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말, 친구들과 광화문 광장에 나갔다. 집회 초심자였던 우리는 팟캐스트 ‘그것은 알기 싫다 집회 편’의 조언을 받아 준비물을 챙겼다. 초와 종이컵, 엉덩이 결림 방지용 스펀지까지 준비하는 철저함. 후훗, 이제 우리는 두려울 게 없어!

 

주최 측 추산 100만 명이 모였다고 하니 실로 민족 대통합이었다. 세대와 계급, 성별 간 혐오가 짙어지는 이 나라에서 온 국민이 한마음 한뜻으로 ‘하야송’을 부르고, 질서 정연히 같은 구호를 외쳤다니. 역사상 어떤 리더도 이런 민족 대통합은 못 이뤄냈을 듯하다.

 

집회가 끝난 다음 날에는 “그 많은 인파에도 불구하고 평화적으로 시위를 이어나간 우리 시민의식이 대단하다”는 기사가 쏟아졌는데, 사실 그 속에는 크고 작은 다툼들이 있었다. 일단 내가 겪었던 일 하나. 나와 친구 둘은 일찌감치 광화문에 도착해 모니터 가까이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런데 길이 아닌, 뻔히 사람이 앉아 있는 우리 자리를 유독 사람들이 통로 삼아 지나다녔다.

 

손에 든 촛불이 매번 흔들렸고, 친구의 어깨는 사람들의 발길에 치였다. 한 시간 남짓 참던 친구는 결국 자신을 격하게 치고 지나간 아저씨에게 소리쳤다. “아, 진짜… 여기 사람 있어요!” 그때부터 아저씨와 친구의 거친 눈싸움이 시작됐다. 아저씨는 “요즘 젊은 것들은 싸가지가 없어!”라며 한 대 칠 것처럼 몸을 내밀었다. 친구도 아저씨를 계속 쏘아봤고, 아저씨의 아내가 “그만해, OO아빠”라고 저지함으로써 겨우 사태가 진정되었다.

 

그러나 아주머니 역시 한마디 보태고 사라지셨다. “거, 젊은 아가씨들이 말조심해요.” 네? 네? 말조심이라굽쇼? 아주머니 남편 분 혼자 떠드셨는데요? 또 다른 친구는 집회 후, 초를 든 채 종로의 한 식당에 들어섰다가 한 무리의 아저씨들로부터 “아가씨가 요즘 젊은 사람 같지 않게 의식이 있네!” 라는 소리를 들었다고 했다. 의식? 이건 또 뭔 혼이 비정상 같은 소리여.

 

 

요즘 젊은이들은 의식이 없다는 편견은 어디에서 나왔으며, 대체 왜 ‘기특하다’는 태도를 취하는지 모르겠다고 친구는 말했다. 인파로 가득찬 집회였으니 크고 작은 소음이 발생하는 것은 당연했다. 그럼에도 나와 친구들이 겪은 그 목소리들은 인상 깊게 남았다. 새삼 깨달았다. 그동안 걱정하는 척, 위로하는 척하면서 20대와 여성을 평가절하하는 이들이 얼마나 많았는지. 그런데 알고 보니 발을 안 걸친 데가 없는 ‘최순실’이라는 검은 장막의 끝을 처음 잡아챈 것이 누구였나?

 

“이대생들이 고구마를 캤는데 무령왕릉과 지구의 내핵이 나왔다”는 농담을 잊지 말자. 최순실의 약한 연결 고리인 정유라를 고발하고, 용기 있게 목소리를 높였던 것은 이화여대생, 20대 여성들이었다. 한마음으로, 좋은 뜻으로 모인 시위라고 해도 이것이 끝난 후 세상이 과연 좋아질까.

 

나는 ‘요즘 젊은것들은 싸가지가 없다’는 아저씨의 목소리를 떠올리며 생각했다.  대통령이 바뀐다고 해도 사회 깊숙이 자리 잡은 세대, 계급, 성별에 따른 차별과 그에 따른 격차는 그리 달라지지 않을 거라고. 그렇다면 촛불은 계속 들되 크게 기대하지 않고, 나는 내 일상을 더욱 단단히 지켜나가야겠다는 다짐 또한 하게 되었다.

