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 ‘나’에 대한 글을 쓸 일이 몇 번이나 있을까? 손에 꼽을 만한 그 기회를, 우리는 ‘취업 준비’라는 명목으로 한 시절에 다 써버린다. 여기, 두명의 대학생이 ‘진짜 자기 자신’에 대한 글을 적었다. 그들이 쓴 것은 자소서가 아니었다. 자기 고백서였다.

나 는   이 대 로   재 미 없 게 

살   작 정 입 니 다 

 

스무 살이 되기 전까지는 재미없게 산 아이들이 칭찬을 받곤 해요. “착실하게 공부 잘하는 애가 심성도 곱지”, “얘는 나이도 어린데 어쩜 이리 얌전해?” 이런 말을 들어야만 죄를 짓지 않는 기분으로 살아갈 수 있었어요. 스무 살이 지나도 같은 쳇바퀴를 부지런히 굴려갔어요.

 

클럽에서 몸을 흔들고 술집에서 깔깔거리는 저를 상상할 수조차 없었어요. 대신 조용히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시간이 더 좋았죠. 그런데 다들 왜 그렇게 재미없게 사느냐며 핀잔을 주더군요. 너는 고3이 아니라 혈기왕성한 스무 살이라고, 실컷 놀아도 모자랄 판에 집에서 시간을 죽이고 있냐고 말이에요.

 

그때부터 제 성격을 싫어했던 것 같아요. 억지로 밖에 나가고 사람들 속에 섞여 있을수록 마음은 점점 더 움츠러들었어요. 스물두 살 때 한 달간 프랑스에 머물렀던 적이 있었어요. 혼자 그렇게 먼 곳까지 가본 적은 처음이었어요. 일단 낯선 곳에 뚝 떨어지기만 하면 지금과는 전혀 다른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을 거라는 묘한 희망이 있었거든요.

 

20kg에 달하는 트렁크를 질질 끌며 몽마르트르 언덕 근처의 허름한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숨죽여 울기 시작했어요. 뭐라도 바뀌어서 돌아가지 않으면 나를 전보다 더 무시할까봐 두려워졌거든요. 그날 밤 삐걱거리는 침대에 웅크려 누워 주문을 걸었던 게 기억나요. ‘한국에서 재미없게 살던 나는 이제부터 없는거야.’

 

파리에서 삼 일간 관광을 하고 곧바로 프랑스 남부의 몽트모랑이라는 소도시로 내려갔어요. 그곳에서 이 주간 건축 봉사활동을 하기 위해 프랑스에 온 거였거든요. 저보다 나이가 어린 외국인 친구들과 매일 뜨거운 햇볕을 참아가며 돌과 나뭇가지들을 치웠어요. 땅을 고르게 하고 시멘트를 발라 벽을 세우기도 했고요. 봉사를 할 때는 오히려 마음이 편했어요. 몸이 힘들면 그만이었거든요.

 

문제는 봉사가 끝나고 숙소로 돌아와서 시작됐어요. 혼자 의기소침해서는 어정쩡하게 그 공간에 끼어있는 저를 발견할 때마다 점점 더 울적해졌어요. 가뜩이나 말주변도 없는데 영어로 재밌게 얘기하기는 쉽지 않았어요.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제가 망치고 싶진 않았거든요.

 

입안에서 혀를 굴리며 영어 문장을 몇개 만들어보다 타이밍을 놓치고는 바보처럼 웃어버렸죠. 영영 가지 않을 것 같던 이 주간의 시간이 끝나고, 우리는 아쉬움을 주고받으며 헤어졌어요. 그때 밀라노에서 큐레이터로 일하는 이탈리아인 마테오가 기차역까지 데려다주겠다고 하더군요.

 

캠프의 리더였던 그와는 딱히 사적인 얘기를 나눠본 적이 없어서 불편한 마음으로 기차를 기다렸어요. 기차는 생각보다 빨리 왔고 마테오는 제 눈을 응시하며 조심스럽게 입을 뗐어요.

 

“너는 이주 동안 누구보다 침착하고 차분히 너의 몫을 다했어. 남은 여행도 그렇게 네 방식대로 즐겁게 하길 바랄게.” 서툰 영어 실력 탓에 “땡큐”라고 짤막하게 말하고 수줍음을 감춘 채 기차에 올라탔어요. 그의 마지막 말 덕분에 허물어가던 몸과 마음이 서서히 회복되는 것 같았죠.

 

나를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이 해준 말에 그렇게 힘을 얻었다는 게 이상했어요. 그런데 분명한 건 마테오가 건넨 말이 제가 간절히 바라왔던 말이라는 거예요. 사실 저는 제가 품고 있는 삶이 좋았거든요. 독특하거나 눈에 띄지 않아도 괜찮았는데, 그걸 재미없다고 몰아붙이는 시선에 쉽게 져버렸던 거죠.

