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술 X밥’이다(은어인 걸 알지만 이것처럼 의미가 확실히 전달되는 단어가 없다). 이 별명은 주민등록증의 잉크가 마르기 전부터 꼬리표처럼 따라붙었다. 스무 살 이후로 알게 된 사람들은 모두가 날 ‘술 X밥’이라고 부른다. 이쯤 되면죽기 전에 호로 삼아도 될 것 같다. ‘술 X밥 박한빛누리’.

 

처음 소주를 마실 땐 효리 누나가 “한 병 더!”를 외치던 때였다. 그 뒤로 현아, 수지, 아이유로 모델이 바뀌었지만 주량은 여전하다. 하물며 도수도 16.5도까지 낮아졌는데! 이쯤 되면 거의 음료수가 아닌가? 매번 그깟 음료수에게 패배해 화장실 변기를 끌어안고 자는 내가 싫어진다.

 

술자리가 절반을 차지하던 대학생활이 끝나고 사회에 나왔더니 사회생활은 한술 더 뜬다. 단순히 엑셀을 다루고 제안서를 잘 쓰는 것 그 이상의 것들은 술잔으로 채워졌다. 동료와의 관계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울며 겨자 먹기, 아니 울며 이슬 먹기로 술자리에서 오래 살아남는 법을 하나하나 터득해나갔다.

1. 최대한 예의를 갖춰라

사회 분위기가 수평적 인간관계를 지향하는 쪽으로 흘러가도 술자리에서 수평이란 가스불 위에 냄비를 올릴 때만 허용된다. 친구들과의 술자리가 아닌 이상 예의를 갖춰야 한다. 먼저 갓 태어난 아기 다루듯 술병을 어루만지며 잡자.

 

연장자 순으로 술을 권하되 술을 따를 때는 손으로 상표를 가린다. 술을 마실 때는 술잔을 움켜쥐고 고개를 돌려 술잔에 가볍게 키스한다.“크~” 이때 박력 있게 행동한다면 여분의 술을 바닥에 털어낼 수 있다.

 

술이 보이지 않게 손가락으로 술잔을 꽉 움켜쥐는 것도 한 방법. 어차피 술이 보이지 않으니 마시는 시늉만 하고 다시 내려놓기를 반복할 수 있다. 그리고 술을 안 마시더라도 이렇게 예의를 갖춘 사람에게 다그치는 경우는 드물다.

 

자꾸 술을 강요한다면 “저는 주량이 약합니다. 근데 이 술자리는 오랫동안 함께하고 싶네요. 천천히 템포를 맞춰가겠습니다.”고 정중하게 말하자. ‘술 X밥’은 술자리에서 4분의 3박자 리듬에 몸을 맡겨야 한다. 강약약 강약약. 이런 핑계로 남들이 석 잔 들이킬 때, 한 잔만 마시는 꼼수를 발휘할 수 있다.

 

2. 그럴싸한 건배사를 제안하라

여러 명이 모인 술자리에서 유용한 방법. 그럴싸한 건배사 한마디는 당신이 ‘술자리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인상을 심어주기에 충분하다. 일어선 후 좌중을 조용히 시킨다. 보통 “제가 건배사를 하겠습니다.” 하면 “올~ 이열~”하는 환호소리와 함께 주의가 집중된다.

 

“각자 잔을 채워주세요.” 이때가 킬링 포인트다. 모두가 잔을 따르는 동안 정작 본인은 빈 잔을 유지한다. 의외로 눈치 채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빈 잔이 들키지 않도록 잔을 양손으로 꼭 감싸고 이야기를 이어나간다. 이야기 할 때는 술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과 돌아가면서 눈을 맞춘다.

 

그래야 그들이 당신의 빈잔을 신경 쓰지 않는다. 그리고 앞으로 잘하자는 메시지와 함께 선창과 후창을 외친다. 건배를 하고 잔에 살포시 키스, 술을 마시는 척하며 잔을 내려놓은 뒤 황급하게 “짝짝짝!” 박수를 친다. 덩달아 사람들도 술을 마시고 엉겁결에 박수를 치느라 정신이 팔린다.

 

당신의 술잔이 비워져있는지 확인할 겨를도 없을 정도로 말이다. 건배사 이후로는 어느 정도 술을 빼더라도 욕을 덜 먹는 편이다. 어쨌든 당신은 술자리에서 큰 존재감을 각인시켰으니까 말이다.

 

3. 술자리에 차를 가져가라

노홍철은 음주운전으로 <무한도전>에서 하차했다. 김상혁은 “술은 마셨지만 음주운전은 하지 않았다.”는 희대의 명언으로 십 년째 고통받고 있다. 음주운전은 ‘잠재적 살인행위’라는 사회적 공감대 때문이다. 최근 경찰청의 설문조사에 따르면 음주측정 단속기준을 혈중 농도 0.03%로 강화하는 데에 국민 75%가 찬성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이는 소주 한 잔만 마셔도 측정될 수 있는 수치다. 누군가 술을 권하면 “오늘은 차를 가지고 왔다.”며 밑밥을 깔자. ‘술은 마시지 않더라도 이 자리에 함께하고 싶어 왔다’는 굳은 결의도 눈빛으로 한껏 내뿜으면서 말이다. 상대방도 대리운전 비용을 내줄 것이 아닌 이상 더 이상 술을 강요하지는 않을거다.

 

‘술 X밥’이 술자리에 맨몸으로 가는 것. 병사가 전쟁에 참가하면서 총을 가져가지 않는 것과 같다. 차가 없으면 쏘카라도 빌려라. 혹은 오토바이, 그것도 없다면 자전거. 그것마저 없다면 킥보드라도 타고 가라. 참고로 나는 힐리스를 신고 술자리에 간다.

 

Tip +
알코올은 증발하는 성질이 있어 술자리에서 말을 많이 하면 조금은 덜 취하게 된다고 한다. 술자리에서 물을 많이 마시는 것도 좋다. 화장실은 자주 가겠지만.

 

Freelancer_박한빛누리 mcnool123@gmail.com

Illustrator_김병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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