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에 <이터널 선샤인>을 다시 보게 된 것은 순전히 권혁수 때문이었다. 때로는 호박고구마였다가 때로는 김경호였다가 때로는 디오니소스이기도 한, 바로 그 권혁수가 맞다.

 

그와 인터뷰를 하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는데 요즘 가장 큰 고민이 뭐냐는 질문에 그는 일 초도 망설이지 않고 이렇게 말했다. “요즘 가을 타서 미쳐버릴 것 같아요(정확히 ‘미~춰’라고 발음했다).”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같이 보고 싶은 영화로는 <이터널 선샤인>을 꼽았다.

 

통유리를 통해 선선하기도 하고 쌀쌀하기도 한 공기의 온도가 느껴지는 날씨, 인터뷰가 끝나고 집에 도착하자마자 <이터널 선샤인>을 플레이 했다.

 

<이터널 선샤인>에서 조엘(짐 캐리)은 옛 연인클레멘타인(케이트 윈슬릿)과의 기억을 지우기 위해 기억을 삭제해주는 ‘라쿠나사’를 찾아간다. 기억을 지우기 위해서는 일단 지우고 싶은 기억을 소환해야 한다. ‘라쿠나사’에서는 조엘에게 클레멘타인과의 추억이 담긴 물건을 모조리 가져오라고 한다. 그녀와 찍은 사진, 받았던 선물 등 연인들이라면 으레 가지고 있을 추억들을 챙긴다.

 

요즘 같은 세상에 기억을 지워주는 회사가 존재한다면, 옛 연인과의 추억이 담긴 물건들을 가방에 넣어 가지고 가는 것만으로는 그와 얽힌 기억을 완전히 삭제하긴 어려울 것이다.

 

그가 생각나는 물건들을 과감히 버렸다고 치자. 자꾸 밤만 되면 ‘자니’ 라는 메시지를 보내고 싶은 몹쓸 손가락 때문에(내가 아니다. 내 손이 한 짓이다) 과감히 연락처를 지우고 나면 카카오톡에서 그를 차단해야 하는 두 번째 관문이 기다린다.

 

그의 카톡 프로필 사진이 바뀌면 자동반사처럼 그 사진을 확대해 볼 것이 뻔하고(실수로 사진 바로 아래에 있는 번호를 누르지나 않으면 다행이다) 아주 가끔 바뀌는 그의 사진을 통해 그의 근황을 대략이나마 알 수 있다. 어느 날 다른 여친과 찍은 다정한 사진으로, 혹은 여자가 찍어준 것이 뻔한 구도의 프로필 사진으로 바뀌는 날에는 도저히 잠을 이룰 수가 없다!

 

그를 카카오톡에서 차단했다고? 그래도 소용없다. 페이스북에서는 1년이 지난 후에도 ‘과거의 오늘’ 그와 어디서 무얼 했는지 친절하게 상기시켜줄 것이다. 심지어 2년, 3년 후에도. 그의 생일이 되면 타임라인에 생일 축하 메시지를 남기라는 알림이 뜰 것이다.

 

그와 친구를 끊었다고 해도 지인이 누른 ‘좋아요’ 때문에 그의 게시물을 보게 될 확률이 높다. 둘을 동시에 아는 사람이 분명 있을 테니 말이다. ‘알 수도 있는 사람’에 그의 이름이 보일 수도 있다. 아무리 귀신 같은 페이스북의 알고리즘이라도 헤어진 연인을 자동으로 걸러주지는 못할 테니.

 

그의 흔적을 페이스북에서 원천봉쇄하기 위해 친구 끊기보다 상위 단계인 ‘차단’을 했다고 해도 안심할 수 없다. 아직 인스타그램, 카카오스토리, 폰사진이 자동으로 백업되는 N드라이브가 남아 있기 때문이다. 연인과 헤어지고 나서 사진을 불태우며 마음을 정리하는 방식은 옛이야기가 됐다.

