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주인공은 이 포스터에 없다
<부산행>은 연상호 감독 작품 중 최초로 상업영화, 실사영화라는 타이틀을 달고 태어난 영화다. 2011년 <돼지의 왕>부터 2012년 <창>, 그리고 2013년 <사이비>에 이르기까지 ‘연상호 르네상스’를 향유했던 이들에게 <부산행>은 고까운 존재일지도 모르겠다. 다만, <부산행>이 “생각할 여지를 주던 전작과 궤를 달리 한다”는 비판에는 동의할 수 없다.
연상호 감독은 꾸준히 고집해오던 사회비판적 스탠스를 <부산행>에서도 유지한다. ‘디스토피아’, ‘계급사회’, ‘기만’ 등 연상호 감독의 전작에 필수로 등장하던 다섯 가지 ‘연상호 코드’를 <부산행> 속에서도 찾아보도록 한다.
*주의: 이 글에는 다수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을 수 있습니다.
먹던 거 계속 먹어도 된다. 당신의 이야기가 아니다
경민과 종석의 학교는 반장 패거리와 선배 학생회가 철권을 휘두르는 철저한 계급사회다. 어느 날, 존재감 없던 철이가 종석을 괴롭히던 반장을 폭행한다. 철이는 경민과 종석을 아지트로 불러 개에게 잡아먹히는 돼지가 되지 않기 위해선 더욱 악해져야 한다며 악당수업을 연다. 이윽고 학생회장 패거리와의 싸움으로 퇴학당한 철이는 조회 시간에 투신자살해 패거리들에게 안 좋은 기억을 심어주는 계획을 밝힌다.
오해 하지 말 것. 임권택 감독의 <창>과는 완전 다른 영화다
모범병사인 정철민 분대장의 생활관에는 창이 없다. 어느 날, 그의 분대에 관심사병 홍영수 이병이 전입 온다. 준비태세 훈련 중 사단장의 군장 검사에서 깔깔이 두벌과 건빵, 바람 넣은 비닐봉지만 들어있는 홍영수 이병의 군장이 발견된다. 결국 분대원 전체가 얼차려를 받고, 분노한 정철민은 홍영수를 무참히 구타한다. 그날 밤 홍영수는 자살을 기도하고, 대대장은 모든 원인을 정철민에게 돌린다.
‘본격 사회고발 애니메이션’이라는 비장한 문구가 가장 믿을 수 없다
수몰 예정 시골 마을에 살고 있는 김민철은 난봉꾼이다. 어느 날 술집에서 사기꾼 장로 최경석에게 얻어맞은 민철은 추적 끝에 최경석이 수배중인 사기꾼이란 것을 알고, 그가 운영하는 사이비 교회에서 그의 실상을 까발린다. 하지만 맹목적인 믿음에 빠진 마을사람들은 그를 미친 사람 취급한다. 교회의 목사 성철우는 공범 최경석의 협박에 결국 그를 죽이고 만다. 이어 김민철을 회유하려 하지만 여의치 않자 그 또한 죽이려 한다.
이제부터는 다섯 가지 키워드로 위에서 소개한 연상호 감독의 애니메이션 세 편과 <부산행>의 연결고리를 살펴보겠다.
JYP가 미국에 보내지만 않았으면 이 고생 안 하는 건데…
연상호 감독은 익숙한 주변 일상이나 공간을 비극적 배경으로 치환하는 재주가 있다. 학교를 개, 돼지의 사회로(<돼지의 왕>), 내무실을 폐쇄적 반이상향으로(<창>) 묘사하는 식이다. <사이비>에서는 더 세밀하다. 사람들의 한정된 삶을 ‘댐 건설로 수몰 위기에 처한 마을’로 그려냈다. 이 마을에 교회가 선다. 죽음이 예고된 공간에서 주민들은 사후구원을 위해 사이비 교회에 현혹된다.
연상호 감독은 <부산행>으로 더 과감해졌다. 국내에서 한 번도 시도된 적 없는 ‘좀비 아포칼립스‘다. 뛰어다니는 건 기본이요. 관절 마디마디가 꺾여도 각기 춤을 추며 따라온다. 그런데 더 무서운 건 공포를 마주한 인간들이다. 좀비가 기차를 잠식하는 동안 인간은 이기심과 편협함으로 점철된 인격 말살의 단상을 보여준다. 이것이 <부산행>이 보여주는 디스토피아의 본질이다.
저런 형이 앞에 있으면 지옥 끝이라도 따라갈 수 있다
연상호 감독은 작품 속에 여러 형태의 계급 구조를 심는다. <창>에서는 군대라는 직관적인 계급사회를 보여준다. 군대는 철저한 상명하복 관계로 계급사회의 표상이다. 하극상이나 명령불복종을 가장 무거운 죄질로 규정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돼지의 왕>의 학교는 지배하고 먹는 개와 지배당하고 먹히는 돼지가 존재하는 약육강식 세상이다. <사이비>에서는 교회와 주민들이 수탈/피수탈 관계를 형성한다.
<부산행> 역시 몇몇 장면과 캐릭터로 계급의 형성과 전복을 시사한다. 먼저 증권사 펀드매니저 석우(공유 분)와 운수회사 상무 용석(김의성 분)은 특실 승객이다. 연상호 감독은 둘에게 조금 더 구체적인 특권을 준다. 정보의 불균형이다. 석우는 민 대위에게 대전역 격리 조치 소식을, 용석은 대전 폐쇄 소식을 미리 듣고 이기심을 내비친다.
