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에게 노년은 멀고도 아득하다. 닿을 일 없는 섬처럼 ‘저쯤에 있겠지’ 하고 마는 것이다. 하지만 시간은 성실하게 흐르고 있고, 우리는 모르는 새에 차츰차츰 노년에 가까워 간다. 노인의 삶이란 어떤 것일까? 상상조차 어려워서, 대한노인회에서 운영하는 노인생애체험센터를 찾아갔다. 거기서 노인의 몸으로 살아볼 수 있다는 ‘체험복’을 빌렸다. 짐작과 경험의 차이는 컸다. 노인들을 좀 더 이해하게 된 하루, 우리의 노년이 미래의 어느 곳엔가 있다는 걸 몸으로 확인한 하루, 그 이야기를 여기에 적는다.
대한노인회 ‘노인생애체험센터’
ADD 서울시 용산구 임정로 58
TEL 02-712-6400
매주 화∼토요일 하루 2회(오전 10∼12시, 오후 2∼4시) 체험 프로그램을 무료로 운영하며 홈페이지에서 예약 가능하다. 노인의 근육·관절과 비슷한 상태를 만들기 위해 팔, 다리, 허리 등을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 없는 보조기구를 착용하고 손목과 발목에 모래주머니를 찬다. 노인의 안과 질환을 체험하기 위해 시야를 20% 정도 좁히는 고글 안경도 착용한다.
설마, 걷는 일이 위험해 질 줄이야
지하철 개찰구로 들어가거나 빠져나올 때, 내 앞에 노인 분들이 계시면 늘 답답했다. ‘왜 이렇게 느릴까? 뒷사람을 배려하는 마음도 없나.’ 횡단보도를 건널 때도 마찬가지였다. 신호등이 빨간불로 바뀌고 차들이 경적을 울려대도 미동도 없이 느릿느릿 제 갈 길을 가는 모습을 자주 목격했다. 가끔은 위험천만할 때도 있었다.
그러나 무겁고 뻣뻣한 보조기구를 착용하는 것만으로도 평지를 걷는 일이 단숨에 위험한 일이 됐다. 느리게 걷고 싶어서가 아니라 속도를 낼 수 있는 여건이 나에게 없다는 걸 받아들여야만 했다. 처음엔 지팡이가 있으면 어느 정도 몸을 지탱하고 의존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지팡이가 있다고 걷는 게 편해지진 않았다.
부자연스럽게 걷고 있다는 걸 인식시켜줄 뿐, 여전히 관절은 내 생각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등 억제 기구로 인해 허리를 자유롭게 구부리거나 좌우로 돌릴 수 없다는 제약은 답답함 정도로 끝나지 않았다.
한번은 횡단보도를 급히 건너던 중, 귀를 찌르는 경적 소리를 들었다. 자연스럽게 차가 있는 쪽으로 허리를 돌리려 했는데, 몸 전체가 딱딱한 각목이 된 것처럼 움직이기 힘들었다. 분명 차가 오는걸 알면서도 바로 피할 수 없었던 것이다. 목격하던 입장에서 목격 당하는 입장이 되고 나서야 횡단보도를 건너고 가볍게 산책하는 일상적인 일 속에 얼마나 큰 위험부담이 숨어 있는지 알 수 있었다.
황당함의 연속이었다. 여유를 찾기 위해 나선 산책은 마치 끝없는 마라톤을 하는 듯했다. 몸이 힘든 건 기본. 사실 문제는 신체를 스스로 보호할 수 있는 능력을 빼앗겼다는 점이었다. 나이가 들면서 체력이 쇠잔해지는 건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지금 누리고 있는 평범한 일상이 이만큼이나 따라잡기 힘든 것일 줄은 몰랐다.
밥먹는 것조차 쉽지 않아
할머니네 갈 때마다 밥 먹는 일이 불편했다. 유독 간이 짠 반찬만큼이나 답답했던 건 굽은 등처럼 솟아 오른 쌀밥이었다. 할머니는 식구들에게 건넬 밥을 주걱으로 몇번이고 눌러 담았다. 밥 한 공기를 비우기도 전에 더 먹으라며 재촉하기도 했다. 정작 당신은 밥 대신 유가 사탕을 입 안에 넣고 있거나 밥그릇에 식혜를 부어 들이켰으면서.
손바닥과 팔 억제 장치를 착용하고 우동을 먹으러 갔다. 간신히 나무젓가락을 집어 들고 우동 면발을 휘저어보았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운 좋게 면발을 집으면 팔 억제 기구가 문제였다. 팔을 몸통 방향으로 끌어당기는 게 어려웠다. 결국 젓가락질을 포기하고 숟가락으로 국물부터 떠먹었다. 뜨거운 국물을 삼키자 마음 한편이 느슨해졌다. 그렇다고 젓가락을 다시 집을 용기가 생기진 않았다.
머리를 그릇에 박다시피 가까이 대고 나서야 면발을 두가닥 먹을 수 있었다. 체험 기구를 사용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것은 식사였다. 다리에 찬 모래주머니가 무거울 때는 잠시 멈춰 선 채 하늘을 보고 숨을 고르면 되고, 등 억제 기구가 버거울 땐 주저앉으면 그만이었다. 그런데 내 앞에 놓인 밥을 먹는 일은 마음처럼 쉽지 않았다. 가장 익숙한 일이 힘겹다는 게 내 마음을 더 조급하게 만들었다.
