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는 밝은데 아무 것도 못 듣네

지하철 6호선 화랑대역에서 옛 화랑대역으로 걸어가는 길.

 

수화 동아리에 가보자고 친구가 말했다. 뜬금없긴 하지만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별 기대 없이 따라간 그곳에서 눈이 동글동글하고 잘 웃는 여자아이를 만났다. 태어나면서부터 청력이 서서히 떨어졌고, 보청기를 끼면 조금씩 들린다고 말해줬다.

 

이 아이는 특별했다. 먼저 엄청난 경청력! 말하는 사람을 뚫어져라 바라보며 진짜 열심히 듣는다. 두번 째로는 큼직하고 드라마틱하게 휙휙 바뀌는 커다란 표정. 웃을 땐 눈이 활짝 휘어지고 슬프면 입술이 축 처진다. 주먹을 눈가에 갖다 대며 우는 시늉까지 하는데, 내 말을 이렇게 재밌게 들어주는 사람이 있다니.

 

자기 전에 다시 생각날 만큼 감동적이었다. 넌 참 좋은 친구라고 말했더니 겸손한 답이 돌아왔다. “잘 안 들리니까 더 잘 들어야 해.” 그때 처음 알았다. 침묵의 세계에서는 더 잘 들을 수 있다는 사실을. 청력의 좋고 나쁨은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지하철 6호선 화랑대역에서 옛 화랑대역으로 걸어가는 길.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청력이 양호한 편 이다. 새벽이면 마을버스의 요란스러운 부웅~ 소리에 잠을 깨는가 하면, 옆집 남자의 랩 하는 소리에서부터 윗집 화장실 물 내리는 소리까지도 듣는다. 본의 아니게 별별 소리 다 듣고 살지만, 사실 은 아무것도 듣지 못하는 것 같다.

 

옆집 남자의 타령 같은 랩은 몇 번 들었지만, 내가 그 사람의 무엇을 안다고 할 수 있을까? 이름도 얼굴도 모른다. 온종일 무수한 소리들이 귓가에 닿지만, 너무나도 무의미한 것들이라 기억도 안 난다. 그러니까 소음 속에 둘러싸여 살면서도 정작 아무것도 듣지 못했던 것이다.

 

크림색 기차역. 이곳에도 나뿐.

 

고요한 장소가 필요했다. 그곳에서 어떤 소리를 듣게 될지. 개미 걸어가는 소리? 은행나무 잎 떨어지는 소리? 아니, 소리가 없어도 좋을 것 같았다. 그래서 찾은 곳은 옛 화랑대역 폐역의 철길. 지하철 6호선 화랑대역에서 10분 정도 걸으면 서울여대와 육군사관학교가 보이고 그 사이에 옛 폐역의 지금은 끊긴 철길이 조용히 누워 있다.

 

눈치 안 봐도 괜찮아

 

 

철길에는 나 말고는 아무도 없었다. 저 멀리서 들려오는 자동차 소리 말고는 고요했다. 바람 소리, 돌 밟는 소리, 풀벌레 소리가 들렸다. 혼자 철길을 걷다보니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지금 팔짝팔짝 뛰고 소리 지르고 개다리 춤을 추더라도 미쳤다고 욕할 사람은 없겠군, 후훗.’ 어라? 나뭇잎 굴러가는 소리를 듣게 될 줄 알았는데, 예상치 못한 내 마음의 소리를 듣게 된 것이다.

 

철길 따라 걷기.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된 기분.

 

나는 온전히 나만을 위해 이 철길에 서 있다. 지금 이 순간 만큼은 똑똑해 보이려고 애쓸 필요가 없다. 쓸모 있는 인간임을 증명하기 위해 발버둥치지 않아도 된다. 이런 생각만으로도 얼마나 편안해지는지 모른다.

 

더 맛있는 걸로 가져올 걸.

 

내가 진짜 좋아하는 것은 무엇인지, 나는 어떤 사람인지 자신에게 물었다. 주변은 조용했다. 나만의 답을 생각해낼 때까지 누구도 방해하지 않았다. 날 기다려줄 시간은 충분했다. 레모네이드를 마셨다. 음료수가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어색한 게 싫어? 자연스러운데

 

밤에 보면 무서울 것 같은 공중전화 부스.

 

서울에서 고요한 장소를 찾기란 쉽지 않았다. 음향생태학자 고든 햄튼이라는 사람은 소음이 없는 장소를 찾기 위해 지구 세 바퀴를 돌아다녔다고 한다. 그에 따르면 조용한 공간의 기준은 엄격하다. “동틀 무렵 15분 동안 인간이 만들어낸 인위적인 소음이 들리지 않는 곳”이어야 한다.

 

철길에 핀 코스모스 구경.

 

그러나 그런 곳은 지구에 고작 50곳에 불과했다고 한다. 밥 짓는 소리, 물 내리는 소리, 책 넘기는 소리, 비행기 소리…. 인간이 만들어내는 어떤 소리도 들리면 안 된다. 그렇다면 답은 나왔다. 서울 하늘 아래에서 찾기는 글렀다. 휴전선 옆 비무장지대라면 모를까.

 

옛 기차역의 흔적.

 

그런데 고요한 장소는 찾을 만한 가치가 있다. 경험한 사람들의 말을 들어보면… 그것은 황홀한 경험임이 분명하다. 헨리 나우웬이라는 신부님은 “우리는 고독 속에서만 자신이 쓸모 있는 존재일까 하는 걱정 없이 편안히 늙어갈 수 있다”고 했고, 『인생학교-혼자 있는 법』을 쓴 작가 사라 메이틀랜드는 “정적에서 오는 어마어마한 공허 속을 탐험하다보면 한 인간의 성격과 정체성에는 놀라운 변화가 일어난다”고도 말했으니까.

 

기차역 앞에 있던 정체불명의 ‘행복의 문’. 어른 가슴께까지 오는 높이. 빨간색 글씨가 무서워서 들어가진 않았다.

 

철길에 앉아 있던 나의 옆에 잠자리가 앉았다. ‘우리’라고 말하면 우스울지도 모르지만, 우린 말없이 나란히 앉아 1분 정도 함께 시간을 보냈다. 나긋하고도 평화로운 오후였다. 조용하고 어색하며 정적이 흐르는 시간, 두려워할 일만은 아니다. 앞으로는 모르는 사람을 만나더라도, 침묵이 두려워서 아무말대잔치를 벌이지는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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