 수 있는 게 아니었는데, 몇 년이 지난 지금까지 또렷하게 기억 난다. 덤으로 그 부끄러운 감정까지도.
대학교 입학 전 나는 시간이 많았고, 쓸데없는 고민은 더 많았다. 대학 생활에 잘 적응하지 못할까 봐 막연히 두려웠다. 사건은 입학을 일주일 앞두고 발생했다. 여대생이라면 고가의 핸드백 하나 정도는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어디서 주워들은 것이다. 맙소사! 가방 따위가 소중한 대학 생활을 망치게 할 수는 없었다. 발등에 불이 떨어진 나는, 인터넷에 ‘여대생 가방 브랜드’, ‘새내기 가방 추천’ 따위를 검색해 봤다. 그리고 알았다. 그들이 추천하는 가방이 한두 달 치 월세를 훌쩍 넘는다는 것을. 또 그런 가방을 살 형편이 안 되는 나 같은 이들을 위해 ‘짝퉁’이라는 것이 있다는 것도.
입학 선물로 뭘 가지고 싶냐고 아빠가 물었을 때, 짝퉁 가방 이야기를 슬쩍 꺼냈다. 뭘 그렇게까지 해야 하냐는 아빠를 설득해 결국 동대문에 갔다. “프라다 짝퉁 있습니까?”라고 묻던 아빠의 점잖은 목소리가 아직도 생생하다.
모조품에도 등급이 있었고, 우리 예산으로 살 수 있는 것은 가장 낮은 등급인 C등급이었다. 그 돈이면 차라리 다른 괜찮은 가방을 살 수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그냥 어떻게든 고가의 가방을 메는 아이들의 대열에 끼고 싶었던 것 같다. 사실 딱히 내가 좋아하는 디자인도 아니었는데. 집으로 돌아가던 길, C등급 짝퉁 가방을 꼭 끌어안은 딸 옆에서, 아빠는 어떤 표정을 짓고 계셨는지 모르겠다.
막상 학교에 간 나는 무척 부끄러웠다. 누가 “이거 짝퉁이지!”라고 지적할 것 같아 괜히 위축됐다. 부자도 아니면서 ‘그런 척’하려 했던 것이 수치스러웠다. 일주일쯤 지나자 도저히 그 가방을 메고 다닐 수 없어서, 차라리 종이봉투에 소지품을 넣어 가지고 다녔다.
막연히 ‘멋쟁이’가 되고 싶었던 스무 살의 나는 그 방법을 몰랐다. 그래서 남들을 따라 고급 핸드백을 들면 멋져질 거라고 믿었다. 그것을 가질 수 없어서 짝퉁 가방으로 흉내를 내는 자신이 한없이 초라하게 느껴지던 시절이었다.
결국 나는 한 달 만에 노선을 변경했다. ‘저렴하지만 자연스럽고 개성 있는’ 에코백 라인으로. 내가 가진 한 줌의 돈은 고급 핸드백을 사기엔 턱없이 부족했지만, 예쁜 에코백을 사기엔 충분했다. 그제야 누군가를 흉내 내는 게 아닌, 내가 진짜 괜찮다고 생각하는 것을 선택하게 됐다. 이제 정말로 고가의 핸드백보다 에코백이 좋다. (이걸 정신승리라고 부른다면, 그냥 그렇다고 치자)
‘멋짐’의 기준을 조금 바꾸면 우리는 쉽게 행복해질 수 있다. 내가 고급 핸드백을 ‘멋짐’의 기준으로 둔다면 평생 쭈그리로 지내야 할 것이다. 하지만 브랜드에 집착하지 않는 걸 멋지다고 정의한다면, 당장 오늘부터 멋쟁이로서의 삶을 누리게 될테다.
P.S. 퇴근한 아빠에게 그 가방을 보여드렸더니 얼른 내다 버리라고 하셨다. 철 없는 딸을 따라, 팔자에도 없는 수모(짝퉁 가방을 팔던 상인 중 일부는 아빠가 단속반인 줄 알고 문전 박대를 했다)를 겪으신 울 아빠. 이 자리를 빌어 사과드립니다.
photographer 김수현, 정민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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