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화 상담 아르바이트를 했던 적이 있다. ‘텔레마케터’라고 불리는 그 일, 맞다. 출근한 뒤에 가장 먼저 해야 했던 일은, 한 권의 책을 외우는 일이었다. 매뉴얼대로 답하는 법이 실려 있는 책이었다.

 

나는 책에 쓰이지 않은 일에 대해서는 답할 수 없도록 훈련 받았다. 그러면서도 최대한 윗 담당자에게 전화를 넘기는 일이 없어야 했다.

 

그러다 보면 폭발하는 고객들이 생긴다. 전화를 돌려도, 돌려도 해결되지 않는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고객이 욕을 퍼붓더라도 최대한 침착하게 대화해야 했다. 매뉴얼대로, 도와드릴 수 없어 죄송하다고 사과를 하면서도 나는 내가 무엇에 대해 사과하고 있는 것인지, 실체를 느낄 수 없었다. 영혼 없는 사과였다. 그야말로 기계적이었다.

 

일을 하면서 아이러니했던 점은, 고객과 진심으로 소통해야 할 상담 직원은 절대 인간적이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었다.

 

어떠한 모욕을 당하더라도 기계적으로 대응해야 한다. 그래야 회사 내에서 훌륭한 직업 정신을 지닌 직원으로 칭송받을 수 있다.

 

 

한번은 30대 초반의 남자 고객이 전화 해서 화를 낸 적이 있다. 마감 기한이 지난 일을 처리해달라는 것이었다.

 

나는 “처리 기간이 지나서 죄송하다”는 답을 매뉴얼대로 말했다. 그는 욕을 하면서, “그러니까 전화 상담이나 하고 사는 것”이라는 둥 인신공격을 하기 시작했다.

 

고객들은, 이렇게 중요한 일을 처리하는 텔레마케터들이 사실은 방학을 이용해 한 달 간 아르바이트를 하고 떠나버리는 대학생들이라는 사실을 알 리가 없었다.

 

흥분한 고객이 “정부 기관 게시판에 불만을 올리겠다”는 요상한 협박을 하는 도중에, 나는 나도 모르게 전화를 끊어버렸다. 끊어야겠다고 생각하기도 전에 손가락이 버튼을 누르고 있었다.

 

윗사람에게 얘기하자 담당자가 녹취록을 들어봤다. 그러더니 “네겐 잘못이 없으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녹취록에 남아 있는 침착한 목소리가 내 것처럼 들리지 않았다.

 

대응은 훌륭했다. 완벽히 사려 깊게 진심을 다해 미안해하고 있었다. 무엇이 죄송한지는 정확히 몰라도 목소리만은 잔뜩 죄송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내 자리로 돌아왔다. 책상에는 내가 펜으로 적으면서 상담한 내용이 보였다. 마지막으로 적은 것은 아까 그 고객의 전화번호였다. 아르바이트가 끝나면 익명으로 문자를 보내볼까 상상하며 적은 번호였다.

 

진상 고객들의 번호를 적고 복수하는 상상을 하는 것만으로 스트레스가 풀릴 때가 있었다. 그런 상상만으로도 위로를 받다니. 그래, 나는 기계가 아닌 사람이지. 그러니까 화도 났다가 풀리는 것이겠지.

 

때로는 매뉴얼을 벗어나야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다. 매뉴얼은 인간다움을 잃게 만든다. 세상이 내미는 인생의 지침서에는 남들과 똑같이, 비슷하게 살아가야한다고 적혀 있다. 그러면 바쁘게 남들을 쫓아가느라 기계처럼 살게 된다.

 

화낼 일엔 화를 내고, 죽을만큼 힘들면 놓고 쉬기도 하고, 꽃을 기르거나 춤을 추면 어떨까. 매뉴얼에 나오지 않은 선택들이 내 인생을 유니크한 한 인간의 삶으로 만들어줄 것이라고 믿으며.

 

Freelancer_김비밀 marcia_bom@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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