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덕혜옹주>가 지난 수요일 개봉했습니다. 영화 제작비가 부족하자 주연 배우 손예진이 선뜻 10억을 투자했다고 해서 개봉 전부터 화제가 됐던 영화죠. 덕분에 어수선한 세상에서 오랫동안 잊혀졌던 조선의 마지막 황녀에 대해 궁금해하는 사람들이 많아졌습니다.

 

 

 

좌 소설 『덕혜옹주』, 우 영화 <덕혜옹주>

 

영화뿐만 아니라 원작 소설에도 관심이 있는 독자들을 위해, 이번 주 김혜원의 베스트셀러 겉핥기는 소설 『덕혜옹주』로 골라봤어요.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잊지 말아야 할 역사를 환기시켜 주는 동시에, 서사 자체만으로도 흥미로운 책이었습니다. 소설과 영화의 내용이 살짝 달라서 영화를 보기 전에 읽고, 비교해가며 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아요.

 


1. 망국의 공주로 태어나다

소설 『덕혜옹주』는 출생부터 죽음까지 단 한 순간도 평온하지 못했던 황녀의 삶을 그린 책입니다. 옹주는 고종의 유일한 딸로 태어났어요. 망국의 상황에 공주로 태어나, 황적에 오르지도 못하고, 이름조차 없는 어린 딸을 고종은 늘 애틋하게 생각했습니다. 요즘 말로 하면 딸바보라고 해야 할까요? 아이를 늘 눈 앞에 두고 싶어서 궁 안에 유치원을 세울 정도였으니.

 

*옹주: 임금의 후궁이 낳은 딸

 

 

고종은 하나 남은 딸만은 아들들처럼 일본에 끌려가게 할 수 없다고 늘 다짐했어요. 하지만 일제치하의 폐위된 왕에겐 힘이 없었죠. 고종의 계획은 번번이 무산됐습니다. 나라를 지켜내지 못했다는 자책감에, 옹주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괴로워하던 고종은 결국 옹주를 남겨두고 세상을 떠납니다.

 


2. 고종의 죽음, 홀로 남겨진 옹주
“아바마마를 독살한 자들을 가만두지 않을 것입니다”

고종의 죽음으로 옹주는 크게 절망합니다. 이제 그 무엇도 자신을 보호해 줄 수 없다고 생각해요. 황실은 여전히 허약했고, 일본의 횡포는 날이 갈수록 심해졌습니다. 친일파가 호시탐탐 나라를 팔아먹을 기회를 노리는 세상. 그 속에서 어린 옹주는 억지로 마음을 다잡습니다.

 


그녀는 속으로 다짐했다. 아바마마를 독살한 자들을 가만두지 않을 것입니다. 기필코 그자들의 죄상을 만천하에 밝혀 아바마마의 원혼을 위로하겠습니다. 부디 제게 그럴 수 있는 용기와 힘을 주소서.

124p


 

그녀는 세상과 타협하지 않았어요. 일본 순사에게 괴롭힘을 당하고 있는 아이를 보면, 마차에서 뛰어내려 불호령을 내렸습니다.

 

 

그렇게 구한 아이는 후에 옹주의 몸종이 되어, 죽을 때까지 그녀에게 충성합니다. 일본 순사를 다스리던 위엄과 당당하고 흔들림 없는 태도. 백성을 어루만질 줄 아는 따뜻한 마음씨. 소설에서 묘사하고 있는 그녀는 어렸지만, 한 나라의 공주로서 부족함이 없어 보였어요.

 


3. 식민지의 굴욕, 옹주 일본에 볼모로 잡혀가다.


“나는 덕혜라는 이름을 지어 받았다. 그것도 얼마 전에야. 그런데 이름을 얻은 대가로 일본에 가야 하는 것 같구나. 황족은 일본에서 교육을 받아야 한다는구나. 이름을 얻으면서 정식으로 황족이 됐는데 이름이 없던 때가 더 나았던 모양이다. 이름을 얻은 것이 오히려 화가 되었구나…”

200p


 

고종이 그토록 막고 싶어 했던 옹주의 일본행은, 그녀가 정식 황족으로 인정됨과 함께 결정됐습니다. 옹주가 일본으로 떠나던 날, 많은 사람이 그녀를 배웅하러 나왔어요. 마음 얹을 곳 없는 낯선 땅으로 끌려가는 옹주를 보며, 백성들은 망국의 백성으로서 앞으로 어떻게 이 시절을 견뎌야 할지 막막해했습니다.

 


4. 부마가 될 뻔한 남자, 김장한
“마마를 지켜내는 게 내 운명이다.”

옹주가 일본으로 강제 유학을 떠나게 된 사실에 누구 못지않게 절망한 이가 있었어요. 바로 김장한이라는 청년. 그는 고종황제가 마지막으로 믿었던 신하, 김황진의 조카에요. (영화에서는 박해일이  이 역할을 맡았죠.)

