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보 같지만 착한 사람에게 끌리는 마음

<기쿠지로의 여름>

 

여름방학이 왔는데도 9살 꼬맹이는 울적한 얼굴이다. 엄마는 돈 벌리 멀리 떠났다. 일하느라 바쁜 할머니에게는 놀아달라고 할 수가 없다. 친구들은 다들 가족여행을 떠난다는데, 소년만큼은 여름방학에 아무 것도 할 일이 없다.

 

 

결국은 엄마에게 가보기로 한다. 마음씨 좋은 동네 아줌마가 그녀의 백수 남편 기쿠지로를 꼬맹이의 보호자로 딸려 보내준다. 하지만 기타노 다케시가 연기하는 52살 기쿠지로에게는 ‘보호자’보다는 ‘혹’이란 단어가 더 어울린다. 동네 양아치에게서 돈을 뺏는 어설픈(!) 모습을 보면 전직 야쿠자였다던 과거가 약간은 설명된다. 하는 짓은 미덥지 않다. 경마를 하다가 여행경비를 날려버리고, 히치하이킹을 하려다가 차 사고를 내고.

 

 

하지만 영화가 끝날 무렵엔 왜 이 두 사람이 가장 좋은 여행 친구였는지를 알게 된다. 여행뿐만 아니라 삶에도 그런 친구가 있다면. 어리숙하고 사고도 잘 치지만 나도 모르게마음이 가는 정 많고 착한 친구.

 

Editor 조아라 ahrajo@univ.com


‘범인 찾기’ 이상의 무엇

<살인의 추억>

 

살인을 부르는 주문이라도 외는 걸까. 학원을 등록하면 학원에서, 섬으로 여행가면 섬에서, 야구장에 놀러 가면 야구장에서 어김없이 사람이 죽는다. 김전일과 코난 얘기다. 둘은 명탐정 답게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용의자 중에서 범인을 골라내고, 덜미 잡힌 살인자는 친절히 범행동기까지 구구절절 밝히며 자백한다.

 

이 깔끔함에 매료된 나는 어릴 때부터 추리물을 좋아했다. 만화든, 소설이든, 영화든 ‘사건’이 벌어진 뒤에는 항상 멋진 주인공이 나타나 범인을 잡아냈다. 그때 내게 ‘살인’은 주인공을 돋보이게 하는 장치에 불과했다.

 

 

그러나 <살인의 추억>의 주인공 박두만(송강호)과 서태윤(김상경)은 범인을 잡지 못한다. 그들은 김전일처럼 대담하지도, 코난처럼 침착하지도 않다. 철저히 감에 의존하는 두만의 수사는 주도면밀한 범인을 따라잡지 못하고, “서류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던 합리주의자 태윤은 DNA 감식 결과를 확인한 뒤 이성을 잃는다.

 

 

이야기가 끝나도 밝혀지지 않는 ‘살인’의 결말. <살인의 추억>을 보고 처음으로 미스터리의 목적이 ‘범인 찾기’가 아닐 수 있음을 납득했다. 미스터리의 가치를 탐정과 살인범의 두뇌싸움으로 한정하기엔, ‘사건’ 하나로 드러나는 부조리가 너무 많다.

 

Editor 기명균 kikiki@univ.me


다시 사랑한다 말하려다 실패

<비긴 어게인>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갈 때, 깊은 후회의 한숨을 쉬게 만드는 영화가 있다. 영화가 주는 감동에 완전히 압도돼 ‘나는 왜 저렇게 살지 못하고 있는 걸까’라는 다소 엉뚱한 종류의 후회다. 이 영화가 그랬다.

 

돌이켜 보면 중학교 때 나는 장래 희망을 적는 칸에 ‘작곡가’라고 썼었다. 고등학교 수업 시간엔 노랫말을 끼적이며 수많은 습작을 만들었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내 이름을 걸고 제대로 된 음악을 만들어야겠단 생각은 진지하게 해보지 않았다. 난 언제까지나 좋은 음악의 소비자일 뿐이었다.

 

 

별생각 없이 본 <비긴 어게인>의 음악들은 잊고 살던 창작욕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104분의 러닝타임 동안 버릴 곡이 단 하나도 없었다. 눈 감고 음악만 들어도 행복했다.