어쩌면 시간이 흐른다는 건 익숙한 것과 어색해지는 게 아닐까. 잘 알고 있다고 여겼던 행동들이 낯설게 다가오고, 자주 오가던 길에 새로운 건물이 들어서는 일처럼. 할머니는 그날 저녁 사탕을 입에 넣고 무슨 생각을 했을까. 모두에게 밥을 주고서 정작 자신은 식혜를 들이켜는 건 어떤 기분일까.
일상이 과제가 되어버렸다
노인생애체험 기구의 무게는 대략 6kg 정도. 성인 여자 혼자 잠깐 들기에도 버겁다 싶을 무게인데, 이 무게를 각 신체에 나누어 짊어진 채로 하루를 보내야 하는 일은 빠른 속도로 날 지치게 했다. 팔목과 발목에 찬 모래주머니는 사지를 땅 밑으로 잡아끄는 듯했다. 마치 3일 내리 밤을 새운 채 어쩔 수 없이 깨어 있는 기분이랄까.
내가 꿈꾸는 노년 생활의 로망 중 하나인 꽃꽂이를 배우고 싶었는데 안국역 근처 꽃 가게에 가는 것만으로 모든 에너지를 다 써버렸다. 진짜 하고 싶었던 일이었는데, 배우기도 전부터 의지는 사라진 지 오래. 그럼에도 불구하고 허리를 숙여 꽃을 고르고 단단한 가지를 자르기 위해 낑낑대며 가위날을 맞붙였다. 팔 억제 기구와 모래주머니는 가위질을 할 최소한의 힘마저 빼앗아버렸다.
결국 선생님의 도움을 받아 꽃다발스러운 형태를 겨우 완성할 수 있었다. 내 힘으로 만들었다고 말하기 부끄러운 꽃다발을 들고 근처 공원으로 향했다. 때 마침 벤치에는 할머님들이 둥그렇게 모여 앉아 있었다. 서로 어떤 대화도 나누지 않은 채, 무릎을 잠깐 구부렸다 피거나 구부정한 등을 하고 긴 하품을 하셨다.
나 역시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몸을 죽 늘어뜨리고 앉아 있는 일로 하루를 거의 다 보냈다. 불현듯 올해 팔순이 된 외할머니가 떠올랐다. “늙어간다는 건 삶이 점점 쪼그라드는 거더라. 그걸 받아들이는 방법을 알려준 사람이 없어서 당황하기만 하다 보니 이렇게 나이를 먹었지.”
20대인 나 역시 지금 당장 부딪혀야 하는 과제가 벅차서 그런 것들을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분명 노년이 되면 일상을 살아가는 것 자체가 벅찬 과제가 될 것이다. 치열하게 20대를 보내고 있는 우리가 그 사실을 잊지 않는 것만으로도 훗날의 삶을 좀 더 지혜롭게 받아들일 수 있지 않을까.
사막에서 책 읽어 봤니?
지금 읽는 책을 50년 뒤에도 읽고 싶다. 내 얼굴이 낯설게 느껴지고 몸을 움직이는게 불편하면 혼자 있는 시간이 늘어날 것이다. 그 시간이 주어지면 팔걸이가 있는 나무 의자 위에 부드러운 담요를 깔고 앉아 책을 읽으리라. 20대에 스쳐 지나간 문장 위에 오랫동안 머물다 깜빡 졸기도 하겠지.
때로는 나를 흔드는 단어 하나에 울컥할지도. 처음 백내장 체험 고글을 썼을 때는 당장 눈앞에 있는 음료가 노랗게 보인다는게 당혹스러웠다. 내 눈동자 앞에 고요한 사막이 펼쳐지고 있는데 할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다. 여행 에세이를 읽으려 하는데 글자가 멀어졌다 가까워지기를 반복한다.
처음에 ‘마을’이라고 읽었던 단어가 다시 보니 ‘마음’이었다. 머리가 점점 멍해지더니 뱃멀미를 할 때처럼 속이 울렁거린다. “세상은 좋은 눈빛들마저 거두어갔다.” 겨우 읽은 시인의 문장도 나에게는 위로가 되지 않는다. 시인이 말한 눈빛들은 모두 모여 어디로 갔을까. “그럼 한 번 읽어봐라” 외할머니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돈다.
처음으로 백일장에서 상 받은 시를 할머니에게 선물했다. 내 문장을 천천히 읽고 마음속에 품어주길 바랐다. 그런데 할머니는 내가 건넨 종이를 조용히 가방 안에 넣고는 읽지 않았다. 할머니는 내가 쓴 시를 실수로 읽을까봐 두려웠을지도 모른다. 내 눈앞에 드리운 사막은 모래바람이 거세지면서 온 세상을 어지럽힌다.
지금보다 더 빨리 밤이 찾아와 처음부터 빛이 없었던 것처럼 모든 걸 삼킬 수도 있다. 주름진 손으로 책장을 넘기는 건 일종의 낭만이었다. 그건 노년에 대한 보상이기도 했다. 하지만 점점 시야가 희미해질수록 책을 읽는 건 감상이 아닌 싸움이 되었다. 누가 알았을까, 눈을 뜨는 것도 이렇게 치열한 일이었다는 것을.
Intern_ 윤소진 이연재 jae@univ.me
Photographer_이서영 perfectblues@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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