 

고종은 일본이 옹주를 채가기 전에 가장 믿을만한 시종의 아들과 약혼을 시키고 싶어 했습니다. 그는 부마가 될 아이를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싶어 아이를 궁으로 불렀고, 그날 김장한은 우연히 옹주와 마주치게 됩니다. 그리고 옹주에게 첫눈에 반하죠.

 

*부마: 왕의 사위

 

입궁했던 날 이후로 장한은 밤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합니다. 눈만 감으면 옹주의 얼굴이 떠오르고, 그 아름다운 소녀와 평생을 함께한다는 생각만 하면 가슴이 벅차올라 심장이 두근거려서요 .하지만 일본의 방해로 두 사람의 약혼은 성사되지 못했고, 고종황제는 돌아가셨으며, 옹주는 일본에 끌려가게 됐습니다.

 

김황진은 소년에게 옹주를 지키는 그림자가 되라고 지시합니다. 공주의 그림자처럼 살면서 그녀를 지키라는 뜻으로 박무영이라고 이름도 새로 지어줘요. 무영은 아버지의 뜻을 받고, 공주를 따라 일본으로 떠납니다. 사랑도 사치인 시절에 옹주를 사랑한 남자가 택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죠.

 


“너는 부마가 될 뻔하였다. 그것만으로도 마마를 지켜야할 명분이 되지 않겠느냐?”

 

아버지의 음성은 단호했다. 장한은 힘을 얻었다. ‘그래 마마를 지켜내는 게 내 운명이다!’ 장한은 주먹을 꽉 쥐었다. “네, 아버지, 마마를 지키겠습니다.” 아버지의 얼굴에 흡족한 미소가 맴돌았다.

 

“그래 됐다. 그럼 이제 옹주마마가 계신 곳으로 가거라.”

 

298p


5. 일본인들의 괴롭힘,

‘그들은 스스럼없이 덕혜를 가리켜 조센징이라 했다.’

한편 일본에 먼저 와 있었던 덕혜의 오빠, 영친왕은 어린 동생 걱정에 밤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그 자신도 견디기 힘들었던 시간을 이젠 어린 옹주가 견뎌야 했으니까요. 그는 옹주에게 당부했습니다. “너는 어디에 있든 대한제국의 황녀라는 걸 잊지 말아라.” 그렇지 않으면 무너질 밖에 없는 치욕이 옹주의 앞에 놓여 있었거든요.

 

옹주는 일본 귀족 자녀들이 다니는 학교에 입학합니다. 그들은 덕혜를 향한 은근한 비웃음과 멸시를 숨기지 않았어요. 그들은 스스럼없이 덕혜를 가리켜 조센징이라고 했습니다. 은근하던 따돌림은 날이 갈수록 노골적으로 변해 갔어요. 문에 빗자루를 괴어 옹주를 화장실에 가두어놓기까지 했습니다. 하지만 옹주는 소리치거나 애원하지 않았어요. 그럴 때마다 도리어 고개를 꼿꼿이 세웠습니다.

 

 

아무리 조롱하고 장난쳐도 덕혜가 울지 않자, 그들은 오히려 덕혜를 두려워하기 시작합니다. 괴롭힘도 그와 함께 잦아들어요. 그녀는 자신에게 아무런 잘못이 없다고 믿었어요. 조선이 아무런 잘못 없이 주권을 빼앗긴 것처럼. 그러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그런 치욕을 견딜 수 있었던 거겠죠.

 


6. 원치 않는 결혼, “왜 제가 일본인과 결혼해야 하나요?”

고통의 세월은 천천히 흘렀습니다. 옹주는 조선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고 꿋꿋하게 버텼어요. 하지만 공주가 조선 땅을 밟을 수 있는 때는 오직 나쁜 일이 일어났을 때뿐이었습니다. 순종 황제가 붕어했을 때. 덕혜의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어머니마저 그녀 곁을 떠나자 덕혜는 모든 일에 대한 의욕을 잃어버립니다. 세상 어느 곳에서도 그 슬픔을 치유할 수 없었어요.

 

이보다 더 절망적일 수 없다고 생각한 순간, 일제의 앞잡이들은 덕혜를 일본인과 결혼시키려고 합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덕혜는 펄펄 뛰어요.

 

 

하지만 대한제국 황실엔 그를 반대할 힘이 없었습니다. 생활비조차 일본에서 받아 쓰는 상황이었으니까요. 결혼을 앞두고 덕혜는 평온한 표정을 짓는 날이 거의 없었습니다. 혼자서 중얼대거나, 울거나, 지쳐있거나, 낙담해 있거나. 때로는 밤이슬을 맞고 사라지는 날도 있었어요. 사람들은 덕혜가 미쳤다고 수군거렸습니다.

