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수 밥을 지어 먹으면서 생활한다.” 사전에 나오는 간결한 정의와 달리 자취는 복잡하다. ‘생활’이란 걸 하려면 질적으로, 양적으로 어마어마한 난이도의 숙제들이 포함된다. 그래서 자취방에서의 ‘생활’은 대폭 축소되기 마련이다. ‘생존’에 가깝다. 밥은 거르기 일쑤고 라면·레토르트 식품 정도가 부지런함의 최대치.

 

청소 및 정리 정돈은 발 디딜 틈 없는 순간까지 최대한 연기. 방 안의 물건들은 대부분 쓰다 이사할 때 버리고 갈 소모품. 나를 포함해 많은 자취생들이 생활을 포기하고 생존을 택했던 건 ‘자취’를 잠시 머물다 갈 환승역 정도(미완성의 삶)로 여겼기 때문이다. 물론 그 너머에 ‘취직-결혼’ 이라는 목적지(완성된 삶)가 기다리고 있을 거라 굳게 믿으면서.

 

그러나 세상은 이미 꽤 오래전에 바뀌었다. 자의든 타의든 1인 가구가 늘어났다. 자취가 그 자체로 온전한 목적지가 된 것이다. 올해로 자취 11년 차를 맞는 나 역시 마찬가지. 좀 늦었지만 지금부터라도 생존이 아닌 ‘생활로서의 자취’를 해보려 한다. ‘자취 2.0’으로 넘어가기 위해 숙제가 많겠지만 부담보다는 기대가 크다. 하나씩 숙제를 할 때마다 그 누구도 아닌 나의 ‘생활’이 풍요로워질 테니.


01 방 청소로 삶의 질을 높여봐

 

자취를 하다 보면 근거 없이 믿고 싶어지는 말이 있다. “귀찮은 일은 미룰수록 좋다.” 그 어떤 간섭도 침범할 수 없는 공간에서 누리는 자유는 달콤하다. 그 달콤함에 ‘스스로 취한’ 자취생 들은 점점 오늘 할 일을 내일로 미루는 것에 익숙해진다.

 

 

단칸 방을 카오스로 만드는 데 필요한 시간은 불과 몇 분이지만 한 번 어질러진 방이 제 모습으로 돌아가는 데에는 몇 달이 걸린다. 나 역시 처음 자취방을 구하고 모든 귀찮은 일을 뒤로 미루며 1년쯤 보냈을 때, ‘서울 구경’을 핑계로 부모님이 다녀가셨다.

 

 

두 분은 내 방의 모든 것을 갈아엎었다. 뒤죽박죽되어 있는 옷장, 간과했던 책꽂이 위의 먼지, 수챗구멍에 쌓인 채 썩어버린 음식 찌꺼기까지. 달콤한 자유에 가려 보이지 않던 게으름의 곰팡이들이 모습을 드러낼 때마다 벗은 몸을 들킨 것처럼 부끄러웠다.

 

부모님을 기차역까지 배웅해드리고 돌아와 마주 친 방은 내가 알던 예전의 그 자취방이 아니었다. 먼지 없는 방 바닥에 드러눕는 일이, 정돈된 책상에 앉아 하루를 마무리하는 일이 생각보다 훨씬 큰 행복을 가져다준다는 걸 나는 좀 더 빨리 깨달았어야 했다.

 

▶▶▶ 대청소는 필요 없다. 최소한의 정리정돈만으로도 높아진 삶의 질을 체감할 수 있다. 물론 자주 할 자신은 없다. 다만 에너지 충만한 금요일 오후나 토요일 오전에 30분만 투자해도 훨씬 더 만족도 높은 주말을 보낼 수 있다는 건 분명하다. 특히 집돌이(집순이) 들에게 방의 쾌적함 유지는 산소 공급 만큼 중요하다.


02 입을 옷 없을 땐 옷장 정리를

 

‘입을 옷 없다’는 말은 상대적이다. 옷 욕심이 많은 사람은 매주 쇼핑을 해도 배가 고프고 옷 욕심이 없는 사람은 바람막이 하나로도 한 계절을 버틴다. 그런데 자취생에게는 욕심 말고도 입을 옷 없는 이유가 하나 더 있다. 바로 ‘옷 관리의 실패’ 다.

 

한 칸짜리 자취방에 허락된 수납공간은 옷장(행거) 하나 더하기 작은 수납장 하나. 물론 처음엔 차곡차곡 종류별로 개 어 넣는다. 옷장의 평화는 날마다 조금씩 깨진다. 늦잠 잔 아침, 만취해 들어온 날 밤, 우울한 시험 기간. 필요한 옷 꺼내기는 더 힘들어지고, 눈에 보이는 옷만 계속 입게 된다.