 

간절했던 바람과는 달리, 여행 이후로 크게 달라진 건 없었어요. 마테오의 말 한 마디가 단번에 제 인생을 바꾸지도 않았고요. 여전히 일상은 제 의지를 번번이 꺾으며 돌아갔으니까요. 다만 삶을 바라보는 시선이 좀 따뜻해졌을 뿐이에요. 마테오의 말처럼 저는 침착하고 차분하게 삶을 키워가는 사람인거죠. 제 기준에서 인생은 이미 충분히 재밌고 앞으로도 분명 그럴 거예요.

 

Intern 이연재 jae@univ.me

나 는   다 정 한   사 람 이

될   것 입 니 다

 

다정한 사람이 되고 싶었어요. 공기의 흐름을 헝클이지 않고 부드럽게 만드는 사람 말이에요. 가끔은 내게 미지근해진 사람의 손을 잡고 전자레인지 안으로 들어가고 싶어요. 우리가 딱 1분, 아니 30초만 버틸 수 있다면 다시 따끈해질 테니까요.

 

모든 뜨거움이 잠시뿐이라는 사실은 알고 싶지 않아요. 지금은 다정한 사람이 되는 법을 배울래요. 나는 다정한 순간을 남기기 위해 추억에 색을 입혀요. 한참을 망설여도 손가락 끝에는 분홍이 묻어 있죠. 오늘의 서운함과 외로움을 분홍으로 덧칠하다 보면 마음이 보송해지거든요.

 

모든 순간을 예쁘게 포장하려는 버릇을 버리지 못한 것일 수도 있어요. 어차피 지나갈 시간과 사람이라면 미워하는 것보단 마음껏 사랑하는 게 낫지 않나요?

 

우리의 다정함이 ‘따뜻한 시선’에서 시작된다고 믿어요. 눈앞에 있는 대상을 평가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천천히 받아들이는 일 말이에요. 최근에 내게 그런 시선을 건넨 건 미카뿐이었어요.

 

미카는 12월 26일에 태어난 말티즈예요. 미카가 두 귀를 살짝 접은 채 블루베리 같은 눈동자를 깜빡이면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는데 속마음을 다 털어놓은 기분이 들곤 해요. 그 까만 눈동자는 아무런 의심도 품지 않아요. 상대방의 불안한 시선도 피하지 않고요. 우리는 서로의 마음을 의심하고, 눈치 보느라 하얀 공백을 갖게 되었는데 말이에요.

 

다정한 사람이 되기 위해 기다림을 배우고 있어요. 사실 침묵을 가장 두려워할 만큼 참을성이 없는데 말이에요. 애인과 싸우고 집에 돌아오는 날이면 장문의 카톡으로 불만을 쏟아내곤 했어요. 혹시라도 맞춤법이나 띄어쓰기를 틀릴까봐 몇 번씩 읽었다니까요. 그때는 내 마음을 분명하고 정확한 단어로 표현하는 게 진심이라고 믿었거든요. 중요한 건 맞춤법 따위가 아닌데 말이에요.

 

사람 마음이 참 이상해요. 어제는 정말 미웠던 일들이 다시 생각해보면 화낼 일이 아니더라고요. 나에게 공격 받은 사람들은 녹아서 사라지거나 꽁꽁 얼어버렸어요. 상대의 온도를 감지하지 못한 채 내 말만 쏟아내기 바빴거든요.

 

지금은 다정했던 사람을 그리워하고 있어요. 내 마음을 보호하기 위해 상대의 마음에 흠집을 내곤 했거든요. 나는 그가 떠나는 순간까지 내가 입힌 상처를 외면했어요. 우리 중 한 명이 나쁜 사람이 되어야 한다면 그건 내가 아니기를 바랐어요.

 

내가 너를 사랑한다는 이유만으로 나를 이해해 달라고 떼를 쓰기도 했어요. 어쩌면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것도 내가 상처받기 싫어서 였을지도 몰라요. 누군가를 미워한다는 건 나의 외로움과 상처를 인정해야하는 일이니까요.

 

나는 여전히 다정과 거리가 멀어요. 다른 사람의 행복을 부러워하고, 예쁜 여자들을 보면 자격지심을 느껴요. 내 말과 행동에 책임지기 싫어서 상황을 피하려 한 적도 있고요. 내 방은 발 디딜 곳이 없을 만큼 지저분하면서 밖에서는 깔끔한 척해요.

 

엄마랑 싸운 날이면 절대 먼저 말 걸지 않고 밥 줄 때까지 입을 꾹 다물고 있고요. 연락하지 않는 사람들의 SNS를 염탐하고, 하루에도 몇 번씩 그리운 사람의 상태 메시지를 살펴요. 여전히 내 마음을 표현하는 일이 어렵기만 해요.

 

하지만 더는 내 마음대로 추억에 분홍을 덧칠하지 않을 거예요. 나를 위해 뜨겁게 변해달라고 떼쓰지도 않을 거고요. 그냥 우연히 지나치는 순간이 올 때 내가 따뜻한 시선을 건넬 수 있는 사람이었으면 좋겠어요.

 

Intern 윤소진 sojin@univ.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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