 

뭐에 홀렸는지 영화관에서 이 영화를 3번째 보고 나오면서 그 길로 신디사이저를 구입했다. 물론 한 달 후 내 방 장식품으로 전락했지만 말이다. 그래도 <비긴 어게인> 덕분에 잠시나마 어릴 적 꿈을 되새김질할 수 있어 행복했다. 신디사이저 값 + 영화 3번 본 값 + 팝콘, 사이다를 합치면 돈이 꽤 들었지만….^^

 

Editor 이민석 min@univ.me


낙관이 필요한 날에

<월-E>

 

며칠 전, 친구가 문득 말했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애니메이션이 있어서 그래도 내 인생이 더 좋아진 것 같아. 다행이야.” 그렇다면 내겐 픽사(PIXAR)가 그런 존재겠다. 픽사의 다정하고 사려 깊은 애니메이션들 덕분에 마음의 어느 한구석이 시들지 않았다.

 

이를테면 <월-E> 같은 애니메이션. 쓰레기 마천루만이 높이 솟은 2810년의 황량한 지구에 홀로 남겨진 청소 로봇 ‘월-E’. 그의 단조로운 일상과 소망, 그리고 식물 탐사 로봇 이브를 만난 이후의 감정선을 대사도 거의 없이 보여주는 앞의 30여 분은 볼 때마다 사랑스러워 빠져들게 된다.

 

 

거기다 두 로봇의 대화는 오로지 서로의 이름을 톤을 달리해 부르는 것뿐인데, 이름이 대화의 전부라니 더욱 아름다울 수밖에. 서사는 단조로운 편이지만, 실은 그 단조로움이 좋다.

 

‘우리는 생존하는 게 아니라 살아가야 한다’는 캡틴의 대사도. 끝내 우리에게 풀 한 포기의 희망을 보여주는 월-E도. 어른이 되면, 어쩔 수 없이 더 이상 믿지 않게 되는 이야기들이 늘어간다.

 

좋은 이야기, 아름다운 이야기인 건 알지만, 현실과 너무 멀어 마음에서 밀어내게 되는 이야기들. 그런데도 나는 여전히, <월-E>가 보여주는 이 세계만은 믿고 싶어진다. 낙관이 필요할 때, 그럼에도 다시 한번 미래를, 인간을 믿고 싶어질 때 월-E가 그 녹슨 손끝으로 우리의 손을 잡아주기 때문이다.

 

Editor 김신지 summer@univ.me


사랑은 핑퐁처럼

<그녀를 믿지 마세요>

 

‘웬수’였던 두 사람이 사랑하게 되는 것이 로맨틱 코미디의 숙명이라면, 그 과정을 설득시키는 건 두 사람이 주고받는 ‘핑퐁’이다. 성격도, 자라온 환경도 다르지만 여기서 저기로, 저기서 여기로 자꾸 뭔가가 날아오고 받아치게 된다면 그걸 ‘케미’라고 불러도 되지 않을까.

 

<그녀를 믿지 마세요>는 내가 본 중 가장 재밌는 핑퐁 게임을 벌이는 영화다. 사기 전과가 있는 영주가 자신의 가방을 찾으러 희철의 집에 찾아갔다가 제 버릇 개 못 주고 약혼녀인 척하면서부터 악연이 시작되는데…. 영주의 정체를 밝혀 자신의 결백을 증명하려는 희철과 노련한 ‘꾼’의 실력으로 마을 사람들을 자기편으로 만들려는 영주의 대결.

 

 

팽팽하게 치고받던 핑퐁의 양상이 변하는 것은, 둘 중 한 명이 혹은 두 사람 모두가 이 게임에서 승리가 아닌 상대방을 원하게 되는 순간이다. 그때부터 공의 흐름은 느려지고, 손길은 신중해진다. 그래도 하나도 지루하지 않다. 나는 이 경기를, 두 선수를, 이 이야기를 이미 많이 좋아하게 됐으니까.

 

Editor 김슬 dew@univ.me


Editor in chief 전아론 aron@univ.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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