 

의자, 방 바닥, 냉장고 위 등 옷장 아닌 곳에 보관되는 옷이 늘어날수록 옷장뿐 아니라 방 전체가 ‘카오스’에 빠진다. 옷의 위치를 제대로 모르니 상태 또한 악화된다. 구석에 처박아둔 티셔츠의 목이 늘어났고, 면바지의 색이 바랬고, 심지어 큰맘 먹고 산 가을 재킷은 이사할 때 잃어버렸다. 몇 번 그렇게 멀쩡하던 옷을 버리고 나서야 잔고 관리 못지않게 옷 관리가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뜩이나 옷도 없는데, 있는 옷은 잘 챙겨야지.

 

▶▶▶ 옷 관리가 힘든 이유는 옷 정리가 안 되기 때문이다. 계절에 맞춰 옷장 속 옷의 위치를 바꿔야 좁은 옷장을 넓게 활용할 수 있다기에 여름옷 대신 가을 옷을 꺼내기 쉬운 서랍으로 옮겼다. 갠 옷은 세로로 세워 한눈에 보이도록 넣 어야 한다는 것도 이제야 알았다. 티셔 츠 한 장 꺼내기 위해 서랍 전체를 들 추었던 과거는 안녕.


03 세균 무시하다가 진짜 죽어

 

 

누구나 판도라의 상자를 하나씩 갖고 있다. 자취생에게는 냉장고와 화장실이 그렇다. 조금만 관리를 잘못해도 눈에 보이지 않는 세균이 눈에 보일 때까지 증식하는 공간들. 보통 우린 이 위험한 상자를 여는 대신 외면한다. 외면의 대가는 작지 않다. 누구는 통째로 락앤락을 버렸고, 누구는 냄비를 버렸고, 심한 경우 냉장고를 갖다 버리고 새로 사는 사람도 봤다.

 

 

JTBC 예능 <냉장고를 부탁해>에서 썩어버린 식재료와 출처를 알 수 없는 반찬들이 MC들 손에 버려지는 순간, 당황한 게스트가 안쓰럽기보다는 부러운 마음이 더 컸다. ‘냉장고 속 괴생명체를 남이 대신 처리해주니 얼마나 속이 시원할까?’ 닫아 놓으면 안 보이는 냉장고와 달리 매일 사용해야 하는 화장실은 외면할래야 할 수가 없다.

 

 

거울·바닥·벽을 가리지 않고 번식하는 물 곰팡이, 머리카락 때문에 시도 때도 없이 막히는 배수구, 이사 온 후로 쭉 더러운 좌변기. 세균과의 전쟁에서 나는 늘 ‘싸우지 않고 이기는 법’을 택했다. 아무리 싸움을 걸어와도 모른 척 그 냥 그대로 두는 것. 며칠 지나면 익숙해지고, 익숙해지고 나면 평화가 찾아왔으니까. 사실 그건 승리가 아니었다. 몸이 세균에게 점령당하는 걸 수수방관하고 ‘정신승리’만 했던 과거를 반성한다.

 

 

▶▶▶ 냉장고에 넣어 둔 물을 꺼내 마실 때 마다 공기의 흐름이 묘하게 바뀐다. 이 젠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범인을 찾 아 냉장고 밖으로 쫓아낸다. 화장실 창 문도 샤워할 때 빼고 항상 열어놓는다. 하기 싫은 청소를 조금이나마 미뤄주 는 건 오로지 환기뿐이니까. 최근 들어 배수구가 막힐 때마다 못 견디고 바로 바로 머리카락을 제거하는 나, 드디어 ‘자취짬’이 좀 찬 듯.


04 니 방 콘셉트에 맞춰서 질러

 

열세 번의 이사를 하는 동안 많은 물건들이 나를 스쳐갔다. 친했던 선배는 입대하면서 자기가 쓰던 TV를 쾌척했고, 제주도 출신 동기는 휴학하면서 맡기고 간 이불을 찾아가지 않았다. 이밖에도 상, 아령, 물컵에 이르기까지 자취하는 사람들은 아낌없이 주는 나무처럼 모든 것을 주고 떠났다.

 

 

대책 없이 받아 온 물건들은 대부분 애물단지로 전락했다. 두 채널만 제대로 나오던 TV는 첫날 이후 켜지 않았고 이불엔 먼지만 쌓였다. 내가 산 물건들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다이소’에서 저렴함을 기준으로 구매한 것들은 생활용품이라기보다 생존용품에 가까웠기에 몇 번 쓰지도 못하고 공간만 차지했다.

 

마구잡이로 들여온 잡동사니가 좁은 방 구석구석을 채웠으니 요즘 트렌드인 ‘심플함’과는 정반대였던 것이다. 몇 년 전의 내 방 풍경을 떠올려보면, 단순한 삶을 찬양하는 책들이 왜 쏟아져 나오는지 알 수 있다. 공짜니까, 싸니까 물건을 마구잡이로 들여오던 그때로 돌아가지 않으려면 내가 바뀌어야 한다. 나름대로 방의 콘셉트를 잡고, 여기에 무엇이 필요할지 체크하는 나로.