정보를 쥔 자의 특권의식이다. 석우 일행이 생존자 칸으로 전진하는 모습(봉준호 감독의 <설국열차>를 연상케 하는)은 계급의 이동을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이 새끼가 모든 사태의 원인이다!
권선징악에 익숙한 관객에게 연상호식 캐릭터는 우유 없는 고구마다. <창>의 모범 분대장 정철민은 폭력행위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으며, <사이비>의 김민철은 정의의 사도 같지만 복수에 눈 먼 망나니일 뿐이다. <돼지의 왕>의 종석은 학교폭력의 피해자지만, 철이를 죽이고 만다. 연민할 수도, 힐난할 수도 없으니 모두 피해자고 가해자다.
<부산행>은 언뜻 빌런이 확실한(김의성의 미친 존재감으로) 영화 같아 보인다. 하지만 석우가 “양보하지 말고 너만 생각해”라며 딸을 훈계하는 장면은 용석의 악행에도 정당성을 부여한다. 집주소를 뇌까리며 구해 달라 애원하는 용석은 한낱 나약한 인간일 뿐이다.
원죄는 석우에게 있다. 석우가 작전을 건 바이오산업이 사태의 원흉이란 걸 알게 된 후 그는 스스로 죄를 사하려는 듯 피 묻은 손을 씻어낸다. 생존자 칸에서 추방된 후 그가 당했던 방식대로 반대편 출입구를 막을 때, 선과 악의 경계는 다시 한 번 모호해진다.
사람들이 달릴 때는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니 너도 멀뚱히 서있지 말고 달리렴…이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인간존엄을 제거하는 방법은 다양하다. 먼저 <사이비>의 우민화다. 주민들은 언젠가는 죽는다는 두려움 때문에 맹목적 믿음을 보인다. <창>에서는 군대폭력을 통한 인간성 상실과 절대적인 계급에 자유의지가 박탈당하는 무너진 존엄성을 보여준다. 마지막으로 <돼지의 왕>에서는 인간존엄을 무너뜨리는 가장 쉬운 방법을 구사한다. 바로 동물화다. 개, 돼지로 표현되는 학급 구성원은 인격 상실의 극치다.
<부산행>에서는 좀비화라는 더 구체적인 방법으로 인간존엄을 말살한다. 시각과 청각에만 의지해 생존자를 쫓는 좀비는 보이는 대로, 들리는 대로 행동하는 몽매한 인간 전형이다. 좀비보다 잔인해진 생존자 칸 사람들(미드 <워킹데드>에서도 연출된 좀비물 특유의 클리셰)을 통해서도 인간성이 사라진 추악한 인간사회를 보여준다.
종길(박명신 분)이 석우 일행을 몰아낸 생존자들을 비웃으며 출입문을 여는 건 인간존엄이 결여된 사회는 내부의 환멸과 염증으로 붕괴되리라는 경종이다.
솔직히 김의성보다 옆에 있는 부산 사투리 아저씨가 더 짜증났다
<사이비>는 인간의 최대약점을 이용한 가장 악질적인 기만행위를 보여준다. 사후에 대한 두려움은 사기 치기 가장 좋은 소재니까. 주민들은 한정된 천국의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전 재산을 헌금으로 바친다. <창>에서는 정철민 분대 해체의 원인이 된 홍영수 이병의 ‘자살 쇼’가, <돼지의 왕>에서는 패거리에게 끔찍한 기억을 안겨줄 철이의 ‘자살 쇼’가 등장한다.
<부산행>에는 2014년 4월, 더 멀리 가면 1950년 6월을 떠올리는 장면이 나온다. “폭동이 진정되고 있으니 시민들은 자리를 지킬 것”을 요구하는 정부발표다. 석우를 추방하는 용석의 선동 또한 명백한 기만행위다. 영화 <미스트>를 봤다면, 용석의 모습에서 카모디 부인(마샤 게이 하든 분)의 모습이 오버랩 되는 것을 느꼈을 거다.
나치 선동정치의 롤모델 괴벨스는 “이성을 제압하는 가장 손쉬운 방법은 공포와 힘”이라고 했다. 용석은 생존자들의 공포를 적절히 이용해(이 새끼 감염됐어! 눈깔 봐!) 석우 일행을 격리하는데 성공한다.
유니클로 티셔츠에 뿔테 안경을 보면 동네 백수 형 같지만, 굉장히 잘나가는 영화감독님이시다
<부산행>의 연출을 두고 이래저래 말이 많이 나온다. 신파와 감동의 경계에 선 석우의 회상 씬, 개연성 없는 수안의 노래, 극의 전개에 관여 못한 후배 전화나 서울 화재 같은 뜬금없는 맥거핀, 고어 없는 연소자 관람용 좀비 액션 등 실소가 나오는 장면들이 더러 있어 아쉬웠다는 점은 인정한다.
다만, 이 영화가 ‘연상호의 실패작’이라는 비판에는 수긍할 수 없다. 전술했다시피 <부산행>은 연상호 감독의 첫 번째 상업영화다. 무리한 연출과는 별개로 그가 이 리그에서도 충분히 통한다는 가능성을 보여줬다. 감독이 영화 곳곳에 숨겨놓은 메시지를 차치하고라도 <부산행>은 충분히 재미있는 오락 영화다. 첫 번째 실사영화로 작품 영역을 넓힌 연상호 감독의 행보가 더 기대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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