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남자친구는 오늘도 X구스 밥버거를 먹는다. 월말만 되면 둘 다 생활비가 똑 떨어져 밥버거와 삼각김밥을 전전한다. 나는 생각했다. ‘왜 벌써 돈이 없지? 내가 남자친구보다 더 많이 썼나?’. 남자친구는 생각했다. ‘데이트하는 데 얼마 썼더라? 알 수가 있어야지…’
생활비 지출 내용엔 평소에 쓰는 돈과 데이트할 때 쓰는 돈이 섞여 있어서, 데이트 비용으로 얼마가 드는지 당최 가늠할 수가 없다. 나는 이 난국을 벗어나기 위해 남자친구에게 제안했다.
“우리… 데이트 통장 써볼까?”
돈 계산이 귀찮은 나와 충동 구매가 잦은 남자친구가 만나면 몇 가지 문제가 생긴다.
첫째, 있는 돈은 쓰고 본다. 마치 월말이 없는 사람들처럼.
둘째, 누가 얼마를 썼는지 따로 계산하지 않으니, 누군가는 꼭 돈을 더 쓰게 된다.
셋째, 월말엔 둘 다 돈을 탕진해 거지꼴을 면치 못 한다. 이럴 땐 자취방에 박혀 있을 수밖에.
하지만 데이트 통장을 만들면 이 모든 문제가 해결되겠지! 데이트 통장을 이 시대의 솔로몬이라 해도 손색이 없을 듯.
데이트 통장용 계좌를 새로 만들려고 했지만, 새 계좌 만들기가 까다로워서 갖고 있던 빈 계좌를 쓰기로 했다. 통장을 만든 후엔 한 달에 얼마씩 넣을지, 누가 카드를 갖고 다닐지 정했다. 우린 본격적으로 데이트 통장을 쓰기 전에, 데이트 통장 경험자들의 조언을 먼저 들어보기로 했다.
3년간 데이트 통장 관리를 맡았던 김딸기씨는, 남자친구가 순진한 얼굴로 “돈을 넣었는데 왜 돈이 없지?”라고 말해 머리채를 잡을 뻔한 적이 있다며 울분을 토했다.
예산 관리라는 귀찮은 책임은 카드를 갖는 자만의 몫이다. 지출 내용을 보며 오늘은 얼마를 썼는지, 잔액은 얼마나 남았는지 체크해야 한다. 하지만 잔고가 얼마인지 모르는 쪽은 돈을 쓰자고 주장한다.(분통) 메말라 가는 잔고 때문에 질렀던 커플티를 환불하는 고충을 모른다.
여행이라도 갈라치면 통장 관리자의 스트레스는 두 배로 뛴다. 차 편도 결제해야 하고 숙소도 예약해야 하는데 돈은 없고. 그런 걱정을 하고 있자면 ‘왜 혼자 끙끙대고 있지…’하는 생각이 든다.
경험자의 Tip
-이사과 씨는 카드는 남자친구가 관리하되, SMS 서비스에는 본인 번호를 등록해서 둘 다 결제 내역과 잔액을 확인할 수 있게 했다. 그래야 한 사람만 돈 없어서 안절부절 할 일이 없다고.
-통장 관리자였던 양포도 씨는 월초마다 입금하라고 독촉하는 게 일이었다. 그녀는 “둘 다 편하려면 자동이체를 하는 게 답”이라고 말했다.
처음 데이트 통장을 만들 땐, ‘돈은 30만 원 안에서만 쓰고, 남으면 저축해야지!’라는 알차고 헛된 계획을 세운다. 하지만 돈이 남는 일은 치킨을 먹다 남기는 일 만큼 희박하다.
데이트 통장 제도에 회의적인 태도를 보였던 서체리 씨는 “데이트 통장에 있는 돈은 이미 내 수중을 떠났기 때문에 거리낌 없이 쓰게 된다”고 말했다. 월초에 정신줄 놓고 펑펑 쓰다가 월말에 쫄쫄 굶는 건 데이트 통장이 있거나 없거나 마찬가지라고.
물론 데이트 통장을 쓰면 데이트에 나가는 비용이 얼만지 대략 알 수 있다. 하지만 안다고 아낄 수 있는 건 아니더라.