 

▶▶▶ 그만큼 속았으면 ‘이거 필요하지 않아?’라는 말에 흔들리지 않고 중심을 지킬 때도 됐다. 마침 꼭 필요한 물건이었다면 내 방 어디에 두고 어떻게 쓰면 좋을지 그려보는 것이 먼저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우선 내 방에 애착을 가지는 것이다. 그러면 방 안에 들일 물건 하나를 살 때도 좀 더 신중해진다. 살 때 잘 사면 굳이 버릴 일도 없어진다.


05 뭘 먹고 사는지는 알아야지

 

자취생이라고 다 밥을 스스로 해 먹지는 않는다. 아니, 사실 밖에서 사 먹는 사람이 훨씬 많다.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귀찮아서, 맛이 없어서. 같은 이유로 나 역시 밥을 사 먹는다. 한때 김치볶음밥을 몇 번 해 먹었던 적도 있긴 하다. 귀차니스트도 간단하게 할 수 있고 웬만해선 맛없기 힘든 마성의 메뉴.

 

김치볶음밥에 질린 뒤로 다시 식당에서 밥을 사 먹기 시작했고, 그 후로 메뉴 선택지에서 김치볶음밥은 줄곧 제외되었다. 그러 던 올해 여름, 건강검진을 받았다. 콜레스테롤 수치가 높을 거라는 예상은 했지만, ‘통풍’이라는 병명이 나와 관련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예방을 위해서는 요산 수치를 낮춰야 한단다. 피해야 할 음식 목록이 뒤따랐다. 젊은 나이에 병 걸리고 싶지 않으면 말을 들어야 할 텐데, 과연 나는 이것들을 피할 수 있을까. 식당에서 뭘 넣는지 알지도 못하는 내가? 귀찮아도, 맛이 없어도 집에서 내 손으로 해먹어야 할 이유가 생겼다.

 

뭘 먹고 있는지 정확히 알려면 직접 만드는 수밖에 없다. 내가 만든 김치볶음밥에 집에서 보내주신 김치와 쌀밥, 양파 반 개, 당근 반 개, 스팸 반쪽, 포도씨유 조금이 들어있음을 아는 것처럼.

 

▶▶▶ 예전처럼 김치볶음밥에 계란 프라이만 먹다간 언제 다시 식당으로 돌아갈지 모른다. 메뉴의 다양화를 위해서는 레시피 확보가 우선이다. 어차피 건강 때문에 해먹는 거라면 식재료 고르는 법, 관리하는 법도 이참에 알아둬야겠다. 어지간하면 불평 없이 잘 먹는다는 이 점은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식당 주인들에게 그랬던 것처럼, 나의 요리에도 관대해져야겠다.


06 진짜 독립은 지금부터 시작

 

 

그동안 자취방은 ‘내 몸 하나 뉘일 곳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소망이 이뤄지는 공간인 동시에 ‘내 몸 하나 겨우 뉘일 수 있는 곳’에 불과했다, 몸은 쉴 수 있지만 마음을 채우기는 힘든 곳, 안전할 수는 있지만 행복하기는 힘든 곳. 사람마다 차이가 있겠지만 혼자 지내는 것이 익숙해지기까지는 시간이 걸린다.

 

 

기분 좋을 때야 무한정 허락된 자유를 마음껏 누리지만 마음이 허할 때는 방에서 답을 찾지 못해 친구들과 술을 마시러 나가거나 가족들이 있는 본가를 찾는다. 나 역시 지금도 까닭 없는 우울증이 찾아와 맥주 캔을 비우거나 목적 없이 포털 사이트를 들락거리는 것밖에 할 수 없는 시간에 맞닥뜨리곤 한다.

 

 

힘들 땐 방 밖에서 답을 찾는 것도 좋다. 친구나 연인, 가족들은 분명 큰 힘이 되니까. 그러나 내 방에서 혼자 있는 시간을 즐길 수 있을 때 비로소 진짜 ‘독립’, ‘생활로서의 자취’가 완성된다. 해 보고 싶었던 건 무엇이든 좋다. 그림을 그리고, 화분에 물을 주는 삶이 얼마든지 가능하다. 학원이 아닌 당신의 방, 당신만의 공간에서.

 

 

▶▶▶ 최근에 커피 메이커를 장만했다. 단골 카페에 발길을 끊을 생각은 없지만 커피 향기와 함께 눈을 뜨고 싶어 서. 요가 매트는 아직 제대로 써본 적 없지만 조만간 내 스트레칭을 도와줄 것이다. 꿀꿀한 밤이 와도 핸드폰 연락처를 뒤적일 필요 없다. ‘혼맥’은 방에서도 가능하니까. 나의 자취 2.0이 시작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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