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의 밥

 

INTRO:

몇 년째 ‘먹방’ 타령이 끊이지 않는다. TV에 나오는 사람들은 모두 먹기 위해 사는 것처럼 요리하고, 눈 깜짝할 새에 접시를 비우는 것이 미덕처럼 여겨진다. SNS에서도 덩달아 최고의 ‘밥’을 엄선해 찍어 올리기 바쁘다. 그러나 하루 세 끼, 혹은 두 끼를 꼬박꼬박 채워야 하는 20대의 밥은 대부분 TV나 SNS 속 ‘먹방’, ‘쿡방’과 거리가 멀다.

 

배고픈 20대에게 ‘먹방’은 딴 나라 얘기일 뿐이라는 우울한 소릴 하자는 게 아니다. 밥에는 사진 한 장으로 표현되지 않는 다양한 이야기가 있다. 내게 밥은 15분간의 요리 대결, 1시간짜리 예능 프로그램이 아니라 365일 카메라가 돌아가는 다큐멘터리다.

 

WHO:

입학 첫해, 새내기의 밥친구는 과 동기와 선배들이다. 잘 모르는 서로를 알아가기에 식사의 경험은 효과적이다. 그래서 ‘선배님, 밥 사주세요’와 ‘오빠가 밥 사 줄까?’를 단순히 호구 찾기나 껄떡거림으로 매도할 수만은 없다. 밥 먹는 속도와 선호하는 메뉴·후식 등 식습관을 알 수 있다는 건 에피타이저에 불과하고, 중요한 건 밥을 먹으며 나누는 대화다.

 

술만큼 그 파괴력이 강하진 않더라도 매 일 끼니때마다 찾아오는 이 시간을 무시할 수 없다. 가랑비에 옷 젖는다고 하지 않았던가. 몰랐던 부분을 알아가면서 A와 B는 더욱 가까워지고 C와 D는 조금씩 멀어진다. 그렇게 캠퍼스 내에 크고 작은 그룹이 만들어진다.

 

WHEN:

그런데 사실 중학교 때도, 고등학교 때도 밥은 반 내의 친한 친구들과 먹었었다. 4교시가 끝나는 종이 울리자마자 급식소를 향해 뛸 만큼 10대 때의 밥은 우선 순위 가장 높은 곳에 위치했다. 하지만 20대엔 이런저런 이유로 식사를 미루게 된다. 시간표를 잘못 짜서 점심시간을 확보하지 못하거나, 오후 강의 시작 전까 지 과제물을 마무리해야 하거나, 오전 강의 때 쪽지 시험을 망쳤거나.

 

무조건 1시간 안에 식사를 마쳐야 했던 고등학교 때보다 더 큰 자유가 주어졌음에도 오히려 제때 밥을 먹지 못하는 것이다. 그럴 경우, 오후 수업이 끝난 3시쯤에야 샌드위치나 김밥으로 미뤄진 끼니를 때운다. 이처럼 20대가 되면 갑자기 주어진 자유를 감당하지 못하는 상황에 여러 차례 부딪힌다.

 

WHERE:

불규칙적인 식사 패턴은 주말에 더욱 심하다. 학교에 가지 않으니 시간표의 속박에서 비켜나 평소보다 더 큰 자유를 누리고 싶어진다. 가장 자유로운 장소를 꼽으라면 아무리 좁고 지저분해도 내 방만 한 곳이 있으랴. 어지간히 배가 고프지 않은 이상 집에서 해결한다. 취사도구가 갖춰져 있다한들 귀차니즘이 온몸을 잠식했을 때는 다 무소용. 맛이나 건강보다 중요한 것이 편의성이다.

 

편의점에서 손에 집히는 대로 사다 놓은 컵라면, 빵, 과자, 초콜릿 등 군것질거리로 배를 채울수록 아침-점심-저녁 세끼의 경계는 흐려진다. 시간이 흘러 방구석에 어지럽게 놓인 인스턴트 음식의 잔해를 발견하면 정신이 퍼뜩 들겠지만 자책할 필요는 없다. 맛있게 먹으면 0칼로리니까. 인스턴트 음식이라도 내 방에서 자유를 만끽하며 먹었다면 그게 다 근육이 되어 몸을 지탱할 것이다.

