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월, 강남역의 한 노래방 화장실에서 살인 사건이 벌어졌다. 가해자는 칼을 숨긴 채 ‘여자’가 나타날 때까지 한 시간 반을 기다려 무참히 살해했다. 가해자가 밝힌 살해 이유는 “여자들이 나를 무시해서”였다.
사건 후, ‘그 자리에 있었다면 내가 당했을 것’이라는 공포는 이례적인 추모 행렬로 이어졌다. 강남역에 모인 여성들은 살면서 숱하게 경험해온 ‘여성 혐오’ 피해 사례를 공유했다.
이들의 ‘필리버스터’는 끝나지 않았다. 칼로 사람을 찌르는 것만 여성 혐오가 아니다. 이번에 끔찍한 형태로 드러났을 뿐, 여성 혐오는 공기처럼 우리의 일상 어디에나 존재한다.
모든 일에는 시작이 있고, 이유가 있다. 그렇다면 여성 혐오는 어디에서 비롯한 걸까. 남자와 여자로 성별이 나뉘는 것부터가 문제인지, 특정 몇몇 ‘개저씨’가 문제니 그들을 ‘개조’하거나 ‘제거’하면 해결할 수 있는 것인지. 사례는 쏟아지지만 좀처럼 답이 보이지 않아 쉽게 기사를 쓸 수 없었다.
마침 일본의 여성학자 우에노 치즈코 교수가 한국을 방문했다. ‘누구도 여성 혐오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를 주제로 진행된 강의에서는 ‘여혐’의 작동 원리에 대한 힌트를 얻을 수 있었다. 힌트를 얻은 김에 자주 듣던 노래 가사에도 딴지를 걸어봤다.
다시 한 번 깨달았다. 여성 혐오는 어디에나 있다.
우에노 치즈코 1948년 일본 출생.
도쿄대학교 사회학과 교수로 학생들을 가르쳤으며, 현재는 리쓰메이칸대학 대학원에서 특별 초빙교수로 강단에 서고 있다. 저서로는 『여성 혐오를 혐오한다』 『싱글 행복하면 그만이다』 『결혼제국』 『경계에서 말한다(조한혜정 공저)』 등이 있으며, 사회학·여성 연구 분야에서 일본 최고의 지성으로 손꼽힌다.
여성 혐오는 성별이원제 젠더 질서의 깊고 깊은 곳에 존재하는 핵이다. 성별이원제의 젠더 질서 속에서 성장하는 이들 가운데 여성 혐오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마치 중력처럼 시스템 전체 구석구석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너무나도 자명하게 존재하고 있는 탓에 상당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으면 의식조차 할 수 없을 정도다. -12p
‘여성 혐오(misogyny)’라는 말은 제가 만든 게 아닙니다. 이 개념을 처음 만든 사람은 이브 세지윅이라는 미국의 영문학 연구자인데요, 사실 19세기의 영국 문학을 분석하기 위해 만들어낸 개념이 지금의 한국에도 쓰인다는 건 슬픈 일이죠.
여기 계신 많은 젊은 여성분들이 제 책을 보고 “이게 대체 언젯적 얘기야?”라고 말할 수 있으면 참 좋았을 겁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현실은 그렇지 않죠. 지금도 여전히 ‘여성 혐오’라는 개념이 적용되기 때문에 이렇게 많이 오신 거라 생각합니다.
여성 혐오의 원리는 매우 간단합니다. 남성은 여성을 자기 것으로 만듦으로써 본인이 남자라는 사실을 증명하려 합니다. 이때 여자는 사람이 아니라 물건인 거죠.
저는 예전부터 남자가 최고의 자긍심을 느끼는 순간은 언제일지 생각했습니다. 바로 자신이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남자로부터 ‘남자’라고 인정받는 것입니다.
남자를 남자로 만들어주는 것은 남자입니다. 그런데 여자를 여자로 만드는 것 또한 남자라는 점에서 비대칭성이 생깁니다. 사회는 서로를 남자로서 인정한 남자들끼리의 유대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호모 소셜’이라고 말합니다.
이 ‘호모 소셜’은 ‘여성 혐오’와 한 세트를 이루는 개념입니다. 여성이 ‘호모 소셜’에 진입할 수 있는 방법은 하나뿐입니다. 남성에 의해 선택되는 것입니다.
호모 소셜은 남자답지 못한 남자를 배제하는 시스템이므로, ‘계집애 같다’는 말을 듣는 건 남자아이에게 최대의 모욕입니다. 지금까지의 논의를 바탕으로, 이 세상에는 다음 네 가지 구성원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1. 남자에게 남자로 인정받은 남자
2. 남자에게 남자로 인정받지 못한 남자
3. 남자에게 여자로 인정받은 여자
4. 남자에게 여자로 인정받지 못한 여자
남성 사회 속에서 남자가 여자에게 할당해주는 지정석이 있습니다. 아내, 엄마, 주부 등 남자에게 매우 편리한 것들이죠.
여자 입장에서 이 자리를 차지하려면 공기나 다름없는 ‘여성 혐오’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남자가 부여하는 지정석에 대해 “더 이상 나는 못 참아” “여기 있을 수 없어”라고 말하려는 게 바로 페미니즘입니다.
일본의 인기 럭비 선수 다노마루는 좋아하는 여자 타입을 묻는 질문에 “한두 걸음 내 뒤에 물러나 걸어오는 여자”라고 답했습니다. 즉 자기가 컨트롤하기 쉬운 여자가 좋다는 거죠.
일본에서는 대부분의 남자가 ‘귀엽고, 똑똑하지 않고, 가벼운 여자’를 고른다고 합니다. 다노마루처럼 일본에서 영웅시되는 남자에게 사랑받으려면 컨트롤하기 쉬운 여자로 자기 자신을 연출해야 합니다.