경험자의 Tip
-서체리 씨는 “데이트 예산을 현실적으로 잡아야 한다”고 말했다. 처음 데이트 통장을 만들 때 20만 원을 한 달 데이트 예산으로 잡았는데, 20만 원으로는 딱 보름 정도 지낼 수 있었다고. 실제 쓰는 돈과 예산이 터무니 없이 다르다 보니, 예산을 맞춰야 한다는 생각마저 희미해 졌단다. 공부할 때도 실현 가능한 계획일 때 지킬 마음이 생기는 것처럼, 예산도 맞출 수 있는 선일 때 아낄 마음이 생긴다.
데이트 통장을 쓰면 한 달 치 데이트 비용이 월초에 한 번에 빠져나간다. 한 달에 걸쳐 할부로 내던 돈을 일시불로 긁는 셈. 이래나 저래나 데이트에 쓸 돈이긴 하지만, 10~20만 원이 순삭될 때의 부담은 차원이 다르다. 술 약속이나 기념일이 많은 달엔 부담감이 한 층 충만해진다.
김참외 씨는 생활비 부족으로 기근에 시달리다 못해 데이트 통장에서 돈을 꺼내 쓴 적이 있었다. 당시 여자친구의 분노를 떠올리면 아직도 다리에 힘이 풀린다고. 그때 이후론 돈 쓸 일이 많은 달엔 5만 원씩 적게 넣었다.
경험자의 Tip
-김참외 씨처럼 달마다 상황을 봐가면서 입금금액을 조정할 수도 있다. 시험이 끝난 달이라 술 약속이 몰렸거나, 부모님 생신이 낀 달이라면 데이트 예산을 줄이자.
“내가… 낼까?” “음… 그럴래?” 흔한 커플들의 흔한 카운터 앞 풍경이다. 똥 마려운 강아지 같은 얼굴을 하고 이번엔 누가 돈을 낼지 열심히 눈치를 본다. ‘남자친구가 밥을 샀으니까 영화는 내가 사야겠지?’, ‘근데 어제는 내가 돈을 더 많이 쓴 거 같은데…’ 사실 카드 두 개 내밀고 “반반씩 해주세요!”라고 하면 깔끔하지만, 아직은 더치페이가 어색한 커플이 더 많다.
서체리 씨의 남자친구는 자신이 돈을 더 내야 한다는 의무감을 갖고 있었다. 그게 불편했던 서체리 씨가 먼저 데이트 통장을 제안했다. 데이트 통장을 쓰니 누가 더 내거나 덜 낼 일도 없고, 내가 계산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머리 굴릴 필요도 없어 편했다고.
경험자들이 입을 모아 말한, 데이트 통장의 가장 큰 장점이다. 데이트할 땐 “이건 너무 비싼데”, “돈 좀 아끼자”는 말을 하기가 껄끄럽다. ‘이정도 돈도 흔쾌히 쓰지 못 하는 사람’이 되긴 싫은 것이다. 하지만 데이트 통장을 만들면, 돈을 아끼자는 말은 ‘내 돈’이 아니라 ‘우리의 돈’을 아끼자는 뜻이 된다. 그러니 “30만 원 넘게 쓰면 안 되니까 오늘은 싼 걸 먹자”는 말도 자연스럽게 할 수 있다.
다음 연애에도 데이트 통장을 제안할 예정인 양포도 씨는 “돈을 이렇게 쓸까 저렇게 쓸까 함께 고민하는 것도 나름 재미있다”며 “부루마불 하는 기분”이라고 말했다.
P.S.
함께 돈을 써보면 생각보다 서로에 대해 많은 걸 알 수 있다. 돈을 쓸 때 뭘 중요하게 생각하는지, 상대방을 얼마나 배려하는지, 절제할 줄 아는 사람인지 등등. 내 여친or남친에 대해 알아가는 방법으로도 데이트 통장은 써볼 만하다. 아, 물론 헤어질 때 남은 돈을 아름답게 반띵하긴 힘들다는 건 알아둬야 한다.
Director 김혜원
Illustrator li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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