 

세상이 편리해진 만큼 머릿속은 더 복잡해졌다. 연애의 흔적을 지우는 것조차 쉽지가 않다. 당최 요즘 세상에는 쉬운 게 왜 요만큼도 없는 걸까.사실은, 지금도 대학생이 되어서 사귄 남자친구와의 흔적들이 싸이월드 미니홈피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남자친구가 바뀔 때면 예전 남자친구와의 사진들은 비공개로 바꾸었다. 그러다보니 남자친구가 바뀔 때마다 비공개 폴더는 점점 더 늘었다. 몇 번이고 삭제할까 했지만, 그 때마다 마음이 약해져 ‘비공개’를 하는 걸로 삭제를 보류했다.

 

곧, 더 이상 미니홈피 일촌을 맺지 않는 시대가 왔다. 이젠 더 이상 삭제를 망설이지도 않는다. 아예 잊어버렸으니까. 내가 스스로 지우기로 결심하기도 전에 추억 삭제를 강제 집행 당하진 않을지, 아주 가끔 신경이 쓰이기는 한다.

 

옛 연애의 흔적을 상대방에게 들켜 대판 싸우는 연인들이 많다. 물론 나도 예외는 아니다. 상상만으로도 화가 나는 존재인, 내 남자친구의 예전 여자친구의 얼굴을 두 눈으로 목격하게 된다는 건 참으로 빡센 상황이긴 하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옛 연인의 사진을 그대로 가지고 있는 건 과거에 대한 집착이 아니라, 오히려 무심함에 가깝다.

 

과거의 흔적들을 지우는 데도 결심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삭제할 것을 고르다 보면 잊고 있던 감정이 되살아나게 될지도 모르고, 조엘처럼 “제발 이 기억만은 남겨주세요”라며 외치게 될지도 모른다.

 

싸이월드 미니홈피의 비공개 폴더든 서랍 속이든 외장하드든 어디든 간에 옛 연인의 사진을 아직도 가지고 있다는 건 그(녀)를 보고 싶어 미치겠고, 제발 한 번만이라도 내 앞에 나타나주기를 간절히 바라는 미련이나 집착, 잊지못한 사랑이 아니라는 것을 지금은 안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여자 없는 남자들』에 쓴 것처럼 “행복하게 살고 있기를 나는 기도한다. 행복하다고까지는 못 하더라도 적어도 오늘 하루를 부족함 없이, 건강하게 보내기를” 바라는 정도에 불과하다. 옛 연인을 매일 떠올리고 그를 위해 기도한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냥 어딘가에서 무탈하게 살고 있었으면 하는, 한때는 나의 우주의 전부였던 이를 위한 최소한의 마음이다. 그냥 딱 그만큼의 감정들인 것이다.

 

21세기의 이별은 20세기의 이별만큼이나 아프지 않다. 연락처를 지우거나 멀리 떠나버리면 더 이상 연락할 길이 없던 20세기에는 이별이 더 아팠다. 90년대 가요의 가사는 유독 더 처절하고 뮤직비디오에는 오열하는 장면들이 가득했다. 헤어지면 다시는 못 보는 줄 알았던 시대였으니까.

 

하지만 요즘 같은 디지털 시대에는 연인과 헤어져도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근황을 알 수 있고 연락할 수 있는 장치들로 가득하다.미련 같기도 집착 같기도 한 가늘고 긴 네트워크들이 거미줄처럼 얽혀 있다. 혹자는 기술의 발전이 인간에게 가져다준 장밋빛 미래라고 하겠지만 더 이상 예전과 같은 이별의 감정을 체험할 수 없다는 점에서는 비극이다.

 

만약 디지털 상에 남아 있는 내 흔적들을 모두 지워달라고 디지털 세탁소에 의뢰한다면, 사랑의 무게가 조금이라도 달라질까? 헤어질 때 더 고민하게 됐을까? 우리는 더 사랑할 수 있었을까? 찢어질 듯 아팠던 그 사랑은 어땠을지, 20세기에는 너무 어려서 제대로 된 사랑을 못 해본 나는 20세기의 사랑이 부럽다.

 

Freelancer 김희성 stylebyalice@naver.com

Illustrator 전하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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