 


7. “제가 목숨을 걸고 결혼 전에 마마를 구출하겠습니다.”

그녀의 결혼 소식을 들은 김장한 아니 박무영은 하늘이 무너지는 기분이었습니다. 옹주를 따라 일본으로 온 지 벌써 수 해. 연정인지 울분인지조차 구분할 수 없는 감정으로 그저 ‘그분의 그림자처럼 살라’는 아버지의 말씀만을 되새기며 살아왔는데. 아직 제대로 된 구출 계획을 세우지도 못했는데. 결혼이라뇨.

 

마음이 급해진 무영은 일본에서 독립운동을 하는 청년들을 모아 거사를 도모합니다. 옹주의 결혼식 날 그녀를 구출하기로. 그리고 몇 년 만에 처음으로 그녀 앞에 모습을 드러내요. 남편이 될 김장한이 아닌 박무영이라는 이름으로.

 

 

무영을 만나고 난 덕혜의 마음은 이제 이곳을 떠날 수 있다는 기대로 부풉니다. 목숨을 걸고 자신을 구출하겠다는 청년. 어쩐지 낯이 익다고 생각했지만 어디서 보았는지 떠오르지는 않았어요. 그녀는 그의 말을 믿어도 될지 혼란스러웠지만, 믿어 보기로 합니다. 설령 함정이 기다리고 있다 해도 상관없었어요. 지금 자신이 처한 상황보다 더 나쁠 일은 없을 테니까.

 


 8. 실패로 끝난 옹주 구출 작전

옹주의 결혼식 당일. 준비는 완벽했습니다. 만일을 대비해 가짜 덕혜 노릇을 할 몸종에게 입힐 옷까지 준비했어요. 하지만 그들은 호락호락하지 않았습니다. 식이 시작되기 한 시간 전, 일본은 결혼식 장소를 바꿔버립니다. 무영은 황급히 바뀐 결혼식 장소로 갔지만 이미 식은 진행되고 있었어요. 만만의 준비를 했지만, 장소가 바뀌는 바람에 모두 무용지물이 되어버린 거예요.

 

 

옹주 구출 작전은 실패로 끝났습니다. 잠입에 앞장섰던 동지는 식장에 들어서지도 못하고 발각되자마자 자결했고, 옹주는 일본인의 아내가 되었어요. 무영은 주저앉아 주먹으로 땅을 치고 벽에다 이마를 세게 들이받았습니다. 무엇이 문제였을까 한탄하는 무영과 함께 책을 읽는 저도 한숨을 푹 내쉬었습니다. 많은 걸 바라는 것이 아닌데. 그저 내 나라로 돌아가고 싶을 뿐인데. 나라 잃은 자에게는 그 어떤 것도 허락되지 않았어요.

 


9. 37년만의 귀국, “나는 낙선재에서 오래오래 살고 싶어요.”

책장을 덮는 마지막 순간까지 덕혜의 삶은 단 한 순간도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일본이 남편과 그녀 사이에서 낳은 딸은, 자신이 일본인이라고 생각하고 싶어 합니다. 조센징이라고 구박받느니 차라리 일본인이 낫겠다고요. 덕혜는 딸과도, 남편과도 닿지 못한 채 말라가요. 사람들은 덕혜를 잊은 지 오래입니다. 어수선한 세상에서 망국의 옹주 따위는 관심사가 아니었을 테니까요.

 

덕혜의 삶은 일본인 남편에게 이혼당하고, 정신병원에 맡겨지는 신세까지 떨어져요. 창덕궁 낙선재로 돌아온 건 그 이후로도 수년이 흐른 뒤. 귀국의 꿈은 쉰 살의 중년 여인이 되고 나서야 겨우 이루어졌습니다. 중년이 된 무영이 정신병원에 갖힌 덕혜를 구해오면서요. 그마저도 정신이 온전하지 못한 채로 돌아온 옹주는, 낙선재에서 외롭게 살다 1989년 세상을 떠났습니다.

 

잠시 정신이 맑아진 덕혜옹주가 죽기전에 실제로 남겼다는 문구

 

 


P.S.

저에게는 소설 『덕혜옹주』가 조선의 마지막 옹주로 태어나 외롭게 살다 간 한 여자의 삶 그 이상으로 다가왔습니다. 내가 그 시대에 태어났더라면? 한 나라의 옹주였던 사람의 인생도 이렇게 기구한데, 한낱 백성으로의 삶은 어땠을까 싶어서 마음이 무거웠거든요. 나라를 잃는다는 건 어떤 의미인지, 다시 한 번 뼈아프게 되새겨 볼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준 책이었습니다.

 


 

illustrator li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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