일본에서는 아내가 남편보다 수입이 많거나 사회적 지위가 높으면 부부 사이가 잘 풀리지 않습니다. 남성들은 물리적으로나 언어적으로 아내나 연인에게 폭력을 가합니다. 역시 자기 뜻대로 하기 위해서입니다. 이것이 가능한 건 결국 그런 여자를 아내로 골랐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야기를 하다 보면 여성들의 결혼하고 싶어 하는 마음, 즉 ‘결혼 소망’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이런 상황에서도 꽤 많은 여성이 결혼을 바라잖아요. 그것은 지금의 ‘호모 소셜’에서 여성이 사회에 진입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 ‘결혼’이기 때문입니다.
‘자기 여자’란 말은 참으로 잘도 만들어낸 표현이다. ‘남자다움’은 한 여자를 자기 지배하에 두는 것으로써 담보된다. ‘자기 마누라 하나 휘어잡지 못하는 남자가 무슨 남자냐’는 판정 기준은 지금도 살아 숨 쉬고 있다. 여성을 남성과 동등한 성적 주체로 결코 인정하지 않는 이러한 여성의 객체화, 타자화를 ‘여성 혐오’라고 한다. -37p
여성 혐오라는 것이, 여자 입장에서는 ‘자기혐오’가 됩니다. 자기 존재를 부정하고 미워하는 것이 고통스럽기 때문에 스스로를 ‘예외적 여자’로 타자화합니다. 남자들로부터 ‘명예 남성’으로 인정받는 ‘능력 있는 여자’가 되거나, 여성으로서 평가받는 것 자체를 회피하는 식으로요.
여성 혐오의 가해자를 남자에 한정할 수만은 없습니다. 여자도 그 대리인이 될 수 있어요. 그리고 그것은 주로, 안타깝게도 어머니입니다.
여자아이가 태어나면 아쉬워하고, 딸의 첫 생리에 “아유, 너도 이렇게 힘든 길을 가는구나”하며 안쓰러워하는 등 자신이 여성이라는 걸 기뻐하지 않는, 자기를 사랑하지 못하는 어머니의 태도는 그대로 딸에게 전달됩니다.
호모 소셜에서 집단으로서의 남성이 파워 게임을 하잖아요. 그에 준하는 여성의 파워 게임은 미모로 벌이는 경쟁이 되겠죠. 흔히 ‘여자의 적은 여자’라고 하듯이요.
그런데 이 미모라는 건 대체 누구를 위한 걸까요? 여성이 아름다운 걸 좋아하거나 아름다워지고 싶다는 마음을 버릴 이유는 하나도 없습니다. 상대방에게 “너를 위한 게 아냐, 나를 위한 거야”라고만 말할 수 있으면 됩니다. 여성이 자기 자신을 사랑한다는 건 매우 중요합니다.
제 최신의 연구 테마는 ‘케어(care, 요양 보호)’입니다. 노인, 어린이, 장애인 등 케어를 받는 사람과 하는 사람 간에는 압도적인 힘의 격차가 있어요. 이렇게 비대칭적인 권력관계에서 힘을 안 쓴다는 건 분명 노력이 필요한 일입니다.
폭력이 학습할 수 있는 것이라면, 비폭력 또한 학습할 수 있을 겁니다. 여자들은 육아나 수발을 통해 비폭력을 배웁니다. 상대가 자기 뜻대로 안 될 때도 힘을 쓰지 않고 상황을 더 낫게 발전시키려 노력하면서요.
사람이 얼마나 약한 생명체로 태어나서 또 얼마나 약한 생명체로 죽어가는지, 남성도 배울 필요가 있습니다. 전 남녀가 평등해지기 위해 여자가 남자만큼 완력이 세지고, 사회적 지위가 높아지고, 경제력이 좋아지는 것이 해결책이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약하다는 건 악이 아닙니다. 페미니즘은 약한 사람이 약한 그대로 존중받을 수 있게 하려는 사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첫째도 얼굴, 둘째도 얼굴, 셋째도 얼굴
지코의 ‘Boys and girls’
여자는 ‘아름답다’고 치켜세우는 듯하지만 여자의 ‘대접받을 만한 기준’은 철저히 ‘외모’에 한정된다. 남자의 가치를 ‘money’로, 여자의 가치를 외모로 매기는 ‘촌스러운 편견’이 지코의 세련된 비트 안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여자들의 ‘No’는 ‘Yes’라는 뜻이잖아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는 폭력적인 말과 한 세트를 이루는 가사다. 좋으면 좋다고, 싫으면 싫다고, 홍시 맛이 나면 홍시 맛이 난다고 말할 권리는 모두에게 있다. ‘진짜 No’를 ‘속마음은 Yes’로 이해하는 불상사를 예방하기 위해서라도.
우리 애기는 개념 없는 다른 여자들이랑 다르지?
‘Miss Right’의 특별함을 부각시키기 위해 모든 여자를 질투 많고 명품 백에 환장한 것처럼 묘사하고 있다. ‘개념녀’라는 수식어를 붙임으로써 여성의 취향을 ‘무개념 된장녀’로 몰던 것과 흡사하다.
너는 여자라 세상 물정을 잘 몰라, 그냥 오빠 말만 들어
‘자격지심’으로 귀엽게 포장했지만 이 노래의 화자 역시 ‘맨스플레인’을 시전 중이시다. 여자들도 얼마든지 위험한 상황을 넘길 만한 능력을 갖고 있다. 여자를 ‘항상 보호가 필요한 존재’로 규정하는 것 또한 여성 혐오가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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