 

한국에서 대통령 하야를 외치며 촛불을 든 시기, 미국은 도널드 트럼프가 대통령에 당선됐다. 한국으로 치면 허경영씨와 이명박 전 대통령을 합친 인물이 뜬금없이 대통령이 된 것인데 트럼프는 그들보다 더 막말에 능하고 행동력까지 있으니 미국도 참 안됐다. 트럼프의 당선이 확정된 다음 날, 미국에서는 민주당을 지지했던 유명 인사들의 반응들이 쏟아졌다.

 

페이스북 CEO 마크 주커버그는 자신의 딸이 그럼에도 앞으로 더 좋은 세상에서 살 것이라고 믿는다며 희망의 타임라인을 올렸고, 마이클 무어는 ‘우리가 다음날 아침에 해야 할 일들’ 다섯 가지를 꼽았다. 불행히도 트럼프가 승리할 것을 지난 7월경에 예측했던 대예언가 마이클 무어의 메시지는 미국과 깊은 동맹관계를 맺고 있는 한국의 20대에게도 유효하다.

 

1. 민주당(더불어 민주당 아님, 미국 민주당임)을 사람들에게 돌려주라

 

2. 상황 파악을 거부했던 매체 전문가들을 잘라버려라

 

3. 이제부터 시작될 비열함과 광기를 막는 일을 주도하자.

 

4. ‘망연자실하다’는 말을 그만하자.

 

5. 낡아빠진 대선제도 때문에 진 것이지, 일반 투표에서는 힐러리가 이겼다. 우리는 여전히 다수가 ‘진보적’ 입장에 동의하는 나라에 살고 있다. 그걸 실현시킬 리더십이 없었을 뿐이다. 

 

나는 비록 마이클 무어가 아니지만, 미국 대통령은 트럼프이고 한국 대통령은 누구인지도 모를 이 시대의 20대가 내일을 어떻게 준비해야 할지를 고민해봤다.

 

1. 돈을 모으자. 트럼프는 금리를 올릴 것이다. 미국 금리가 올라가면 한국에도 지대한 영향이 있다. 부동산 가격이나 주가가 요동치는 것과 ‘가난뱅이인 나’는 상관없다고 여기지 말자. 당장 보증금과 월세가 올라갈 것이다. 불확실성이 높아질 때에는 일단 준비를 해둘 필요가 있다.

 

2. 함께 있으면 좋은 친구들을 가까이 두자. SNS가 아닌 카톡방에서 말하면 달려와줄 친구 한두 명을 소중히 여기자. 혼자 있는 게 편할 때도 있지만 이런 세상일수록 마음 맞는 친구들이 여럿 필요하다.

 

3. 조합에 가입하자. 관심사가 맞는 협동조합이나 시민단체를 알아보자. 특히 노조에 가입해야 한다. 적과 싸울 때 혼자보다는 둘이 무조건 유리하다.

 

4. 취업 전이라면 일상의 100%를 취업 준비에 투자하지 말자. 취업 후에 관계를 복구하려면 의외로 비용이 든다. 그동안의 욕망을 청산해야하니 첫 월급 받기도 전에 돈을 쓴다. 이것은 카드빚이 될 것이다.

 

5. 기술을 배우자. 직장과 관련 없는 ‘유용한 기술’은 자신감을 높여준다. 계획에 없던 나쁜 일(실직이나 지진, 전쟁…)이 생기더라도 일상을 단단히 지켜줄 나만의 대비책이 필요하다. 기술은 혼자서도 잘 살 수 있게 한다. 혼자 잘 사는 사람이 둘이서도 잘 산다.

 

 

기본적으로 비관주의를 고수하더라도, 그 안에서 일상을 지키려는 낙천주의를 가져야 한다. 우리는 더 나빠질 수도 있다. 집회가 평화로워도 광장 밖 세상은 여전히 혐오와 가난과 이기주의로 넘실댄다. 청년을 위한 제도는 보완되지 않을 것이며, 부동산 가격은 더 치솟을 것이고 우리는 계속 월세 생활자로 살아야 한다. 그럼에도 꿀잼을 포기하지 않고, 주변과 나를 비교하지 않으며 친구들과 어울려 일상을 지켜나갈 것. 뿌리가 단단한 일상은 트럼프도, 길라임도, 최순실도 함부로 발로 찰 수 없으니까.

 

P.S.

가명 짓기가 유행이라 가명으로 기고한다.저도 <시크릿 가든> 참 좋아하는데요. 하늘 아래 길라임이 둘일 수 없으니 내 가명은 라온이로 하겠다. 박보검♥


Freelancer_ 김라온 flymoon6@naver.com

Illustrator_ 전하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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