 

WHAT:

돌멩이를 소화시킬 수야 있지만 그걸 맛있게 먹을 수는 없다. 방 안에서 끼니 때우기를 거듭하다 보면 어느 날 군것질의 한계를 느끼고 ‘기가 막힌 한 끼’를 꿈꾸게 된다. 후보 리스트에 자취방 앞 밥집들을 올려놓고 고민을 거듭한다. 심사 기준은 간단하다. 갓 지은 쌀밥이었으면 좋겠고(하루 종일 인스턴트만 먹었으니), 매콤함과 새콤함이 적절한 조화를 이뤘으면 좋겠고(하루 종일 단것만 먹었으니), 단백질을 섭취하고 싶다(하루 종일 탄수화물과 나트륨 에 찌들었으니).

 

이 세 가지 조건에 부합하는 밥을 찾아 원룸촌을 어슬렁거리는 청년을 본 일이 있는가. 그러나 그들은 결국 그저 그런 밥집에 들어가 순두부찌개라든가, 제육볶음이라든가, 계란말이를 주문한다. 지금부터 정신 승리의 시간. 혀끝에 느껴지는 조미료 맛은 모른 척하자. 김이 모락모락 나는 흰 쌀밥과 미역국에 집중하자. 곁들여 나온 밑반찬의 출처를 의심하지 말자. 집 밖에서 집밥을 바라는 건 욕심이다. 집밥이 되기 위해 노력한 식당밥이라 면, 그걸로 충분하다.

 

HOW:

집밥이 따로 있나, 집에서 만들면 집밥이지. 자취 이력이 조금씩 쌓이면 스스로 밥을 해 먹어보겠다는 의욕이 슬금슬금 자라난다. 내 손으로 직접 만드는 만큼 건강에 좋을 것이고, 비교적 메뉴 선택이 자유롭고, 무엇보다 경제적이다. 뭐든지 처음이 어렵다. 요리에 익숙해지기만 하면 어디 내놔도 부끄럽 지 않은 고급 스킬 보유자가 될 수 있다.

 

‘자주 술에 취하는’ 야매 자취생에서 ‘손수 밥을 지어 먹으면서 생활하는’ 진짜 자취(自炊)생으로 거듭나는 것이 다. 밥을 해먹기 시작하면 평소 미각이 둔하다고 타박을 들었던 이들이 유리해진다. 손맛이 살짝 부족하더라도 호환성 뛰어난 입맛으로 어지간한 요리는 맛있게 해치울 수 있으니까.

 

다행스럽게도 요즘은 유명 셰프부터 파워 블로거까지 ‘나만의 비밀 레시피’를 알려주지 못해 안달인 시대. 오늘도 많은 중생들이 집밥 대중화를 몸소 실현하신 ‘백주부느님’의 위엄을 체감하며 설거짓거리를 쌓고 있다.

 

WHY:

우리는 ‘살기 위해’ 무언가를 하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를 하기 위해 살아간다. 밥은 인생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무언가’다. 먹는 것에서 행복을 찾을 수 있다면, 먹기 위해 살 수 있다면 그는 이미 커다란 삶의 의미를 발견한 사람인 것이다.

 

그렇다면 밥의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는 왜 먹는가. 누군가와 친해지 기 위해(WHO), 흘러가는 시간을 더욱 즐겁게 보내기 위해(WHEN), 의미 있는 장소를 기억하기 위해(WHERE), 좋아하는 음식을 먹는 행위 그 자체를 위해 (WHAT), 혼자 힘으로 밥을 지었을 때의 뿌듯함을 위해(HOW).

 

대부분의 문제 에서 ‘왜?’는 가장 중요한 질문이지만 밥 먹을 때만큼은 예외다. 1년에 1000그릇, 20년 넘는 시간 동안 2만 그릇 이상의 밥을 먹었고 앞으로 10만 그릇을 채우게 될 텐데 그때마다 ‘왜?’를 고민할 순 없다. 대신 ‘누구와’, ‘언제’,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먹을지에 집중하자. 30대, 40대에도 마찬가지다. 그때 먹는 밥들이 우리의 다음 10년을 든든하게 지켜줄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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